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브리스트의 슬기로운 유배 생활
데카브리스트의 슬기로운 유배 생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12.22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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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년 첫 시베리아 유배…현지에 학교, 병원 짓고, 이르쿠츠크 발전에 기여

 

시베리아는 겨울철엔 얼어붙고, 여름엔 늪지로 변해 사람이 움직이기 어려운 곳이다. 16~17세기에 시베리아의 대부분이 개척되었지만, 유럽 지역 러시아인들이 이주하길 꺼려했다.

초기 이주자는 모피 사냥꾼들이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에 살던 코사크들은 총을 앞세워 시베리아 원주민들에게 모피를 약탈했다. 조금 후엔 지주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노들이 자유를 찾아 시베리아로 탈출했다. 러시아 정교에 의해 탄압을 받던 구신앙자들(Old Believers)들도 시베리아로 건너갔다. 초기 시베리아 이주자들의 공통점은 제국의 밑바닥에 위치하거나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귀족들은 동토로 가려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사교와 문화생활이 없는 그곳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기 싫어 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피했던 시베리아에 본격적으로 인구 이동이 시작된 계기는 유배 또는 추방이라는 강제 수단이었다. 차르의 입장에 보면 정치범들을 시베리아에 보내면 도주의 우려가 없고 유럽 본토의 정치적 오염을 제거할수 있어 일거양득이었다.

 

데카브리스트 반란 /위키피디아
데카브리스트 반란 /위키피디아

 

그 첫 번째 케이스가 18251226(구력 1214)의 데카브리스트 반란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 파리 진군에 가담했던 장교들이 자유주의, 공화주의의 물에 들어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이 12월에 일어났기 때문에 주모자들은 데카브리스트(Dekabrist)라 했고, 그 미완의 혁명을 '데카브리스트 봉기'(revolt)라고 부른다.

사건의 주모자들은 귀족들이었다. 600명의 장교들은 체포되었고, 이중 120명은 모든 재산과 권리를 박탈당한 채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그들은 영하 40도의 강추위에 폭풍한설이 몰아치는 길을 발목에 쇠사슬이 감긴 채 1년을 걸어서 가야 했다. 도중에 상당수가 죽고 일부만 살아서 옴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이들은 강제 노동을 하다가 일부는 굶주림과 추위에 사망했으며, 1856년 알렉산드르 2세의 특사로 해방되었을 때 절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45명은 귀환했지만, 나머지는 시베리아에 남았다.

 

이르쿠츠크의 앙가라 강 건너기 /위키피디아
이르쿠츠크의 앙가라 강 건너기 /위키피디아

 

데카브리스트 반란자들은 시베리아 유배의 시초였고, 그들로부터 시베리아에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전의 모피꾼, 종교적 이탈자는 사회적 하층계급이었으나, 정치범들은 상류층이었다. 기결수로 온 그들은 20~30년 또는 무기수로 살면서 시베리아에 학교를 세웠고, 학술모임을 가졌고, 자유주의의 씨앗을 뿌렸다. 죄수 도시로 출발한 이르쿠츠크는 동부 시베리아의 중심도시로 발전했다.

데카브리스트 기결수 가운데 왕자급 왕족도 있었다. 니콜라이 1세는 그들이 유배지에서 뭉치지 못하도록 따로 떨어져 살도록 했다. 시베리아는 광활하기 때문에 감시가 소홀할 수밖에 없고, 죄수들은 상당히 자유로운 생활을 할수 있었다. 데카브리스트들은 아내도 데려와 함께 살거나, 현지에서 결혼해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노동형이 부과되었지만 완전한 감시가 불가능해 형식에 그쳤고, 그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사적 공간을 확보할수 있었다.

데카브리스트의 아내였던 폴리나 아넨코바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시베리아로 오는 도중에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이 친절했고 따스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풍요로웠고, 부유했다. 다만 모든 것이 너무나 광활했다. 그들은 우리를 환대했고, 친구처럼 대했다. 가는 곳마다 많은 음식이 나왔다. 내가 이런 대접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를 물었더니, 그들은 그러지 말라고 했다. 다만 하느님을 위해 촛불을 켜줄수 있느냐고 했다. …… 시베리아는 굉장히 부유한 시골이다. 수확이 풍부했고, 추수에 큰 노동이 들어기지 않았다.”

페테르스부르크의 지배자들은 불온한 사상의 소유자들을 얼음 구덩이에 몰아 넣어 지치도록 일을 시키고 외롭게 할 요량이었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아주 쉽게 적응했다. 물론 지방관리에 따라 감시가 심한 곳도 있었다. 친척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도 막았고, 외부인들과의 접촉이 금지되기도 했다. 일부는 질병으로 죽고, 일부는 정신적 충격으로 고통을 겪었지만, 하지만 작은 틈새가 생겼고, 죄수들은 서서히 유배에 적응하면서 현지생활에서 새로운 보람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지방 경찰들을 까탈스러웠다. 모자를 벗어 인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에 비해 주민들은 정치범들을 환영했다. 유형자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개선해 나가면서 주민들과의 접촉 기회를 늘렸다.

 

시베리아 치타의 데카브리스트 거주지 /위키피디아
시베리아 치타의 데카브리스트 거주지 /위키피디아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의 순애보도 유명하다. 그들은 남편이 유배를 가자 이혼하거나 다시 시집가서 귀족 작위를 유지하든지 빈 몸으로 시베리아로 따라 가든지를 택해야 했다. 일부는 남편을 따라갔다.

데카브리스트의 지도자급이었던 세르게이 볼콘스키(Sergei Volkonsky)는 이르쿠츠트로 유배되었다. 그의 아내 마리아은 남편을 따라 갔다. 세르게이는 그곳에서 수염을 깎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표트르 대제의 명령으로 수염을 깎아야 했다. 그는 귀족의 복장을 벗어 던지고 농사꾼 복장으로 농민들과 어울려 지냈다.

마리아는 현지 농민들을 위해 학교를 열고 병원과 극장을 개설했다. 30년이 지나 사면되어 고향에 돌아갔을 때 부부는 과거의 농토와 작위를 돌려받았다.

세르게이와 같은 귀양자들은 농민 속에서 활동하며 배운 것을 대중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인민 속으로 들어가라는 나로드니키(Narodniki) 인민주의는 세르게이와 같은 진보적 귀족층에게서 시작되었다. 이들의 농노제 폐지 운동은 레오 톨스토이와 같은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유배자들은 시베리아 발전에 기여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주민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쳤고, 고급 기술과 악기 다루는 법을 전수했다. 데카브리스트 이후 시베리아로 떠나는 정치범들은 고향에서 얻은 새로운 품종을 그곳에 뿌려 시험 재배 했다. 의사출신은 현지에서 의료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들은 비교적 제한된 영역에서 거주했지만, 넓디 넓은 시베리아 활용법을 연구할수 있었다. 시베리아 문학과 과학이 그들에 의해 탄생했다.

1856년 칙령에 의해 데카브리스트 기결수들이 사면되었지만, 일부는 그곳에 남았다. 그곳에서 자식들이 태어났고, 논밭을 일구어 자산이 생겼기 때문이다. 유럽 러시아로 돌아가면 정치적 이해관계에 매달리는 것이 싫어 시베리아에 남는 사람도 있었다.

 

데카브리스트 유형자들이 시베리아에 남긴 유습은 후대의 유형자들에게도 이어졌다. 특히 19세기말 이르쿠츠크 인구의 3분의1이 죄수였다고 한다. 그들은 러시아 지식인들이었다. 죄수들은 이 시베리아 도시에서 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예술가와 건축가들은 서유럽 풍의 건축물을 지었다. 이르쿠츠크가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린 것도 그들이 남긴 자산이다. 그들이 남긴 건물들이 아직도 일부 남아 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Decembrist revolt

Wikipedia, History of Sibe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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