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완충국 만들려던 일본의 야망
시베리아 완충국 만들려던 일본의 야망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12.27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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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만명 파병, 이르쿠츠크까지 진출…콜차크, 세묘토프 등 반군지도지 지원

 

러시아 내전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전황에 큰 변수로 작용했다. 19186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시베리아철도 기점인 첼랴빈스크에서 반볼셰비키를 선언하고 도시를 점령했다. 철도를 생명줄로 삼고 있던 시베리아가 차단되었고, 첼랴빈스크 동쪽은 볼셰비기 정권에 반대하는 백군 지역이 되었다.

체코 군단의 궁극적 목표는 조국 독립이었고, 당장에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열차에 올라타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해 나갔다. 당시 철도 능력으로 한꺼번에 5~6만명의 병력을 수송할수 없었다. 한 열차에 일부를 태워 보내고, 그 열차가 다시 와서 다음 부대를 수송하기를 여러번 해야 했다. 시베리아 서부에서 동부까지 열차가 오고 가는데만 몇 달이 걸렸다. 뒤에선 볼셰비키가 공격해 왔다. 한편에선 볼셰비키와 싸우고, 다른 한편에선 퇴각을 해야 했다. 블라디보스톡엔 그들이 타고갈 배도 없었다.

연합군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철수를 지원하기로 했다. 영국·프랑스가 이 작전을 주도했고, 두 나라는 태평양 국가인 미국과 일본에 지원을 요청했다.

 

극동아시아 점령을 홍보하는 일본군의 선전물 /위키피디아
극동아시아 점령을 홍보하는 일본군의 선전물 /위키피디아

 

러시아혁명이 발발한 직후인 1917년말에 프랑스가 일본에 시베리아 개입을 요청했다. 일본은 1차 대전 때 영일동맹을 근거로 연합국에 가담했다. 하지만 일본은 독일령이었던 산둥성 칭다오(靑島)를 점령한데 그치고 더 이상 유럽의 전쟁에 끌려 들어가길 꺼려하고 있었다. 그 연장선에서 일본은 프랑스 제안을 거절했다.

상황이 바뀌어 시베리아철도가 체코 군단에 점유되고, 백군이 일어나자 일본군 수뇐부에서 시베리아 개입론이 대두되었다. 시베리아에 완충국(buffer state)을 세우면, 러시아를 유럽에 묶어 둘수 있고, 일본이 만주와 몽골을 차지하기 쉽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에서 러시아를 꺾고, 만주에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북위 50°를 경계로 사할린 남부를 내지화한 상태였다.

일본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영국이 미국에 시베리아 개입을 의논했다. 당시 일본 총리는 초대 조선총독을 지낸 강경파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였다. 일본을 배제하고 앵글로색슨 국가들이 시베리아에 들어오려 하지 테라우치는 긴장했다. 그러던 중에 홍콩에 정박해 있던 영국 전함 한척이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일본 해군이 포착했다. 테라우치는 화가 났다. 그는 블라디보스톡이 자기네 내해에 있는 항구라고 생각했다. 그는 영국 배가 도착하기 전에 일본 배가 블다디보스톡항에 입항하도록 하라고 해군에 명령했다. 일본 전함 이와미호는 10918112일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고, 이틀후에 영국 전함 서포크호가 입항했다.

일본과 영국 배는 항구에 정박한채 위협효과만 주려고 했다. 하지만 혁명으로 행정공백이 생기면서 폭도들이 블라디보스톡에 거주하는 영국인, 일본인 가정을 약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과 영국은 자국인 보호를 이유로 수명을 하선시켜 시내에 진주하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톡의 일본군 장교들(1920) /위키피디아
블라디보스톡의 일본군 장교들(1920) /위키피디아

 

19187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가운데 12,000명이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다. 연합국은 체코군을 볼셰비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안전하게 수송하기 위해 병력 파견에 합의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일본에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영국은 일본의 참전이 불가피하다며 동의했다. 윌슨이 일본에 요구한 인원은 연합군 전체규모 25,000명 가운데 7,000명이었다. 중국도 2,000명을 몽골 국경에 파견했다. 이탈리아, 캐나다, 폴란드, 베르비아, 루마니아도 군대를 파견하면서 다국적 지원군이 구성되었다.

일본 군부는 파견군을 연합군의 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운용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군의 파병에 동의하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일본은 초기부터 파병 인원을 초과했다.

영국군 1,800명이 83일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다. 테라우치 내각은 12,000명의 파병을 승인횄다. 처음부터 요청받은 병력 수를 넘었다. 이 숫자가 그해 117만명으로 불어났다.

 

일본의 목적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철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시베리아에 방탄막이를 만드는 것이었다.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을 연합군 활동을 빙자해 몽골, 만주에 접하는 러시아 국경지대로 파견했다.

일본 육군참모총장 유이 미쯔에(由比光衛)가 전권을 쥐었고, 오타니 키쿠조(大谷喜久蔵)가 원정부대의 작전을 수행했다. 일본은 독자적으로 움직였고, 연합군의 지휘를 무시했다. 연합군은 블라디보스톡과 그 외곽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체코 군단이 빠져나간 자리를 메우면서도 연합군과 충돌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달랐다. 그들은 만·몽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 주요도시를 점령했다. 바이칼호, 부랴티아에 군대를 파견했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톡은 물론 하바로프스크, 니콜라예프스크, 치타, 이르쿠츠크까지 접수했다. 일본은 파병에 이어 식민을 권장했다. 많을 때 5만명의 일본인이 시베리아 도시에 거주했다. 미쓰비시, 미쓰이 등 일본 재벌들이 주요 도시에 지점을 세웠다. 일본은 시베리아를 영구적인 영토로 만들 생각이었다.

 

시베리아의 일본군 /위키피디아
시베리아의 일본군 /위키피디아

 

일본군은 정치적 반발을 고려해 점령지를 합병하지 않았다. 다만 볼셰비키에 저항하는 백군을 노골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그들을 앞세워 괴뢰국을 조직하려 했다. 이 모델이 나중에 만주국(1932~1945) 수립에 적용되었다.

첫 대상자는 백군의 지도자 알렉산드르 콜차크였다. 하지만 콜차크는 볼셰비키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렸고 191911월 옴스크에서 이르쿠츠크로 퇴각했다. 이때 체코 군단은 백군에 배신을 때렸다. 체코 군단은 콜차크를 넘겨주면 안전한 귀국을 보장하겠다는 볼셰비키의 조건에 응해 콜차크를 잡아 볼셰비키에 넘겨준 것이다. 콜차크가 처형된 이후 그의 부대는 빠른 속도로 와해되었다.

일본의 그 다음 지원 대상은 코사크 수장(아타만) 그리고리 세묘노프였다. 세묘노프는 일본군의 도움으로 바이칼호 주변에 트랜스바이칼이라는 독립국을 수립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망이 독립국이지, 일본의 괴뢰국이었다. 일본은 1920년 차제에 사할린의 북쪽 절반도 점령했다.

 

19209월 체코 군단의 철수가 완료되면서 미국과 영국군도 블라디보스콕에서 빠져나갔다. 일본군은 그때에도 블라디보스톡과 시베리아 주요도시에 주둔하고 있었다. 체코 군단이 빠져나가고 백군이 패퇴하면서 일본군이 볼셰비키의 직접적인 타깃이 되었다.

일본군은 시베리아에 취약했다. 동선이 멀어 물자수송이 어려웠다. 지형지물을 이용한 게릴라가 수시로 나타나 괴롭혔다. 일본군은 도시 일부만 점령했을 뿐 도시를 넘어서면 적군의 점령지였다. 시베리아라는 자연이 일본군을 고립시켰다. 일본군에 시베리아의 겨울은 고통스러웠다.

19223월과 4월 볼셰비키는 대대적으로 블라디보스톡을 공격했다. 일본은 가까스로 적을 격퇴했다. 하지만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624일 일본은 시베리아에서 철수를 선언했다. 그해 10월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완전 철수했다.

시베리아 개입으로 전투에서 죽거나 질병으로 사망한 일본군이 5,000명에 달했다. 비용도 9억엔에 이르렀다. 일본은 시베리아를 통제할수 없다고 판단했다. 1925년 일본은 북부 사할린도 소련에 넘겨 주었다. 시베리아 파병은 일본 군부의 패착으로 귀결되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Siberian intervention

Wikipedia, Japanese intervention in Sibe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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