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⑧…도요토미가 다시 쳐들어 온 까닭
임진왜란⑧…도요토미가 다시 쳐들어 온 까닭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12.12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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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유경 국제사기 발각설, 조선 영토 요구설 등…강화협상 깨지며 정유재란 재발

 

임진왜란은 크게 두 번의 전쟁으로 분리된다. 첫 번째가 1592년 임진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6만명의 병력을 한반도에 출병한 전쟁이고, 두번째는 1597814만명의 왜군이 다시 출병해 159812월까지 지속된 정유재란이다. 일본에서는 두 번의 전쟁을 분로쿠(文祿)의 역()’, ‘게이쵸(慶長)의 역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두 번째의 전쟁, 즉 정유재란은 왜 일어났을까. 그 배경에 대해 나라마다, 학자마다 여러 가지 견해를 제기한다. 그중 대표적인 견해 두가지를 정리한다.

 

영광 정유재란 열부순절지, 함평군에 살던 아홉 부인들이 정유재란 때에 왜군를 만나서 의롭게 죽을 것을 결심하고 모두가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한 곳이다. /문화재청
영광 정유재란 열부순절지, 함평군에 살던 아홉 부인들이 정유재란 때에 왜군를 만나서 의롭게 죽을 것을 결심하고 모두가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한 곳이다. /문화재청

 

국제사기 발각설

중국 명나라 장수 심유경(沈惟敬)의 국제사기가 도요토미에게 발각되여 전쟁이 재발되었는 견해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알려진 얘기다. 이 스토리의 전모는 이덕일의 저서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에 잘 정리되어 있다. [참고: 임진왜란④…평화협상이란 국제사기극]

 

1595년 명 황제 신종은 이종성(李宗城)을 정사, 양방형(楊邦亨)을 부사로 삼아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는 사절단을 구성했다. 명의 책봉사절단은 만주 요동을 거쳐 조선에 들어왔다.

책봉사는 일본군의 조선 철수를 독촉했으나, 일본군은 남해안에 구축한 왜성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종성은 자신이 직접 왜군 진영에 들어가 철수를 독촉할 요량이었다.

그해 9월에 부사 양방향이 먼저 부산의 왜군 군영으로 들어갔고, 이종성은 12월에 부산에 도착했다. 일본군은 오히려 이종성을 연금시키고 일본으로 건너가자고 종용했다. 이종성은 일본군이 철군히지 않은 상태에서 도일할 경우 황제의 문책을 두려워했다. 그는 부산에서 도요토미의 요구사항을 알게 되었는데, 도요토미는 국왕 책봉 이외에 할지(割地와 납녀(納女)를 추가로 요구했다. 할지란 조선의 8도중 남쪽 4개도를 분할해 일본에 넘겨주는 것이고, 납녀는 명나라 공주를 도요토미의 후비로 주는 것을 말한다.

이종성은 이대로 일본에 건나갔다가 도요토미에게 붙들려 죽음을 면치못하겠구나, 두려워 하고, 15964월 야음을 틈타 왜군 진영을 탈출해 도주했다.

이종성이 왜영을 타출하자, 명은 부사 양방형을 정사로, 심유경을 부사로 삼아 책봉사절단을 다시 꾸렸다. 심유경은 꾀를 조선에 사절단에 동참할 요구했다. 선조는 왜에 사절단을 보내는 것을 꺼려했으나, 대신들과 논의 끝에 명의 책봉사절단을 수행하는 형태의 배신(陪臣)을 보내기로 했다. 조선의 배신으로는 황신(黃愼)이 지명되었다.

이렇게 해서 양방향, 심유경은 159691일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를 만나 명황제의 칙서를 전달했다. 도요토미는 신종의 칙서를 보고 버럭 화를 냈다. 자신을 일본 국왕으로 봉한다는 내용만 있고, 할지와 납녀의 약속이 빠져 있기 때문이었다. 도요토미는 명 황제의 국왕 책봉을 거부하고 조선에서 보낸 황신에게는 직급이 낮다는 것을 트집 잡아 만나 주지도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 등 일본내 강경파들이 재출병을 요구했다.

선조 29(1596) 99일 황신은 돌아와 일본의 재침략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 조선은 임진년의 일본 침략은 준비하지 못했지만, 정유재란은 예측하고 있었다. 일본의 재침이 예고된 상황에서 선조는 일본의 간계와 국내 반대당파의 모함을 받아들여 이순신을 제거하고 말았다.

예고된 전쟁은 이듬해인 1597827일 일어났다. 일본은 총 14만의 군세를 이끌고 다시 조선을 침공했다.

 

울산 울주군 서생포 왜성 /문화재청
울산 울주군 서생포 왜성 /문화재청

 

도요토미의 조선남부 정복설

나카노 히토시(中野等) 등 일본 역사학계에서 제기되는 학설로 도요토미가 조선 남부를 제압해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정유재란을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일본 고치(高知)대학의 츠노 토모아키(津野倫明)2017년 국내 학술대회에서 주제발표한 정유재란시 일본의 목적과 일본측의 군사행동이란 논문에서 발췌한다.

 

임진왜란 초기와 후기 사이에 조선과 명에 대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식이 달라진다. 초기에 도요토미는 정명가도(征明假道), 명나라를 정벌하러 기는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이는 공상적 플랜이라는 평가가 있으나, 도요토미는 마음 속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던 구상이었다. 침략 한달만에 한성을 함락시컀다는 소식은 도요토미로 하여금 착각을 확신으로 믿게 만들었다.

하지만 명군이 파병되고 평양성 전투에서 패해 부산으로 밀려나면서 도요토미의 인식에 변화가 생겼다. 정유재란 무렵에 도요토미는 전쟁의 의미를 정명(征明)에서 조선침략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정유재란 직전인 15972월에 도요토미는 전라도를 제압하고 충청도 등지에 가능한 번위에서 침공하라고 군령을 장수들에게 명령했다. 경상도는 이미 장악하고 잇으므로, 전라도와 충청도를 차지해 조선 남부를 정복하자는 것이다. 침략한 상대국을 타도하지 못했지만 그 일부라도 정복하는 것으로 전쟁 목표를 바꾸었다다는 것이다.

1595년 명의 책봉사 파탄의 원인도 이런 견해에서 해석된다.

앞서 도요토미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통해 조선의 왕자를 보낼 것, 조선 남부 4도를 할지할 것, 명 황제의 공주를 자신의 후처로 줄 것, 일본과 무역을 부활할 것 등을 요구했다. 159691일 명의 사절 양방형·심유경이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를 대면하고 책봉을 실현했다. 하지만 명의 사절은 책봉 이외에 아무 것도 들고 오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조선 4도를 떼준다는 내용에는 설명이 없었다. 오히려 조선 남부에 구축한 일본의 왜성(倭城)을 파괴하고 왜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 대목에서 도요토미가 격노했다는 것이다.

도요토미는 명과 화의에 응한 이상 해외영토, 즉 조선 남부의 할양을 원했으나, 명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또 조선 왕자가 일본에 오지 않은 것도 화의 결렬의 주요 원인이다. 황신이란 낮은 급의 신료를 보낸 것은 도요토미에게 자신의 요구사항을 거부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위의 두가지 견해는 서로 상충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두 견해가 복합되어 전쟁이 다시 격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심유경 등의 사기가 통하지 않았고, 도요토미가 한반도 남부를 원했을 것이다.

1593년부터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평화협상이 4년여 진행되었다. 협상 과정에서 조선은 늘 수동적이었다. 조선은 일본군의 완전 철수할 것을 비타협적으로 요구했고, 명나라는 일본 관백에게 국왕책봉을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을 믿었다. 도요토미는 비록 욕심의 수위를 낮추었지만 조선의 영토의 절반을 원했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고, 1597년 도요토미는 다시 한반도를 침략한 것이다.

정유재란에서 일본 수군은 이순신 장군이 없는 틈을 이용해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고,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일본군은 남원과 전주에서 조명연합군을 대파하고 전라도를 점령했으며,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해 명군과 대치했다. 정유재란에 일본군은 전공을 증명하고자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 전리품으로 일본에 보냈고, 조선인들을 노예상에게 매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원균의 패배로 이순신 장군이 조선수군의 지휘권을 다시 장악했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시킴으로써 일본 수군의 진로를 차단하고 일본 육군의 보급선을 끊으면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참고한 자료>

이덕일,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2007,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츠노 토모아키(津野倫明), 정유재란시 일본의 목적과 일본측의 군사행동,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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