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순환도로에 서있는 한양공원비의 사연
남산순환도로에 서있는 한양공원비의 사연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12.04 2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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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용 공원 입구에 세워진 비석, 고종의 글씨…사라졌다가 2002년 발견

 

남산케이블카 승강장에서 100m쯤 올라간 지점에 한자로 漢陽公園이라 쓰여진 비석이 있다. 한양공원비(漢陽公園碑)라 불리는 이 비석은 서울 남산에 조성된 한양공원을 기념하기 위해 공원 입구에 세운 표지석(標識石)이다. 이 말 없는 비석에는 사연이 있다.

 

개항 이후 1885년부터 일본인들의 도성 내 거주가 정식으로 허용되었고, 일본인들은 명동에서 충무로 일대에 많이 살았다. 한양에 일본인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일본거류민단이 일본인을 위한 위락시설을 조성하려고 했다.

이에 그들은 1897년 남산 북쪽의 현 숭의여자대학교 자리에 왜성대공원(倭城大公園)을 조성했고, 1908년엔 한성부로부터 남산 기슭에 30만평을 무상으로 임대받았다. 공원 부지는 현재의 남산식물원 자리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넓은 면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을사조약 이후였으니, 권력은 이미 일본에 넘어 가 있는 상태였다. 태황제로 물러나 있던 고종은 칙사를 보내 한양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08년부터 조성을 시작한 한양공원은 각종 시설을 완비해 1910529일에 정식으로 개원했다. 한양공원 개원일에 고종은 칙사를 보내 치하하고, 비석에 새겨진 글씨인 한양공원을 직접 써서 보냈다고 한다.

한양공원 개장일은 대한제국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한일병합의 국치일이 1910829일이므로, 정확하게 3개월전이다. 고종은 제위를 아들 순종에게 양위하고 태황제로 물러나 있을 때였다. 고종이 한양공원의 글씨를 써준 것이 일본의 압박에 의한 것인지, 자발적으로 쓴 것인지 알수는 없다. 다만 후세인들이 보기엔 치욕적이다. 나라를 내주기 직전에 침략자의 무리들에게 무슨 마음으로 저런 글씨를 써주었던가.

 

한양공원비 /박차영
한양공원비 /박차영

 

원래의 위치는 남산 3호터널 입구였으나, 터널 공사 때 현재의 위치로 이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비석의 자리는 공원의 입구였다. 바닥에 화강암 대석(臺石, 110×55.5×45cm)을 놓고 그 위에 비신(碑身 88.5×165×45cm)을 세웠다. 전면에 한양공원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으며, 후면의 글씨는 인위적으로 정으로 쪼은 듯 없어져 알아볼 수 없다. 비석 주변에는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철선을 두르는 데 사용된 사각 돌기둥 3개가 남아 있다.

 

한양공원은 1918년 조선총독부가 그곳에 조선신궁을 건설하면서 폐쇄되었다. 한양공원비는 광복 이후 오랜 시간 사라졌다가 2002년 서울 중구 회현동 케이블카 승강장 인근의 공원 철조망 안쪽 6~7m 지점의 풀숲에서 발견되었다.

뒤쪽 비문의 글씨는 알아볼수 없도록 훼손되었지만, 옛날 사진이 발견되면서 그 내용이 해독되었다. 1925년 조선신궁에서 바라본 풍경과 당시 생활상을 담은 사진집에서 비석의 뒷면 사진이 공개되었다. 그 사진을 통해 해독한 뒤쪽 비문 내용은 비석이 메이지(明治) 45(1912)에 조성되었고, 일본인 경성거류민단장이 쓴 평범한 한양공원기라는 것이다..

억울하고 치욕적인 과거도 역사다. 이 비석은 역사적 보존 가치를 지닌다. 한양공원비는 정부나 서울시가 지정한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으나,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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