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①…정쟁에 휘말린 통신사의 엇박자
임진왜란①…정쟁에 휘말린 통신사의 엇박자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12.02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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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듣고 싶은대로 들은 선조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두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공한 전쟁이다. 이 전쟁은 조선과 일본의 싸움을 넘어 중국 명나라가 참전하고, 오키나와의 류큐국, 만주족, 멀리 태국에까지 영향을 미친 국제전이었다. 이 전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케이초(慶長)의 역()’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으로 부른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중국을 침공할 길을 내달라며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했다. 전쟁은 예고되었으나, 조선 조정은 그 예고를 무시했다. 오판의 시발은 전쟁 발발 직전에 교토를 방문한 조선통신사의 엇갈린 보고였다.

 

전쟁이 일어나기 1년전인 1591(선조 24)초 일본을 다녀온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이 선조에게 보고했다. 선조수정실록(2431)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황윤길은 보고하기를,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고 했다. 이에 김성일이 아뢰기를 "그러한 정황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라고 했다.

선조가 수길(히데요시)이 어떻게 생겼던가?‘라고 물었다. 황윤길이 아뢰기를,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고 했고,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고 대답했다.”

이 대목은 그후 400여년 동안 두고두고 회자되는 장면이다. 일본으로 간 외교사절단의 정사와 부사의 보고가 달랐던 것이다. 보고가 다를수는 있다. 선택은 국정최고책임자, 즉 군주가 해야 할 몫이다. 선조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안이함에 빠졌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김성일의 말을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비관적으로 전망한 황윤길의 보고대로 전개되었다. 선조가 오판한 것이다.

 

朝鮮通信使来朝図(그림, 羽川藤永) /위키피디아
朝鮮通信使来朝図(그림, 羽川藤永) /위키피디아

 

1590(선조 23)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된 것은 1443(세종 25) 이후 150년만이다. 이때 조선이 사절단을 보낸 것은 일본의 요구에서였다. 일본을 통일하고 전국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명나라에 전쟁을 도발하기 앞서 조선을 외교적으로 접근했다. 히데요시는 조선에 길을 빌려주고(假道), 조선국왕이 일본으로 입조(入朝)하도록 하라고 대마도 도주에게 명령했다. 대마도 도주 소 요사시게(宗義調)는 조선이 가도와 입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조선통신사를 보내도록 하자는 절충안을 내 히데요시의 허락을 얻어냈다. 요사시게는 가신인 타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조선에 사절로 파견했다. 조선 조정은 일본의 일방적인 요구를 거부했다. 빈손으로 돌아간 야스히로는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사형당했다.

대마도주는 승려 겐소(玄蘇)를 다시 사절로 보냈다. 조선 조정은 두 번 거절하기 어려워 조건을 내걸었다. 조건은 3년전(1587)에 녹도를 침범한 왜구 두목과 조선인 앞잡이 사화동, 그때 붙잡혀 간 조선인을 돌려주라는 것이었다. 대마도주는 조선의 요구를 받아들여 왜구 3명과 반역자 사화동, 조선인 포로 116명을 돌려보냈다. 조선은 왜구와 사화동의 목을 자르고 일본의 요구를 들어 사절단을 구성했다.

 

정사로 임명한 황윤길은 서인이었고, 부사 김성일은 동인이었다. 당시 동인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 황윤길은 정사였지만 야당이었기 때문에 우유부단했고, 김성일은 사절단 2인자였지만 집권세력이었기 때문에 당당했다. 둘의 성격도 달랐을 터였지만 정사와 부사는 15903월 한양을 출발해 이듬해 1월 귀국할 때까지 10개월 내내 대립했다.

사절단 수뇌부의 갈등은 대마도에 도착하면서부터 불거졌다. 159054일 통신사는 대마도주가 내준 관청에 도착했고, 환영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일본측 정사인 소 요사시게가 먼저 와 있고, 부사인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뒤늦게 나타나 가마를 타고 대청까지 올라왔다.

김성일이 발끈했다. 아랫것이 먼저와 문밖에서 말에서 내려 공손하게 들어와야 할 터인데 요시토시에겐 버르장머리가 없었던 것이다. 김성일은 환영회에 참석하지 않고 방에 들어가 버렸다.

요시토시가 이를 알고 더럭 겁이 났다. 배짱을 부려보려 했다가 혹시 사절단이 돌아가 버리면 히데요시의 분노를 일으켜 야스히로처럼 죽음을 맞을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종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사죄하고 마부를 죽여버렸다. 그제서야 김성일은 마음이 풀어졌다.

사소한 문제에 일본의 시종 하나가 죽임을 당하자 서장관 허성이 김성일에게 비난했다. 그러자 김성일이 대답하기를, “조선과 일본은 임금과 신하 사이이고, 일본은 부용국(附庸國)에 지나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보면서 오히려 황윤길이 일본측 환심을 사려 한다고 비난했다. 부용국은 속국, 약소국의 뜻인데, 김성일은 일본을 얕잡아 보면서 일본에 타협적인 황윤길의 태도를 못마땅해 한 것이다.

두 번째 대립은 일본의 선위사(宣慰使)를 기다리는 문제였다. 관례적으로 조선통신사가 가면 일본 조정은 선위사를 대마도에 보내 마중케 했다. 그런데 이번에 선위사가 오지 않은 것이다. 김성일은 선위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 했고, 황윤길은 선위사를 기다리지 말고 수도로 가자고 했다. 이 문제는 황윤길이 먼저 떠나니 부사가 하는수 없이 따라가면서 끝이 났다.

그해 7월말 사절단 일행은 교토에 도착했다. 히데요시는 교토에 없었다. 그는 동쪽 지방을 정벌하러 떠났고, 궁전도 수리 중이어서 만날 수 없다고 했다.

사절단은 히데요시가 부를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렸다. 정사 황윤길은 왕명을 받고 왔는데, 히데요시를 만나지 못하게 가는게 아닌가, 초조해 했다. 히데요시가 노리는 것이 상대방을 초조하게 하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러던 중 대마도 요시토시가 통신사가 데려간 조선 악단의 연주를 요청했다. 김성일이 버럭 화를 냈다. 히데요시를 면담하는 날에 쓰려고 데려온 악단을 아랫것들이 먼저 듣겠다니, 조선의 사대부로선 용서할수 없는 일이었다. 김성일은 신하가 사신으로 가서 왕명을 전하지 않은 것은 시집가지 않은 처녀와 같다. 어찌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가 기생처럼 노래를 팔아 사람을 기쁘게 할수 있겠는가.”라며 거절했다. 그의 비유가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본 신하들의 엉뚱한 요구를 거절한 것은 외교적 자존심을 지킨 일이라 하겠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위키피디아
토요토미 히데요시 /위키피디아

 

히데요시는 마침내 교토로 돌아와 통신사를 만났다. 징비록에 그 장면이 서술되어 있다. “사신들은 교자를 타고 그들의 궁전으로 들어갔다. 날라리와 피리를 불고 당에 올라가 예를 행했다. 잠시후 히데요시가 나타나 우리 악공들의 연주를 듣고 있다가

조선통신사는 선조의 국서를 전했으나, 히데요시는 국서를 주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 황윤길과 김성일은 이 문제로 디투었다. 김성일은 국서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자 했고, 황윤길은 국서가 오지 않더라도 돌아가자고 했다. 황윤길은 일본에 오래 있다가 무슨 변고를 당할지 몰라 겁을 먹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위협에 놀란 것이다.

 

사절단은 교토에서 나와 오사카 바닷가에 마련된 계빈(堺濱)에서 기다렸다. 그제서야 히데요시의 국서가 전달되었다. 히데요시의 국서에는 정사·부사 모두가 받아들일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쳐들어 갈 터이니, 조선 국왕이 군대를 지휘해 앞장서라고 했다. 조선 왕의 호칭을 전하라 하지 않고 합하라고 했으며, 조선 임금이 보낸 예물을 방물이라낮춰 표현했다. 입조(入朝)라는 말도 썼다. 통신사는 이런 문구를 고치지 않으면 가져가지 않겠다고 했다. 왜측은 합하, 방물 등의 표현은 고쳐주었지만 입조란 말은 그대로 두었다.

 

우여곡절 끝에 통신사는 10개월만에 돌아와 선조 임금에게 보고했다. 둘의 보고가 엇갈렸다. 우성룡은 같은 당파인 김성일을 따로 불러 나무랐다. 선조수정실록에 그내용이 기록되었다.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했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라고 물었다. 이에 김성일은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동인 소속 김성일이 서인 소속인 황윤길의 보고에 어깃장을 놓았다는 것이다. 당쟁이 빚은 결과다. 문제는 당시 집권세력이 동인이었다. 집권당파는 동인 소속 김성일의 말을 따라 일본의 도발 가능성을 낮춰 평가한 것이다. 선조도 듣고 싶은 것만 들었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다.

당시 대마도의 요시토시와 겐소가 조선통신사를 따라 한양에 왔는데, 그들은 내년에 조선을 침략할 것이란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그들을 접대한 조선의 선위사 오억령(吳億齡)이 그 첩보를 조정에 보고했다. 조정은 오억령의 보고를 무시했다. 오히려 그를 선위사에서 물러나게 했다. 하지만 상황은 오억령이 보고한대로 전개되었다. [로 계속]

 

 


<참고한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이덕일, 유성룡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 2007,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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