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중앙대교당과 방정환 어린이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방정환 어린이운동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11.29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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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비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쓰다 준공 늦어져…3·1운동과 어린이운동 발상지

 

서울 종로구 관철동, 낙원동, 경운동 일대는 100년전 19193·1운동의 발상지다. 이곳에서 출발하는 도로를 삼일대로라고 명명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재동에서 삼일대로를 따라 낙원상가로 가다 보면 우측에 오래된 붉은색 건물이 나타나는데, 천도교 중앙대교당이다. 지금은 주변에 고층빌딩이 들어서 높은줄 모르지만, 100년전에 이 건물은 높고 웅장해 조선총독부, 명동성당과 함께 서울시내 3대 건물로 꼽혔다고 한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측면 /박차영
천도교 중앙대교당 측면 /박차영

 

천도교 중앙대교당 입구에 세계어린이운동발생지라는 표지판이 서있다. 이게 왜 여기 있을까, 궁금해 졌다.

사연인즉, 일제강점기에 55일 어린이날을 제정한 방정환 선생이 이곳에서 활동했다. 방정환은 천도교 3대교주인 손병희의 사위였고, 천도교의 도움으로 이 곳에서 어린이운동을 펼쳤다. 방정환은 독실한 천도교도인 아버지를 따라 천도교 사상에 공감하고 천도교 기관에서 일했다. 방정환은 손병희를 도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그후 도교 토요대학을 다니면서 마해송, 윤극영 등과 함께 어린이 단체 '색동회'를 조직하고 김기전과 함께 어린이날을 제정했다. 귀국후 1921년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고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 표지식 /박차영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 표지식 /박차영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3·1운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

대교당은 19184월 천도교 총회의 결의로 시작되었다. 천도교 교주였던 손병희(孫秉熙, 1861~1922)는 처음에 건평 400평 규모의 대교당을 계획하고 건축허가를 신청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가 교당이 지나치게 거창하다는 것과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핑계를 대고 불허했다. 그래서 규모를 절반으로 줄여 겨우 허가를 받았다.

비용은 300만 교도에게 가구당 10원씩 성금을 모아 당시 화폐 22만원을 걷어 마련했다. 그런데 공사를 시작하려는데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손병희는 급한대로 건축비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썼다. 그 바람에 공사가 늦어져 19212월에 준공했다.

규모는 대지 1,824, 건평 212평이다. 기초는 화강석으로, 벽은 붉은 벽돌로, 지붕은 철근앵글로 지었으며, 중간에 기둥을 없앴다. 전면에 2층 사무실을 두고, 그 위에 탑 모양의 바로크 풍으로 높이 올렸다. 수용인원은 800명에서 1,000명이다. 석재는 창신동 채석장에서 가져왔고, 천장 앵글철재는 미국에서 수입했다.

설계는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맡았으며, 독일인 건축가 안톤 페러를 직원으로 채용했기 때문에 독일의 건축사조가 가미되었다. 시공은 중국인 장시영(張時英)이 했다.

겉보기엔 교회나 성당 같은 서양식 종교 건축물을 닮은 듯하다. 하지만 건물 곳곳에 우리민족의 상징인 박달나무꽃과 무궁화 문양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은 천도교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일 외에도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기도 했으며, 소파 방정환이 중심이 된 어린이운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중앙대교당 옆으로는 현재 천도교의 사무실이 있는 수운회관이 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정면 /박차영
천도교 중앙대교당 정면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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