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대원군 임종에도 운현궁 가지 않았다
고종은 대원군 임종에도 운현궁 가지 않았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11.28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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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고종이 태어난 잠저이자 대원군이 권력을 행사한 가옥

 

누구는 그를 개혁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또다른 사람은 그에 대해 조선을 멸망케 한 자라고 악평한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1821~1898)은 구한말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다. 그가 살던 집이 종로구 운니동의 운현궁(雲峴宮)이다. 운현이란 근처의 고개를 운현(雲峴) 또는 구름재라고 한 것에서 연유한다.

 

운현궁의 구조 /운현궁 홈페이지
운현궁의 구조 /운현궁 홈페이지

 

흥선대원군이 이곳에서 아들을 낳고 살았는데, 그 아들이 조선 26대 왕 고종이 되었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임금의 잠저라는 이유로 의 명칭을 받게 되어 운현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운현궁은 아들을 임금을 둔 아버지로서의 위세가 과감하게 발휘되었다. 본채는 노안당(老安堂), 노락당(老樂堂), 이로당(二老堂)의 세 채로 구성되고, 경호실 및 비서실 개념으로 수직사(守直舍)를 두었다.

 

수직사 /박차영
수직사 /박차영

 

운현궁은 고종이 즉위한 이듬해(1864)에 노안당과 노락당이 준공되었고, 1870년에 이로당이 완공되었다.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의 주된 거처였다. 노안은 논어 가운데 노자(老子)를 안지(安之) 하며라는 구절에서 따왔는데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라는 뜻이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 때 주로 이용했다. 노락당 편액은 조선말 문인 신헌이 썼다.

이로당은 운현궁의 안채로 쓰인 건물로서 이로(二老)’는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여흥민씨를 의미하는 말로 해석한다.

고종 3(1866) 321일에 고종과 민비의 가례를 운현궁에서 치렀다. 가례 준비 일체를 노락당에서 했다. 당시 가례 행사를 위해 1,641명과 700필의 말이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모두 운현궁을 드나들었다고 하니, 운현궁의 규모가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노안당 /박차영
노안당 /박차영

 

문은 정문, 후문, 경근문(敬覲門), 공근문(恭覲門)의 네 개가 있었다. 지금은 궁이 좁혀져 후문 하나만 남아 있다.

경근문은 고종이 아버지를 찾아 운현궁을 출입할 때 전용하던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있었다. 공근문은 대원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 전용한 문인데 경근문과 함께 없어지고 지금은 일본문화원 옆 터에 그 기초만 남아 있다.

임금 전용 대문을 둔 것은 고종이 아버지를 찾아오도록 한 것으로, 대원군이 기세[등등할 때엔 아들이 이 문을 자주 들락거렸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틀어진 고종의 방문 회수가 줄어 들었고, 대원군이 임종에 임박했을 땐 아예 오지도 않았다. 고종은 만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어머니 여흥부대부인의 장례를 국장(國葬)으로 거행해 주었지만, 장례식에 찾아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업보가 있었다. 청일전쟁 중에 대원군은 고종을 폐위하고 맏아들 이준용을 세우려고 음모하다가 발각되었다. 이른바 이준용 역모사건이다. 이 일로 아버지와 아들은 원수지간이 되었다. 권력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도 비정한 것이다.

 

노락당 /박차영
노락당 /박차영

 

나라를 잃고 1912년 일제가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이 몰수되었다. 일제는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했다. 실제로는 대원군 후손들이 운현궁을 유지·관리하도록 했다.

1948년 미군정에 의해 소유권이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되고 이후 그 소유권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대원군 후손 사이에 법적 공방이 있었으나 대원군의 5대손 이청(李淸)에게 운현궁 소유권이 확정되었다. 1991년 운현궁을 유지·관리하는데 어려움이 생기면서 후손이 양도 의사를 밝혔고, 서울시가 이를 매입하게 되었다. 199312월부터 보수를 시작해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문화재청은 1977년에 사적으로 지정했다. 서울시 소유이며, 관리자는 종로구청이다.

지금은 운현궁의 일부가 덕성여자대학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도 헐려 나가고 영화루와 은신군·남연군의 사당도 모두 없어졌다.

 

​이로당 /박차영​
​이로당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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