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공화국, 러시아 내전의 볼셰비키 괴뢰정권
극동공화국, 러시아 내전의 볼셰비키 괴뢰정권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12.28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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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공격에 대응해 조직한 연합전선…1922년 일본 철수후 소련에 편입

 

1918년말에 일본은 7만명의 병력을 시베리아에 파병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5만명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그보다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한 것이다. 저의가 있었다. 이 기회에 시베리아에 괴뢰정권을 세워 완충국(buffer state)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진주는 오히려 볼셰비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일부 백군을 제외하고 다수의 극동 정치세력이 볼셰비키와 연대하며 게릴라 전술을 펼치게 되었다.

아무르강 하구의 니콜라예프스크(Nikolayevsk-on-Amur)에 일본군이 진주한 것은 19189월이었다. 일본은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일본국민을 이주시켜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아무르강이 오호츠크해와 만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수운(水運)의 거점으로 개발해 시베리아와 몽골 북부까지 지배한다는 계산이었다. 1920년초에 니콜라예프스크의 인구는 6,000명에 이르렀다. 볼셰비키와 싸우던 러시아 백군도 이 도시로 몰려와 일본군과 요새를 함께 지켰다.

19201월 볼셰비키파였던 야코프 트랴피친(Yakov Tryapitsyn)이 게릴라 4,000여명을 이끌고 니콜라예프스크를 기습공격했다. 일본군 350, 백군 300명이 적군에 대항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224일 일본 주둔군 지휘관은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트랴피친은 잔혹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전수칙이란 걸 무시했다. 도시를 포위하고 우선 백군 지지자들을 끌어내 처형했다. 일부 일본군과 백군이 항복에 응하지 않고 요새를 지키며 저항했다. 트랴피친은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저항군은 오히려 기습공격을 단행했다. 트랴피틴은 일본군과 백군의 공격을 격퇴한 후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그는 저항한 군인을 모두 죽였다. 여기까지는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어쩔수 없었다고 치자. 트랴피친은 그것도 모자라 악마의 본성을 드러냈다.

트랴피친은 무장을 하지 않은 일본인에 대한 대량살육에 나섰다. 살인마들은 총알을 아낀다며 대검을 사용하거나 얼어붙은 아무르강에 던져버렸다. 그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 일본인, 러시아인 모두 합쳐 수천명이 된다고 한다.

이 사실이 일본군 본영에 전해졌다. 5월 일본은 구원군을 니콜라예프스크로 파병했다. 일본군이 가까이 다가오자 트랴피친은 남아 있던 사람을 모두 죽여버렸다. 그리곤 도시를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고 도주해 버렸다.

이 사건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Nikolayevsk incident)이라 한다.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민간인을 무차별 살상하는 것은 도의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일본은 볼셰비키 정권에 트랴피친의 처형과 피해 일본인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1920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직후 폐허로 변한 도시. /위키피디아
1920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직후 폐허로 변한 도시. /위키피디아

 

한편 바이칼호 남쪽 치타와 부랴트에도 일본군이 진주했다. 일본은 백군 지도자 알렉산드르 콜차크를 지원했다. 백군 지역이었던 아무르강 상류지역의 지방정부는 좋든 싫든 일본군에 협조했다.

이에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등 혁명세력들은 모두 지하로 들어갔다. 치타의 지하조직 가운데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일본이 괴뢰국을 완충국으로 둔 것처럼, 자신들도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정권과 별도로 극동공화국을 수립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현지 볼셰비키들은 자신들의 수가 4,000명쯤 되므로 일시에 도시를 점령할수 있다며 멘셰비키 방안을 거부할 것을 중앙당에 건의했다.

이때 블라디미르 레닌를 비롯해 공산당 지도부는 멘셰비키에 손을 들어주었다.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이후 일본이 민감해져 더 이상 자극할 필요가 없는데다 극동지역엔 볼셰비키보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세력이 더 우월했다. 레닌은 일본군 7만명, 미군 등 1만여명이 극동에 주둔한 가운데 볼셰비키만으로 승리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이에 시베리아 봀셰비키는 멘셰비키, 사회혁명당과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쪽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이 주도하고 볼셰비키가 참여하는 형태로 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극동공화국 위치 /위키피디아
극동공화국 위치 /위키피디아

 

192041일 윌리엄 그레이브스가 지휘하는 미군병력이 철수하고, 시베리아엔 일본군만 남았다. 46일 현재 부랴트 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에서 혁명지도자들이 모였다. 그들은 극동공화국(Far Eastern Republic) 수립을 선포하고 알렉산드르 크라스노셰코프(Alexander Krasnoshchyokov)를 정부 수반으로 선출했다. 지도부는 온건한 사회주의자 또는 민주주의자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미국식 헌법을 채택하기로 했다.

극동에서는 앞서 정부 수립을 경험했다. 1905년 페테르스부르크에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을 때, 시베리아 치타에서 독자정부를 수립했으나, 곧 붕괴된 적이 있다.

이번에는 조직적으로 정부가 수립되었다. 형식으로는 볼셰비키 정권과는 독립된 정부였다. 하지만 내면으로는 볼셰비키의 지원을 받는 조직이었다. 일본이 백군을 완충국으로 내세운 것처럼 극동공화국은 적군의 완충국이었다. 정치적으로 괴뢰국이었지만 국제관계상 러시아가 일본과 직접적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대안이었다. 일본도 러시아와의 직접 교전을 피하기 위해 극동공화국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일본은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을 핑계삼아 시베리아에 대해 노골적으로 공세를 취했다. 볼셰비키 정권은 격앙해 있는 일본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사건의 책임자 트랴피친을 체포해 처형했다. 일본은 책임자 처형으로 끝내지 않았다. 일본인들의 죽음을 땅으로 보상하라는 것이었다. 볼셰비키 정권이 더 이상 이에 응하지 않자 일본은 군대를 보내 븍위 50° 이북의 사할린을 점령하고, 블라디보스톡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켰다.

극동공화국의 기 /위키피디아
극동공화국의 기 /위키피디아

 

러시아와 일본, 정확하게는 극동공화국과 일본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졌다. 콜차크가 죽은후 일본은 코사크 추장 그리고리 세묘노프를 앞세워 동 오크라이나(Eastern Okraina) 정권을 수립했다. 코사크족이 우크라이나 출신인데, 동쪽에서 우크라이나 국가를 세웠다는 의미를 강조해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반목에 불을 지른 것이다. 이 정권은 일본의 괴뢰정권으로 19201월 수립되어 그해 10월까지 9개월간 존재했다. 수도는 치타였다. 러시아 민중들은 세묘노프 정권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 정권의 존재는 오히려 상대진영인 극동공화국의 정통성을 부각시켰을 뿐이다. 세묘노프 정권이 붕괴된 후 극동공화국이 치타로 진입해 수도로 삼았다. 사람들은 극동공화국을 치타공화국(Chita Republic)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215월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백군 잔당들이 블라디보스톡에서 볼셰비키 세력을 몰아내고 프리아무르(Priamur)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시베리아엔 치타의 극동공화국과 블라디보스톡의 프리아무르 정권으로 나눠졌다. 프리아무르 정권은 피의 보복을 치르는 바람에 시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1922년 봄, 적군의 대대적인 기습이 전개되었고 블라디보스톡에 남아 있던 백군 가운데 정권을 버리고 해외로 도주하는 자가 늘어났다.

방패막이가 약해지면서 일본군은 직접 극동공화국과 교전해야 했다. 드디어 일본은 시베리아에서 손을 때기로 했다. 1922624일 일본군은 시베리아에서 완전하게 철군하겠다고 선언했다. 일본군은 1025일에 철군을 마무리했다. 일본이 세운 프리아무르 정권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로써 4년 이상 지속되었던 러시아 내전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일본군이 물러나자마자, 19221115일 극동공화국은 소련에 편입할 것을 선언했다. 완충국 내지 괴뢰국이란 허울도 더 이상 필요 없었던 것이다.

극동공화국은 27개월간 존재했다. 면적은 190으로, 대한민국의 19배이 달했다. 인구는 350만명이었다. 러시아인이 162만명으로 최대종족이었고, 그 다음으로 조선인이 차지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극동공화국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25년 일본은 북위 50° 이북의 사할린도 새로 출범한 소련에 이양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Far Eastern Republic

Wikipedia, Nikolayevsk incident

Wikipedia, Eastern Okra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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