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⑨…명량해전, 그날의 기록
임진왜란⑨…명량해전, 그날의 기록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12.13 19:26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살려고 마음 먹지 마라”며 사투 결의…명랑대첩 이후 제해권 장악, 전세 역전

 

1597914일 해남과 진도 사이 울돌목(鳴梁)에서 벌어진 명량대첩은 정유재란의 방향을 바꾼 해전이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했고, 조명연합군은 일본 육군의 북상을 저지했다.

명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했다는 점, 13척의 전함으로 133척의 적선을 무찔렀다는 점 등의 드라마틱한 소재를 제공했기 때문에 영화, 드라마, 소설, 다큐멘터리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그날의 기록을 다시 짚어 보기로 한다.

명량해전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은 전투를 이끈 이순신 본인의 난중일기. 유성룡도 징비록에 이 전투를 기록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엔 간략하게 다루었을 뿐이다.

 

울돌목 /사진=이효웅
울돌목 /사진=이효웅

 

<이순신의 난중일기>

914(임인)

맑았다. 임준영이 육지를 정탐하고 달려와서 적선 200여척 가운데 55척이 이미 어란포 앞바다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또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쳐온 김종걸의 말도 전했다. “이달초 6일에 달마산으로 피난 갔다가 왜적에 붙들려갔는데, 이름을 알수 없는 김해 사람이 왜장에게 빌어서 결박을 풀고 지냈다. 김해 사람이 밤중에 귀에다 대고 전하기를, ”조선 수군 10여척이 우리() 배를 쏘아 죽이고 배를 불태웠으니 보복하지 않을수 없다. 여러 배들을 불러모아 조선 수군을 모두 죽여야 한다. 그런 뒤에 곧장 서울 한강으로 올라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다 믿을수 없지만 또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우수영에 전령선을 보내 피란민들을 타일러 곧 육지로 올라가게 했다.

 

915(계묘)

맑았다. 수가 적은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수 없었으므로,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그리고는 여러 장수들을 모아 약속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도 두렵게 할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은 살려고 마음 먹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마땅히 군율대로 시행하겠다.”

두 번 세 번 엄격히 약속했다. 이날 밤에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고 말해 주었다.

 

현자총통 /문화재청
현자총통 /문화재청

 

916(갑진)

맑았다. 이른 아침에 별망(別望, 초병)이 달려와 수를 알수 없는 적선이 곧장 우리 배를 향해서 온다고 보고했다. 곧 여려 배들에게 명령해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게 하자, 적선 330척이 우리 배들을 에웠쌌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생각하고 회피해 살아날 궁리만 했다. 우수사 김억추는 이득히 먼 곳으로 물러나 있었다. 나는 노를 저으라고 독촉하며 앞으로 돌진해 지자(地字) 현자(玄字) 등 여러 가지 총통을 마구 쏘게 했다. 탄환이 폭풍우같이 쏟아졌다. 군관들이 배 위에 빽빽이 늘어서서 빗발처럼 화살을 쏘아대자, 적의 무리가 감히 떠들지 못하고 다가왔다 물러났다 했다.

그러나 (적에게) 여러 겹으로 에워싸여 있어 전체가 어찌 될지는 알수 없으므로,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질린 얼굴로 돌아봤다. 그래서 내가 조용히 타일렀다. “적선이 비록 1,000척이라 해도, 우리 배를 대적하지는 못한다.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않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

그리고 나서 여려 장수들의 배들을 돌아보니, 먼바다에 물러나 관망하면서 나아가지는 않았다. 배를 돌려 곧바로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그의 목을 베어 높이 내걸고 싶었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선이 더 가까이 달려들게 되어 사세가 낭패를 볼 것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명령을 내리는 기를 세우게 하고, 또 초요기(招搖旗)를 세웠다. 그랬더니 중군장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에게 말했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살려고 달아나도, 어디를 가겠단 말이냐.” 그러자 안위가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말했다. “너는 중군이 되었으면서도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려 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벗어나겠느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형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그래서 두 배가 적진을 향해 곧바로 들어가자, 적장이 그 휘하의 배 3척에 지시해 (왜선이) 안위의 배에 개미 붙듯 달려들어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했다. 안위와 그 배에 탄 군사들이 죽을 힘을 다해 마구 쳤다. (안위의 군사들의) 힘이 거의 다하자 내가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들어가 빗발치듯 쏘아댔다.

적선 3척이 남김없이 소탕되자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 와서 힘을 합해 적을 쏘았다. 항왜(降倭, 항복한 일본 병사) 준사(俊沙)는 안골포 작전에서 항복한 자인데, 내 배에 위에 타고 있다가 (바다에 떠 있는 적들을) 내려보더니 안골포에 있던 적장 마다시(馬多時)라고 가르쳐 주었다. 내가 김석손을 시켜 갈고리로 (마다시를) 갈고리로 뱃머리에 낚아 올리자 준사가 신이 나서 날뛰었다. “맞다. 마다시다.”고 말했다. 그래서 명령을 내려 토막을 내 (게시하니) 적진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여러 배들이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했다. 지자포와 현자포를 쏘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대니, 그 소리가 산천을 흔들었다. 적선 30척이 깨어지자 적선들은 달어났다.

그들은 다시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했다. 이는 참으로 천행이었다. 물결이 몹시 험하고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해 당사도로 진을 옮겼다.

 

전남 진도군 고군면 정유재란 순절묘역 /문화재청
전남 진도군 고군면 정유재란 순절묘역 /문화재청

 

<징비록>

이순신이 진도에 도착해 보니 남아 있는 배가 10여척에 불과했다. 한편 배를 타고 피란길에 나섰던 부근 해안가의 백성들은 이순신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들 기뻐 어쩔줄을 몰라했다. 이순신은 여러 방법으로 사람들을 모았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는데, 이순신은 이들을 군의 배후로 배치해 병사들을 지원하도록 했다.

적장 마다시(馬多時)는 수전에 뛰어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가 200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서해로 가려다 진도 벽파정 아래서 이순신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12척의 배에 대포를 실은 이순신은 조류의 흐름을 이용하기로 했다. 물의 흐름을 이용해 공격에 나서자 그 많은 적도 당하질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러게 되자 이순신 부대의 명성은 날로 높아 갔다.

 

전남 해남군 문내면 명량대첩비 /문화재청
전남 해남군 문내면 명량대첩비 /문화재청

 

<선조실록>

선조실록에서 중국인들이 이순신의 명량대첩을 크게 칭찬한 반면에 선조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선조는 한때 왕명을 거역한 이순신의 승전보를 깎아 내리고, 모든 승전을 명군의 공으로 돌렸다..

 

1597(선조 30) 1011

진동지(陳同知, 명나라 장수, 이름은 진등(陳登)이고 하간(河間) 사람으로 군량을 주관했다)

"도야(都爺)에게 들으니 이순신이 왜적을 많이 포획했다 하니 매우 좋은 일입니다"고 했다.

이에 선조가 이르기를 그가 (중국) 황제의 위령에 힘입어 조금 포획하기는 하였으나, 한산도에서 패한 후로 선척과 기계 및 사졸과 양식을 모으지 못했었는데, 대강 모양을 이루게 된 것은 황제의 은혜가 아님이 없으니, 매우 감사함을 금할 수 없소이다"라고 말했다.

1597(선조 30) 1020

선조가 명나라의 양경리(楊經理, 양호(楊鎬)를 말함)에게 흉적이 물러가고 종묘 사직이 다시 돌아왔으니 이는 참으로 대인의 공덕이라 감사함을 무엇으로 말하겠습니까. 절을 하여 사례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양호가 이게 무슨 말씀이오. 제가 무슨 공이 있습니까. 이러한 예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하고 사양했다.

주상이 굳이 청해도 따르지 않았다. 주상이 말하기를,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인이 은단(銀段)으로 상주고 표창하여 가상히 여기시니 과인은 마음이 불안합니다."고 말했다.

양경리는 이순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다 흩어진 뒤에 전선(戰船)을 수습하여 패배한 후에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그 때문에 약간의 은단을 베풀어서 나의 기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명나라 장수 양호는 명량대첩에서 승리한 공로로 이순신에게 상을 내렸다. 그에 비해 선조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 승전을 폄하하고 중국군이 도와줘서 적을 막았다며 명나라 장수에게 절까지 하려 했다. 왕의 체통이 말이 아니었다.)

 


<참고한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 2008, 중앙북스, 옮긴이 하경진

징비록, 김흥식 옮김, 서해문고, 2003

이덕일,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2007,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노순용 2023-03-18 18:45:34
고맙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검색 결과 명량대첩 일자는 9월19월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추가 확인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