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째 참빗장 보유자 고행주씨, 무형문화재로
4대째 참빗장 보유자 고행주씨, 무형문화재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04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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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간 참빗장 기술 전승…아들까지 5대가 대를 이어 담양에서 가업

 

고행주씨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5호 참빗장보유자로, 1945년에 입문해 지금까지 74년간 전라남도 담양에서 참빗장의 기술을 전승하고 있는 장인이다. 고행주 씨의 집안은 그의 증조부인 고() 고찬여 옹이 생계를 위해 참빗을 제작한 이래, 현재 아들까지 5대가 대를 이어 담양에서 가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동안 고행주 씨는 전라남도와 담양군에서 시행하는 각종 시연행사에 참석하고, 전국공예품 경진대회 등 다수의 대회에서 수차례 입상했다.

문화재청은 사라져가는 참빗 제작 기술을 보전하기 위해 참빗장을 국가무형문화재 신규종목으로 지정 예고하고, 이 기술을 보유한 장인 고행주(高行柱, 1935년생) 씨를 보유자로 인정 예고했다.

특히, 고행주씨는 이번 보유자 인정조사 과정에서는 참빗 제작의 숙련도가 매우 뛰어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 결과, 고행주 씨가 전승능력, 전승환경, 전수활동 기여도 등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아 국가무형문화재 참빗장 보유자로 인정 예고되었다.

 

참빗장 보유자 고행주씨가 참빗을 만들기 위해 대나무를 다듬는 모습. /문화재청
참빗장 보유자 고행주씨가 참빗을 만들기 위해 대나무를 다듬는 모습. /문화재청

 

참빗은 빗살이 가늘고 촘촘한 머리빗이다. 옛 여인들이 고운 머릿결을 다듬을 때 이 빗을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 빗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통일신라 기록에서 처음 나타난다. 또 청주 미평동·성화동 삼국 시대 유적에서 참빗이 출토되어 삼국 시대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빗장은 고려 시대에 어용(御用) 장식품을 제작하던 중앙관청 중상서(中尙署)에 빗을 만드는 소장(梳匠)이 소속되어 활동했다. 태안 앞바다에서 출수(出水)된 고려 시대 선박 마도 1호선과 마도 3호선에서도 참빗이 나와 당시 왕실과 귀족층을 비롯하여 참빗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빗을 만드는 장인들이 세분화되어, 참빗 명칭이 기록으로 등장한다. 조선 초기 <세종실록>오례(五禮)’에서 참빗을 가리키는 죽소(竹梳)’라는 명칭을 확인할 수 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경공장(京工匠)에 대나무로 빗을 만드는 죽소장(竹梳匠)’을 별도로 두어 참빗을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1477<성종실록>에는 중국에 참빗(竹梳) 1,000개를 하례품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 참빗이 우리나라의 특산품이었음을 보여준다.

<경국대전>에서는 빗을 만드는 기술에 따라 얼레빗을 만드는 목소장(木梳匠), 대나무로 빗을 만드는 죽소장(竹梳匠), 빗의 때를 제거하기 위하여 멧돼지 털로 빗솔을 만드는 소성장(梳省匠) 등으로 구분했다.

현재 대표적인 유물로는 조선 23대 임금 순조(純祖)의 셋째 공주인 덕온공주(1822~1844)7세의 나이에 공주로 책봉되던 때에 사용했던 덕온공주 유물(국가민속문화재 제212)’에 참빗이 포함되어 있다.

 

문양 없이 제작된 참빗 /문화재청
문양 없이 제작된 참빗 /문화재청

 

참빗은 빗살의 사이가 촘촘하여 일반적으로 옛날 사람들이 머리를 단장하고 때를 빼거나 이를 잡아내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참빗은 대나무를 가늘게 자르기, 빗살을 실로 매기, 염색하기, 접착과 건조, 다듬기 등 약 40여 가지 공정을 거쳐 완성된다. 기본적으로 대나무를 다양한 크기로 자르고 손질해야 하며, 빗살의 간격을 촘촘하고 고르게 유지시키는 세밀한 작업이 핵심적인 공정이라 숙련된 손놀림이 중요하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참빗장과 그 보유자 고행주 씨에 대해 30일 이상의 예고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무형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지정과 보유자 인정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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