허구의 광해군 중립외교론…잘못 읽은 고려사
허구의 광해군 중립외교론…잘못 읽은 고려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02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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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여진족 인구, 조선의 1/30, 명의 1/300…일제 사학자들이 만들어낸 식민사관

 

17세기초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의 인구는 40~50만명에 불과했다. 이중 군사로 동원할수 있는 인구는 15만명이었다. 이에 비해 당시 조선의 인구는 1,400만명이었고, ()나라의 인구는 15,000만명이었다. 여진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30배나 인구가 많은 조선을 굴복시키고, 300배나 많은 명을 멸망시켰다. 1)

조선과 한족의 명이 한줌도 되지 않던 오랑캐 여진족에게 무너진 것은 세계사의 미스터리다. 그 미스터리의 한 가운데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식자층 사이에 광해군(재위 1608~1623)이 중립외교를 펼친 훌륭한 임금이라는 인식이 힘을 얻어 왔다. 중국 권력 교체기에 광해군이 명(), ()도 아닌, 조선을 위한 외교정책을 취했다는 것이다.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취하다 서인 패당에게 쫓겨난 불쌍한 임금으로 추앙하는 기류마저 생겨났다.

중립외교는 두 개의 강대국이 출현했을 때 어느 한나라에 치우치지 않고, 양쪽에 같은 비중을 두는 외교정책을 의미한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론 부상은 작금의 국제상황 전개와 우리 외교의 방향 전환에도 기인한다. 미국에 치우쳤던 외교의 중심을 중국과 미국 사이 중간쯤으로 이동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역사에서 그 힌트를 찾다 보니 광해군을 발견한 것이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론은 앞서 한반도 균형자론을 거론하던 노무현 대통령 때 부상했고, 다시 문재인 정부에서 한반도 운전자론이 나오면서 다시 떠오른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그러면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펼쳤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판단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근본적으로 틀렸다.

 

그 첫째 이유는 광해군 시기에 후금이 그렇게 강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618년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했을 때 인구는 명이나 조선에 비해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적었다. 경제력도 마찬가지였다. 인구와 경제력은 전쟁을 수행할 능력, 즉 국력의 기초적 판단자료가 된다.

광해군을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은 역사의 결론을 알고 있는 지금의 관점에서 당시 정책을 평가했다. 명나라는 결국에 후금(후에 청)에 의해 멸망했다. 하지만 광해군 시대에 후금이 명나라를 제압할 것으로 판단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광해군이 즉위하던 1608년 당시 누르하치의 건주여진(建州女眞)은 지금 지린성(吉林省) 백두산 일대의 부족에서 출발해 해서여진(海西女眞)의 하다(蛤達)와 후이파(輝發) 부족을 복속시킨데 불과했다. 해서여진에서 가장 강력한 예허(葉赫)와 우라(烏拉)도 정벌하지 못했다. 1583년 명나라 요동총관 이성량(李成梁)의 지시를 받아 또다른 여진족을 공격하러 나섰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은 사건을 가슴 속에 묻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 힘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명나라 요동도사로부터 받은 무역허가장(칙서)를 가지고 인삼과 말을 교역하던 상인으로, 재화를 축적해 군비를 늘려가고 있었다.

이 무렵 명나라 요동지역에서 지휘관 교체가 발생한다. 조선 출신으로 임진왜란때 참전한 이여송(李如松) 장군의 아버지이기도 한 요동총관 이성량이 광해군이 등극한 해에 파면되었다. 요동의 권력 교체기를 노려 누르하치는 1614년 부족 우라(烏拉) 병합했다.

하지만 이때까지 누르하치는 지린성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세력이 강한 예허(葉赫) 부족은 명나라에 복속해 누르하치에 대항하고 있었다.

1616년 누르하치는 나라 이름을 대금(大金, 후금)이라 정하고 스스로를 칸이라 칭하며 나라를 세웠다. 이어 2년후 16187대한 격문 발표하며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때까지 후금은 애송이 국가였다. 요동의 주요 지역은 명나라가 차지했고, 누르하치는 여진족도 완전하게 제압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선양 고궁(瀋陽故宫). 후금 때의 궁궐. /위키피디아
선양 고궁(瀋陽故宫). 후금 때의 궁궐. /위키피디아

 

둘째, 광해군은 고려사를 잘못 읽었다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 1621(즉위13) 66일자에 광해군이 요동의 상황을 보고받고 대신들을 질책하는 내용이 나온다.

중국의 일의 형세가 참으로 급급하기만 하다. 이런 때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自强)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高麗)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거의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렇다면 지금 무사들은 어찌하여 서쪽 변경은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이 두려워하는 것인가. 고려에서 했던 것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은 이 대목에서 고려를 두 번이나 언급하며, 고려가 금()나라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많이 공부하고, 답습하려 한 사실이 드러난다.

500년전인 1113년 아구다(阿骨打)가 여진의 추장이 되고, 2년후 거란의 지배에서 벗어나 황제를 칭하며 대금(大金)을 건국했다. 그때 거란족의 요()나라가 고려에 대금(對金) 연합전선을 펴자고 제안했다. 고려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중립을 표방했다. 이번엔 금의 아구다가 고려에 형제의 의를 맺자고 요구해왔다.

고려 조정에선 주전론과 주화론으로 갈렸지만, 이내 주전론이 승리했다.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고 전쟁에 대비했다.

그러는 사이에 금은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침공했다. 송의 휘종과 흠종이 금에 포로로 잡혔다. 송의 유신들은 양쯔강 남쪽으로 내려가 남송을 세우고 금과 대치했다.

고려 조정에서 다시 주화론과 주전론이 붙었다. 주전론자들은 야만족을 섬길수 없다고 주장한 반면, 주화론자들은 금의 세력이 커졌으니, 사대를 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이땐 주화론이 이겼다. 현실론이 승리한 것이다. 1126년 고려 인종(仁宗)은 금과 군신관계를 맺는다.

고려는 현실적으로 정세를 판단했다. 요와 금이 북방에서 주도권 전쟁을 벌일 때엔 중립을 취했고, 금이 강성해져 요를 멸하고 송을 압박할 땐 사대를 취했다.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힘의 균형관계를 적절히 파악해 대처했다. 그러면서도 문화국가인 송(또는 남송)과의 교류는 유지했다. 고려는 몽골이 일어날 때까지 100년간 평화를 유지했다.

500년후에 북방에 대금(후금)이 다시 일어나자, 광해군은 역사책을 꺼내 고려의 방법을 답습하려 했다. 고려가 요와 금 사이에 취한 중립외교를 모방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고려는 성공하고 조선은 실패했다. 고려는 군사력을 온전히 보존한 상태에서 조공과 사대의 대상을 바꾸었지만, 조선은 두차례의 전란(정묘, 병자호란)을 거쳐 사대할 나라를 바꿨다.

그러면 500년 사이를 두고 고려와 조선은 어떻게 달랐나.

우선, 군사적 대처의 방식이 달랐다.

고려는 금이 아직 만주에 머물러 국력이 상대적으로 약할 때, 전쟁 준비에 돌입했고 무장한 상태에서 중립을 지켰다. 금의 세력이 강해지고 우리 군사력을 대응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때, 고려는 사대로 전환했다.

이에 비해 조선의 광해군은 후금이 만주에서 흥기할 때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는 고려를 본따 외교로 해결하려 했다. 광해군을 쫓아내고 등극한 인조는 후금이 황제를 칭하고 중원을 공격할 때 대결구도로 전환했다. 적이 약할 때 강하게 대처하고, 강할 땐 물러나는 고려의 방식을 조선은 거꾸로 간 것이다.

또 중국과의 관계가 달랐다.

고려와 송나라는 군사적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임진왜란때 명나라 14만 대군의 지원을 받았다. 망할 왕조를 다시 살려준,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의 관계에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혈맹관계다. 고려는 송나라가 어떻게 되든 북방의 힘의 변화를 주시하며 대처하면 되었지만, 조선은 명나라와 함께 북방 여진족에 공동대응해야 할 군사적 책임이 있었다.

광해군은 상황판단을 잘못한 것이다. 그는 고려사를 열심히 읽었지만, 잘못 이해했다.

 

경기도 남양주 광해군묘 조선 15대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류씨(1576~1623)의 무덤. /문화재청
경기도 남양주 광해군묘 조선 15대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류씨(1576~1623)의 무덤. /문화재청

 

그러면 광해군 중립외교론의 시발은 어디인가.

광해군의 중립외교론은 일제시대에 한국사를 연구한 일본인 학자들에게서 먼저 나옸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와 다카와 고조(田川孝三).

특히 이나바는 1933광해군 시대의 만주와 조선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교토제국대학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할 정도로 깊이 연구했다. 이나바는 이 논문에서 광해군이 명과 후금 어느 쪽에도 휩쓸리지 않고 중립을 지키려 했으며, 택민(澤民)주의자였다고 찬양했다. 당시 신하들은 광해군과 달리 명의 편에서 후금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명분론자였다고 이나바는 평가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다른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이나바의 지도를 받았던 조선인 홍희(洪憙)패주 광해군론’(1935)에서 광해군은 별다른 과오가 없었음에도 혹심한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조반정의 주체들의 권력욕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옹호했다.

역사학자 한명기는 저서 광해군(2000년 간)에서 이나바가 광해군을 옹호한 것은 그가 만선(滿鮮)사관론자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만선사관은 일제의 만주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관으로, 역사적으로 조선과 만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만주와 조선을 중국의 관할에서 떼어 놓으려는, 식민사관의 연장이었다. 이 사관의 관점에서 보면, 만주에서 신흥국(후금)이 일어설 때 광해군이 중원의 명과 등거리정책을 취함으로써 정당성을 갖게 된다. 이나바는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 선통제)를 만주국 황제로 복위시켜 멸망한 청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한명기에 따르면, 우리 교과서에 광해군을 탁월한 외교전문가로 부각시킨 근거는 1959년 발표된 이병도의 글이다. 이병도는 광해군의 대후금정책이란 논문에서 광해군이 명과 후금 사이에 중립적 외교정책을 취했다고 추켜 세웠다. 이후 대부분의 국사 개설서에서 광해군에 대한 이병도의 긍정적 시각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사관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일제말기, 만주에 괴뢰국을 수립해 중국과 전쟁을 벌이던 일제의 사학자들의 시각에서 광해군을 띄운 것이지, 한국적 관점에서 평가를 내린 것은 아니다. 일본 사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광해군 옹호론이 이병도로 이어지다가 최근에 새로운 국제상황을 맞아 다시 부각된 것이다.

 


1) 함재봉, 한국 사람 만들기I,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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