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카④…싱가포르에 밀려 쇠퇴하다
말라카④…싱가포르에 밀려 쇠퇴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12.19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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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플스, 싱가포르 건설…말라카, 1924년 협상 통해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이양

 

포르투갈은 숥탄국에게서,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에게서 말라카를 빼앗았다. 두 나라는 무력을 동원했다. 하지만 영국은 네덜란드의 말라카를 뺏지 않았다. 영국은 말레이 반도 남쪽 끝에 싱가포르 항구를 새로 건설하면서 협상을 통해 말라카를 인수했다. 평화적으로 진행되었지만, 배후에 영국의 제해권 장악과 막강한 해군력이 뒷받침되었음은 물론이다.

 

1860~1900의 말라카 /위키피디아
1860~1900의 말라카 /위키피디아

 

17951월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네덜란드를 침공하자 네덜란드 국왕은 영국으로 피신했다. 나라를 잃은 네덜란드 왕은 네덜란드의 해외식민지에 대한 관할권을 영국에 위임했다.

인도에 본부를 둔 영국 동인도회사는 본국의 지시를 받고 네덜란드 식민지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접수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했다. 9,500명의 영국 원정대를 지휘한 사람은 동인도회사 소속 스탬퍼드 래플스(Thomas Stamford B. Raffles, 1781~1826)였다.

래플스는 타고난 뱃사람이었다. 그는 1781년 카리브해 영국식민지 자메이카의 해안을 항해하던 선박 앤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선주였다. 래플스는 어려서 가난했지만 지리학, 지질학, 역사학에 관심이 많았고, 런던 동인도회사의 사환으로 근무하다가 1805년 말레이시아 페낭 식민지의 부서기관으로 인사발령이 났다. 그는 페낭에서 말레이어를 배웠다. 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어는 비슷하고 서로 방언 수준이다.

동인도회사는 자바섬을 지배하기 위해 현지어를 아는 사람이 필요했고, 말레이어에 능통한 래플스가 적격이었다.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래플스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총독대리(1811~1816)가 되었던 것이다. 이 기간에 네덜란드령 말라카도 영국이 관리했고, 래플스의 관할 하에 있었다.

래플스는 공부는 많이 하지 않았지만 독학으로 역사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바타비아 총독 시절에 자바섬의 역사자료를 모으고, 밀림 속에 방치되어 있던 보로부두르(Borobudur) 불교사원을 찾아내 전설로 전해지던 세계문화유산을 발굴하기도 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네덜란드 왕실이 자바섬을 돌려달라고 했다. 영국은 우방인 네덜란드에 점유지를 돌려줄 생각이었다. 이에 래플스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는 인도와 중국 사이의 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말라카와 자바섬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네덜란드에 돌려지지 말자고 주장했다. 영국은 그를 해임하고 런던으로 소환했다.

본국으로 돌아간 래플스는 자바섬에 근무하던 중에 습득한 지식으로 자바의 역사’(The History of Java)를 출간해 공전의 히트를 치고, 덕분에 기사작위도 받았다. 동인도회사는 그에게 요직을 부여히지 않고, 허접한 곳으로 보냈는데, 그곳은 수마트라섬 남서쪽의 식민지 벵쿨렌(Bencoolen)에 파견했다.

 

스탬퍼드 래플스 /위키피디아
스탬퍼드 래플스 /위키피디아

 

말라카와 자바섬을 되찾은 네덜란드는 중국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바타비아를 거점으로 육성하고, 영국을 비롯해 외국 선박의 남지나해 접근을 방해했다. 네덜란드는 말라카에 접안한 배에 높은 세금을 물렸다. 래플스가 우려했던 바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벵쿨렌으로 돌아온 래플스는 말라카 해협을 순찰하면서 현지 지형을 연구했다. 그는 해협에 말라카를 대처할 새로운 무역항을 건설할 것을 동인도회사에 건의했다. 말라카는 네덜란드가 독점을 지키려 하는 바람에 폐쇄적이었다. 새로운 항구는 세계 모든 선박에 개방하고 입항료를 낮춰 자유항으로 개방한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새로 인도 총독으로 부임한 해스팅스(Francis E. Rawdon-Hastings) 경은 래플스의 건의를 완전하게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추진해보라고 했다.

래플스는 페낭, 리아우 열도, 조호르강 유역, 싱가포르섬 등을 개발지로 고려했다. 페낭은 해협에서 너무 북쪽이었고, 리아우 열도는 네덜란드가 이미 손을 써두었고, 조호르강은 적합하지 않았다. 1819129일 래플스 원정대는 싱가포르섬에 상륙했다.

싱가포르섬은 말레이반도 남단으로 누가 보아도 인도와 중국 사이 바딧길의 요충지였다. 인도네시아 마자파힛 왕조 시대의 서사시에도 테마섹으로 등장하는 곳이고, 중국 원나라 시기에 '단마석‘(單馬錫)이라는 기록도 테마섹을 의미했다. 말라카의 건국자 파라메스와라가 수마트라에서 쫓기며 한때 정착한 곳이 싱가포르섬이었고, 그는 그곳을 싱가푸라라고 했다. 래플스가 도착할 당시 싱가포르는 해적질을 하던 오랑라웃의 근거지였다.

래플스는 싱가포르가 항구 후보지로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항구 건설에 매진했다. 당시 싱가포르 섬은 조호르 술탄국의 영토였고, 테멘공( (Temenggong)이란 지방영주가 섬을 지배하고 있었다. 래플스는 테멘공에게 생활비와 보상금을 지불하며 항만건설 개발권을 얻어냈다.

섬에 대한 보다 확고한 지배권을 얻기 위해 래플스는 조호르 왕실의 분쟁을 활용했다. 당시 조호르의 술탄은 무하무드(Muhamud)였다. 그의 형 후세인(Hussain)이 권력에 밀려 불만을 품고 있었다. 래플스는 후세인을 싱가포르로 모셔와 궁정을 지어주며 연금도 주었다.

 

1922년 영국령 말레이시아 /위키피디아
1922년 영국령 말레이시아 /위키피디아

 

자바섬에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사람들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네덜란드는 조호르가 네덜란드의 보호를 받는 술탄국이므로 조호르와 영국의 협상은 무효라고 주장횄고, 영국은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1820년 런던에서 협상을 갖고 이 문제를 논의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국의 대표 조지 캐닝은 싱가포르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어떤 과정에서 개발되었는지에 별 관심이 없었다. 네덜란드도 바타비아의 주장에 시큰둥했다. 협상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시간만 끌었다.

3년쯤 지나면서 래플스의 혜안이 가시화되었다. 인도와 중국을 오가는 선박과 화물이 말라카에 들르지 않고 싱가포르를 거쳐 갔다. 영국은 자국 항구가 있으므로 말라카엔 관심이 없었다.

네덜란드는 현실을 인식했다. 영국과 전쟁을 해보아야 이길 승산이 없고, 협상을 통해 실리를 얻는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1824년 영국과 네덜란드는 말라카 해협 북쪽을 영국이 관할하고, 남쪽엔 네덜란드의 지배권을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해서 말레이반도에 있던 싱가포르와 말라카의 관할권는 영국으로 넘어갔고, 수마트라에 있던 영국령 벵쿨렌은 네덜란드로 넘어갔다. 그해 317일 서명한 영국-네덜란드 조약(Anglo-Dutch Treaty of 1824)은 싱가포르의 영유권을 확인한 조약이었으며, 오늘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영토가 만들어지는 단초가 되었다.

 

싱가포르 /위키피디아
싱가포르 /위키피디아

 

그후 말라카는 영국령 해협식민지가 되었으나 싱가포르가 활성화되면서 급격히 쇠퇴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잠시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았으나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영국 식민지로 복귀했다. 말레이지아 독립하면서 말레이시아의 1개주로 편재되었다.

말라카는 현재 역사도시로 남아 있다. 500년 이상의 고도로서 술탄,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지배를 거치면서 다양한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 200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참고한 자료>

Wikipedia, Malacca

Wikipedia, Stamford Raffles

Wikipedia, Founding of modern Singapore

Wikipedia, Anglo-Dutch Treaty of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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