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 실세 도르곤에 시집간 의순공주의 비애
淸 실세 도르곤에 시집간 의순공주의 비애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04 16: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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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에서 외면당하고 조선에서 버림받으며 비운의 삶 살았던 여인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주택가 야산에 볼품 없는 무덤이 하나 있다. 그 무덤은 족두리묘라고도 하는데, 중국 청()나라의 권력실세 도르곤에 시집간 의순공주의 무덤이다.

의정부시는 그곳에 묻혀 있는 의순공주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매년 의순공주대제행사를 열고 있다.

그러면 의순공주(義順公主, 1635-1662)는 누구인가. 그녀의 인생엔 병자호란이라는 전쟁, 조공국 조선의 비극, 권력 싸움의 비애, 한 많은 조선여인의 삶이 녹아 있다. 슬프고 애닯은 스토리다.

그녀는 진짜 공주는 아니었다. 조선 9대 성종의 4대손 이개윤(李愷胤)74녀중 한명이었다. 이개윤은 성종의 서자 익양군(益陽君) 이회(李懷)3세손으로, 첫번째 부인을 잃은후 두변째 부인 유()씨를 두었다. 둘째 부인에게서 딸을 낳았는데, 그의 이름이 애숙(愛淑)이고, 나중에 의순공주가 된다. 이애숙은 정실부인의 소생이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서열이 한참 뒤쳐진 왕족이었고, 선대가 서자 출신이어서 그저 그런 조선의 여인으로 지낼 운명이었다.

 

의정부시의 의순공주대제 /의정부시청 블로그
의정부시의 의순공주대제 /의정부시청 블로그

 

그의 운명은 당시 국제정세에 의해 뒤바뀌었다. 1659년 상국인 청()나라의 실권자 도르곤(多爾袞)이 조선의 공주를 요구했다. 당시 청나라 왕족들은 속국인 조선과 몽골의 여인을 부인으로 두려 했다. 국혼을 통해 속국에 자파를 형성해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의 효종 임금은 고민에 빠졌다. 도르곤의 명령을 거역할수 없었다. 효종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도르곤의 위상을 알고 있었다.

도르곤은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으로, 여섯 살에 황제가 된 순치제를 대신해 사실상 청나라를 지배했다. 그는 청 태종(홍타이지) 시절에 몽골 정벌시 대원(大元)의 옥새를 확보해 청을 황제국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홍타이지 사후에 조카(순치제)를 황제에 올려 섭정을 맡았다. 이어 명나라 장수 오삼계(吳三桂)의 투항을 받아 내, 그를 앞세워 베이징(北京)을 점령하고 반란군 수괴 이자성을 토벌하고 베이징을 청나라 수도로 삼았다. 그의 위세는 황제를 능가했다.

효종은 자신의 딸이나 먼저 세상을 뜬 형님 소현세자의 딸을 보내기도 싫었다. 효종은 자신의 공주가 두 살에 불과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소현세자의 공주들도 모두 숨겼다. 그리고 왕실 족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딸들을 찾았다.

그때 금림군(錦林君) 이개윤이 자진해서 혼기에 찬 딸이 있다고 효종에게 밝혔다. 효종은 이개윤의 딸 애숙을 양녀로 삼아 공주 작위를 내리고 청나라로 보냈다. 그때 내린 작위가 의순(義順)으로, ‘대의(大義)의 순종(順從)한다는 의미였다. 이때 나이 16세였다.

16594월 효종은 서대문밖 모화관까지 나가 의순공주의 청나라행을 송별했고, 백관들은 홍제원까지 수행했다. 고려 시대 공녀로 갔다가 원()나라황제의 부인이 된 기황후의 경우도 있었기에 조선 조정으로선 최선을 다해 배웅했다. 오빠 두명, 역관, 시녀, 의녀 등이 그녀를 따라 청으로 들어갔다. 효종은 의순공주의 두 오빠에게 각각 장릉 참봉과 전설사별검이라는 벼슬을 내리며 예우했다.

 

도르곤 초상화 /위키피디아
도르곤 초상화 /위키피디아

 

한달후 공주가 청나라에 도착하자 도르곤은 산해관 근처까지 마중 나와 바로 혼인했다. 도르곤은 의순공주를 마음에 들어 했고, 공주도 도르곤을 흠모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에겐 행운의 여신이 찾아오지 않았다.

의순공주가 도르곤의 비()가 된지 7개월후인 16591231일 도르곤은 만리장성 근처 카라호툰에서 사냥을 하다가 사고로 죽었다. 향년 39세의 젊은 나이였다.

도르곤의 죽음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사고사였다. 하지만 그가 섭정을 하면서 순치제의 어머니이자 선황(홍타이지)의 부인, 즉 형수인 효장문황태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맞는 만주족 고유의 형사취수(兄死娶嫂) 제도를 따른 행위였지만, 유교적 관점에서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유교에 심취한 순치제로서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도르곤은 딸만 있고 아들이 없었는데, 조선에서 새 부인을 얻게 되자 17세의 순치제로서도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도르곤이 죽고 그의 집에서 황제가 입는 황포(皇袍)가 발견되었다. 친정에 나선 순치제는 황제가 되려는 야심이 있었다는 이유로 그를 역적으로 몰아 부관참시의 형벌을 내렸다.

남편이 죽자 의순공주의 운명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도르곤의 부하 보로(博洛)의 첩실이 되었다. 도르곤에게 대역죄가 내려지자 도르곤의 여인들이 노비로 분배된 것이다. 하지만 새 남편 보로도 1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다시 홀로 된 의순공주는 청나라에 남아 험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던 중 16564월 그의 아버지 이개윤이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베이징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딸을 조선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청 조정에 요청해 의순공주를 귀국시켰다. 나라를 떠난지 7년만에 아버지 손에 이끌려 돌아온 것이다.

 

효종은 그녀에게 매달 쌀을 내리는 등 나름 신경을 썼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조선 사대부들의 견해는 나빴다. 오랑캐에게 시집을 갔고 남편의 사후에 수절치 않고 이내 재가까지 했다는 것이다. 국가간의 주종관계, 청나라 내의 권력싸움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사실은 조금도 거론되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곧바로 아버지 이개윤을 탄핵해 파직시키고, 삭탈관작해 성 밖으로 쫓아 냈다. 또 귀국한 의순공주의 칭호를 이개윤의 딸()로 격하했다. 오히려 청나라에서 받았던 예우보다 처지가 나빠진 것이다.

이덕무가 쓴 <청장관전서>에는 의순공주가 귀국후에도 도르곤을 그리워하다가 무당을 불러 귀신이라도 만나기를 고대했다는 기록이 있다. 도르곤과의 짧은 부부관계가 나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녀는 오랭캐와 혼인한 환향녀(還鄕女)로 손가질 받다 귀국후 5년만인 28살에 한 많은 인상을 마쳤다.

하지만 민가에서는 그에 대한 좋은 평가가 남아 전설로 바뀌어 전해지고 있다. 그녀가 청나라에 시집가면서 오랑캐에 몸을 더럽힐수 없다며 평안도 정주에서 가파른 벼랑 아래 물속에 몸을 던져 자살했으며, 시체가 떠오르지 않아 그녀가 쓰고 있던 족두리만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의정부에 있는 의순공주 묘를 족두리 묘라고 불리운다.

 

도르곤에게는 또다른 조선 부인이 있었는데, 그도 조선왕족의 딸 이()씨였다고 한다. 이씨의 아버지는 이세서(李世緖)라고 하는데, 부친에 관한 기록이 없다. 아마 병자호란(1636) 때 끌려갔을 가능성이 크다.

도르곤은 1638년 이씨와의 사이에 딸 동아(東莪)를 낳았다. 도르곤의 유일한 혈육인 동아는 아버지가 죽은후 13살에 순치제의 명에 의해 신군왕 다니(多尼)에게 의탁하게 되었다. 다니는 도르곤의 동복형제인 도도의 아들로, 동아에게는 사촌 오빠가 된다. 그후 동아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의정부시에 있는 의순공주 묘 /의정부시청 블로그
의정부시에 있는 의순공주 묘 /의정부시청 블로그

 

의순공주의 이름은 족보에서 지워졌고 아무도 그녀를 위해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딸의 죽음을 슬퍼한 어머니는 날마다 현재 의정부시 천보산 꼭대기에 올라 평안도 정주 땅을 내려다보며 넋을 달랬다. 주민들은 그곳을 정주당, 산봉우리는 공주봉이라 불렀다.

공주가 죽고 그 고장에 전염병이 돌고 흉년이 들었다. 무덤이 있는 금오리에도 횡액이 자주 발생했다. 억울하게 죽은 의순공주의 넋을 달래주지 않아 일어나는 재앙이라는 말이 돌았다.

마을 사람들은 정주당 터에 올라가 제를 지냈다. 마을에 풍년이 들고 재해가 없어져 해마다 3월 초순 좋은 날을 택하여 제를 지냈다. 제가 끝나면 마을사람 모두가 국수와 음식을 나눠먹고 온종일 신명나게 즐기던 풍습이 전해 내려오는데 이것이 의정부 정주당 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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