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②…국외탈출 시도한 선조
임진왜란②…국외탈출 시도한 선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12.04 17:0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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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파천에 한양 백성들 궁궐 불태워…유성룡, 요동내부에 적극 반대

 

[에서 계속] 1592413일 왜군이 침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은 일본군의 동태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갖지 못했다. 선조실록 413일자에 이렇게 기록했다.

적선(賊船)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 정발(鄭撥)은 마침 절영도(絶影島)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다. 정발이 미처 진()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정발은 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최전방을 지키는 부산 첨사가 일본이 쳐들어오는 그 날, 사냥에 나가 있었고 왜선을 조공선으로 알았다는 것은 적의 움직임을 조금도 파악하지 못했고, 따라서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선조와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 세력들이 같은 당파인 김성일의 말을 좇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할 인물이 되지 못할 것으로 믿었으니, 지방장수인들 제대로 경계를 했을리 없다.

 

부산진순절도 /위키피디아
부산진순절도 /위키피디아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이틀 뒤에 일본군은 부신진성과 동래성을 함락했다.

류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왜적의 침략사실이 처음 조정에 도착한 것은 침략을 받은지 4일째 되는 417일 이른 아침이었다. 경상좌수사 박홍의 장계가 도착한 것이다. 이는 전국에 깔아놓은 봉화가 작동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장계를 소지한 파발마가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419일에 왜군은 밀양성에 입성한 후 서둘러 북상했고, 조정은 신립 장군을 삼도순군사로 임명했다. 하지만 428일 기대를 모았던 신립장군은 충주 탄금대에서 완패하고 전사했다. 이제 수도 한양이 위태로워졌다.

탄금대 방어선이 무너진 후 선조는 파천(播遷)을 결심했다. 선조는 어전회의를 열어 파천을 거론했다. 대신들은 반대했다. 선조실록(428)은 이렇게 적었다.

충주에서의 패전 보고가 이르자 임금이 대신과 대간을 불러 입대케 하고 파천(播遷)에 대한 말을 발의했다. 대신 이하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부당함을 극언했다.

영중추부사 김귀영은 종묘와 원릉(園陵)이 모두 이곳에 계시는데 어디로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경성(京城)을 고수하여 외부의 원군(援軍)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합니다"고 했다. 우승지 신잡은 전하께서 만일 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고 끝내 파천하신다면 신의 집엔 80노모가 계시니 신은 종묘의 대문 밖에서 스스로 자결할지언정 감히 전하의 뒤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고 했다. 수찬 박동현은 "전하께서 일단 도성을 나가시면 인심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연()을 멘 인부도 길 모퉁이에 연을 버려둔 채 달아날 것입니다"고 아뢰었다. 신하들이 목놓아 통곡하니 상이 얼굴빛이 변하여 내전으로 들어갔다.“

왕조국가의 전쟁에서 왕이 포로로 잡히거나 사망하면 전쟁에서 진다. 선조가 피난 가는 것은 마땅하다. 그런데 신하들은 반대했다. 반대하는 명분이 우스꽝스럽다. 종묘와 왕릉을 지키기 위해 수도를 지켜야 한다느니, 노모가 계시니 파천을 따라가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나마 박동현이 제기한 민심동요는 이유가 될만하다. 일본군이 며칠후면 수도에 들어올 지근거리까지 접근했는데, 주력군이 무너진 상황에서 수도를 지키라는 것은 신하로서도 명분이 없는 주장이었다.

영의정 이산해는 달랐다. 이산해는 옛날에도 피난한 사례가 있다면서 파천 불가론을 극복했다. 이산해가 방향을 정하자, 논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전란을 맞아 세자 책봉론이 거론되었다. 파천을 반대하던 신잡이 먼저 나서 "세자를 책봉해 일찍 대계(大計)를 정하고 사직의 먼 장래를 도모하소서" 하며 건의했다. 신잡의 파천 반대는 의례적으로 하는 쇼였던 것이다.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간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선조는 여차하면 명나라로 건너갈 생각을 한 것이다.

 

임금의 피난은 신속하게 추진되었다. 파천 결정 이틀후인 430일 임금과 조정은 서울을 떠났다. 선조실록 430일자 기록을 보자.

새벽에 주상이 인정전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人馬)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상과 동궁은 말을 타고 중전 등은 뚜껑있는 교자를 탔었는데 홍제원에 이르러 비가 심해지자 숙의(淑儀)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그 수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점심을 벽제관에서 먹는데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은 반찬도 없었다.“

허겁지겁 도망가느라, 점심때 세자가 반찬도 없이 밥을 먹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임금이 경복궁을 떠나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세 궁은 물론 종묘와 사직단도 불탔다. 백성들이 분노한 것이다. 그들은 백성들을 괴롭히던 형조와 장예원에 난입해 불태웠다. 장예원(掌隸院)은 노비문서를 관리하던 곳이다.

임금의 피난행렬을 보자 밭에서 일하던 농민들은 나랏님이 우리를 버리신다면, 우리는 누구를 믿고 살아간단 말입니까라며 울고 통곡했다.(징비록)

 

임진왜란 전투도 /위키피디아
임진왜란 전투도 /위키피디아

 

피난길에 나선 선조는 패닉에 빠졌다. 선조수정실록 51일자에 선조의 심리상태가 묘사되어 있다. 동파역(지금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에서다.

이날 아침에 임금이 이산해와 유성룡을 불러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괴로운 모습으로 말했다. 이모(李某)야 유모(柳某)!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꺼리거나 숨기지 말고 속에 있는 생각을 털어놓고 말하라.“

영상과 좌상은 나라의 어른이다. 도망가는 임금이 정승을 이모, 유모라고 부른 것은 제정신이 아님을 보여준다. 사관들은 그 대목을 그대로 적었다.

흥분상태에 빠진 선조는 승지 이항복에게 어찌하는 게 좋은지 물었다. 이항복은 거가(임금의 수레)가 의주(義州)에 머물 만합니다. 만약 형세와 힘이 궁하여 팔도가 모두 함락된다면 바로 명나라에 가서 호소할 수 있습니다."고 했다. 윤두수는 지세가 험한 함경도로 가자고 했다.

의주는 국경도시다. 이항복은 그곳에 피난해 있다가 여차하면 중국으로 건너갈수 있다고 건의한 것이다.

이에 유성룡이 극구 만류했다. 그는 "안 됩니다. 대가(大駕)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朝鮮)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고 했다. 그러자 선조는 "내부(內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고 말했다.

선조의 속내는 내부였다. 나라를 왜에 넘겨주고 자신은 중국의 제후가 되어 목숨이라도 부지가겠다는 뜻이다. 선조가 본심을 얘기하자 이항복이 자신의 말이 그게 아니라며 한발 물러났다. 이항복은 "신이 말한 것은 곧장 압록강을 건너자는 것이 아니라 극단의 경우를 두고 한 말입니다"고 해명했다.

유성룡이 임금 앞에서 이항복을 질책했다. "지금 관동과 관북 제도(諸道)가 그대로 있고 호남에서 충의로운 인사들이 곧 벌떼처럼 일어날텐데 어떻게 이런 말을 갑자기 할 수 있겠는가"

영의정 이산해는 몸을 사렸다. 그는 파천의 당위성을 말해 선조의 아믐을 샀으나 내부론에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어전회의가 끝나고 유성룡은 이항복을 따로 불러 나무맀다. 그 사실이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유성룡이 이항복에게 책망했다. “어떻게 경솔히 나라를 버리자는 의논을 내놓는가. 자네가 비록 길가에서 임금을 따라 죽더라도 궁녀나 내시의 충성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이 한번 퍼지면 인심이 와해(瓦解)될 것이니 누가 수습할 수 있겠는가." 이항복은 사과했다고 한다.

 

선조는 요동내부를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유성룡과 의견을 개진하지 않은 이산해를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날로 이산해를 파직하고 유성룡을 영의정으로 삼았으나, 그 다음날 변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전날 결정을 뒤집아 유성룡을 영의정 자리에서 파직했다. 그래도 유성룡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고 중국 사신이 올 때 접대하는 풍원부원군에 임명했다. [으로 계속]

 


<참고한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이덕일, 유성룡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2007,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징비록, 김흥식 옮김, 서해문고,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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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바이오 2022-12-13 16:16:33
선조가 시작한 국외 탈출이 고종에 이르러 아관파천. 한일합방 이후 해외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목숨을 건 분들을 보면 한민족유전자에 애국심이 담겨있는듯.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세계사적으로 특이한 말이 있습니다. 살아남아야 하는 경쟁이 심하다 보니 남이 잘되면 내 생존가능성이 사라진다는 믿음과 경험이 있었던 듯. 이씨왕조 멸망과 한일합방, 해방 후 남북분단과 625 전쟁과 휴전. 극단적인 근세사 속에서 60년대 이후 경제발전에 목숨 걸어서 선진국에 진입한 반면, 뒤늦은 민주주의 투쟁의 길에서 나온 각종 분란의 현 대한민국. 기업과 개인이 세계에서 앞장서 나가고 있습니다. 오래전 기업가가 이야기한 4류의 정치가 빨리 성장해 3류를 거쳐 일류에 달하기를 기원해 보네요. 내 생전에.

주하 2022-12-08 06:48:35
지도에 일본해는 좀 수정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