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⑤…적의 목을 베는 노비, 면천하다
임진왜란⑤…적의 목을 베는 노비, 면천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12.0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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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충군에 양반들, 극심한 반발…천민출신 신충원 발탁, 문경새재 축성

 

[에서 계속] 조선은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구별이 뚜렷했다. 병역의무는 오롯이 상민(常民)의 몫이었다. 조선초기에 양반에게도 병역의무가 있었으나 200년간 전쟁이 없다보니 군역 대신에 베()로 대체하다가 그나마 군포 납부의무제도도 폐지되었다. 중인은 자신의 기술을 제공함으로써 병역을 대체했고, 노비는 양반의 사유물로서 군역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따라 병역의무는 일반 양인(良人)에게만 부과되었다. 농민이 주류인 양인들은 16세부터 60세까지 병사가 되어 몸으로 때우든지(正兵), 군복무에 필요한 돈을 납부해야(奉足) 했다.

159210만명 이상의 왜군이 쳐들어 왔을 때 조선군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무엇보다 숫적으로 부족했다. 4만여명의 명군이 들어와 왜군을 퇴각시킨 후에도 언제까지 남의 군대 뒤에 숨어서 나라를 지킬수는 없었다.

조선의 양반사대부는 비겁했다. 그들은 나랏일은 도맡아 걱정하면서도 군무는 아랫것들이나 하는 일로 여겼다. 나라를 잃으면 양반이란 허울도 없어지는데, 명군의 힘으로 겨우 숨을 돌리는가 싶으니 자신의 이익을 챙겼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개념은 성리학에 없었다. 그들의 유교철학은 지배계급의 논리였을 뿐이다.

 

전란이 벌어지자 전투에 내보낼 인적자원이 절실했다. 누가 보아도 방법은 간단했다. 양반들에게 군무를 지우고, 노비를 병력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15936월 한양을 탈환한 직후 조정은 병력충원을 논의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노비에서 병력을 충원하는 것이었다. 선조실록 26(1593년) 614의 기록을 보자.

비변사가 보고했다. “"우리나라 사족(士族)의 집에는 노복이 천 또는 백을 헤아리는데, 군병력은 날로 축소되고 있습니다. 이는 오래도록 내려온 풍속인데, 서둘러 노비들을 군적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공노비, 사노비를 막론하고, 삼의사(三醫司)의 잡과와 같은 과거시험을 설치해 합격하면 우림위(羽林衛)에 예속시키는 방안이 적합합니다.”

합참 격인 비변사는 노비에게 서험을 치르도록 해 우림위라는 군대에 배속시키자고 했다. 선조는 선뜻 찬성하지 못했다. 임금은 무릇 모든 일은 잘 헤아려 시행하되, 규칙을 세워 시작한 후에 다시 논의하고 차차 마련하라고 했다.

 

선조가 우물쭈물한 것은 노비 주인, 즉 사대부들의 반대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대부들은 나라가 어찌되었건, 자신의 사유물이 차출되는 것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양반들은 양인, 노비와 섞여 훈련을 받고 전투를 벌이는 것을 극히 싫어 했다.

노비 충군(充軍)은 지연되었다. 선조 27(1594212)에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되었다.

선조가 이러한 때를 당해 병사를 기르지 말자는 말이 어찌 입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고 한탄했다.

유성룡이 나서 “"다른 일은 돌아보지 말고 병사를 기르고 식량을 비축하는 것을 10여년만 한다면 왜적을 방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에는 공·사천(公私賤)은 병사가 될 수 없었지만 오늘날은 적병이 날뛰니 공·사천도 병사가 되어야 합니다."고 했다.

주상은 "우리 나라는 모든 일이 인정(人情)에 끌리니 사천은 병사가 되기 어려울 듯하다"고 한말 물러섰다.

그러자 유성룡이 주상께서 결심하신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중국의) 낙상지 참장(參將)도 우리나라 공·사천 제도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습니까.“고 다그쳤다. 하지만 선조는 나라의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게 오래 되었다"고 한숨을 지었다.

 

우여곡절 끝에 낙착된 방안은 적의 목을 많이 벨수록 노비를 면해주고 신분을 상승시켜주는 조건부 면천이었다. 조실록 2758일자에 그 내용이 나온다. 지금의 병무청에 해당하는 군공청(軍功廳)이 임금에게 보고했다.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에 대해서는 적의 참수(斬首)1()이면 면천(免賤)시키고, 2급이면 우림위(羽林衛)를 시키고, 3급이면 허통(許通)시키고, 4급이면 수문장(守門將)에 제수하는 것은 이미 규례(規例)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허통되어 직이 제수되었으면 사족(士族)과 다름이 없어야 마땅합니다.“

문제는 왜적의 목을 많이 벤 노비를 양반으로 만들어주는지 여부였다. 군공청은 덧붙였다.

그러나 적을 참수한 수급이 1020급에 이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원칙대로 한다면 천민이라도 문반의 대열에 포함시켜야 하는데, 양반들의 여론이 심상치 않습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런 인물이 실제 있었다. 사노비 출신 장오돌(張吾乭)이다. 선조는 한품서용(限品敍用)하라고 답을 내렸다. 즉 왜적의 목을 많이 베는 천민은 신분과 계급을 올려주되 한계를 두라는 것이었다.

 

문경 조령관문(제3관문 조령관) /문화재청
문경 조령관문(제3관문 조령관) /문화재청

 

천민 출신 가운데 발탁된 인물로 신충원(辛忠元)이 대표적이다. 신충원을 선조에게 천거한 사람은 영의정 유성룡이다. 선조실록 27219일자에 유성룡의 건의 내용이 실려 있다.

오늘날 형세는 조령(鳥嶺)을 굳게 지키는 계책이 가장 긴급합니다. 충주는 서울의 상류에 있는 지역으로 나라의 문호가 되니 충주를 지키지 못하면 한강을 연한 수백 리가 모두 적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지난날 신립의 패전으로 그 사실이 분명해 졌습니다. 지금 수문장(守門將) 신충원이란 자는 바로 충주 사람인데 조령의 형세를 소상히 알고 있습니다. 그를 시험삼아 맡겨볼 만합니다. 신충원을 내려보내 그가 원하는 대로 요충지를 가로막는 계책을 쓰게 해주십시오.“

신충원은 충주 출신의 지극한 천인 출신으로, 수문장의 자리에 오른 만큼 적의 수급을 적어도 4급 이상 베었을 것이다. 신충원은 신립의 군대가 패한 뒤 민병과 승군을 모집해 조령과 단월(丹月) 사이에 매복해 적을 많이 죽였고, 그후 왜군을 여러차례 습격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유성룡은 미천한 출신이지만 신충원이 조령을 요새화하는 방안을 가지고 있는 사실에 주목했다. 조령을 요새화하면 적이 재침해도 수도권을 방어할수 있다는 전략이었다. 유성룡의 천거로 신충원은 조령(새재)의 둔전관이 되어 방어망 구축에 나섰다. 이른바 조령 관방(鳥嶺關防)이다.

신충원은 옛 전우들을 중심으로 조령과 연풍지역에 둔전을 개간해 군량과 양식을 마련했다. 신충원이 있는 곳으로 가면 안전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피란을 떠났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신충원은 그들을 이용하여 둔전을 개간하고 파수꾼을 양성하는 한편 매바위 지역에 성을 축성하기 시작했다. 전란 중에 정부가 하지 못한 일을 천민 출신 신충원이 해낸 것이다. 1594년 신충원이 축성한 조곡관(鳥谷關)은 문경세재 제2의 관문으로 지금의 중성(中城)이다. 그의 노력으로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조령을 넘지 못했고, 충주 이북을 지킬수 있었다.

 

조령 축성이 한창 진행될 때 조정은 신충원을 둔전관에서 조령 파수장으로 승진시켰는데, 그를 시기하는 시람들이 많았다. 신충원은 조정에 파수장 직책을 면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선조가 그 까닭을 물었다. 유성룡이 대답했다.

"신충원의 공은 적지 않습니다. 신충원이 만약 그 곳에 요새를 설치하지 않았다면 조령은 필시 보전될 형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미천한 사람이라 사람들이 모두 얕보기 때문에 비방이 있게 된 것입니다.” (선조실록 2942)

신충원은 유성룡이 파직당한 이후 양반들의 시기와 질투를 끝내 버텨내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후 조령 축성의 가치도 인정되지 않았다. 1601(선조 34) 그는 부정축재 혐의로 뒤집어 썼다. 선조는 신충원에 동정적이었다. 그가 석방되었는지 죄를 받았는지, 그후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으로 계속]

 


<참고한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이덕일, 유성룡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2007,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징비록, 김흥식 옮김, 서해문고,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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