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제국④…위대한 황제 악바르
무굴제국④…위대한 황제 악바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1.06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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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신 제거 후 반란 평정…영토 확장, 데칸고원 이남 제외하고 인도 통일

 

3대 악바르(Akbar)는 무굴제국의 영토를 넓히고 종교적 관용을 베풀어 종족간, 종교간, 계급간 화해를 실천한 황제였다. 그는 1556년부터 1605년까지 49년의 긴 재위기간 동안에 제국을 안정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자랐다. 후마윤 황제가 수르 왕조에 나라를 뺏기고 쫓겨다니다가 신드(파키스탄 남부)에서 하미다 바누를 만나 낳은 아들이 악바르였다. 후마윤이 페르시아에 망명했을 때 악바르는 카불에서 아버지의 적인 숙부 캄란에 맡겨져 양육되었다. 15561월 후마윤이 무굴제국을 다시 찾은지 6개월만에 델리의 도서관 계단에서 넘어지며 갑자기 사망했다.

13살이던 악바르는 전쟁터에 나가 있던 중에 부왕의 부음을 듣고 급히 델리로 돌아와 제위에 올랐다. 외아들이었기에 형제간 승계 싸움은 없었다. 그의 옆에는 바이람 칸, 아담 칸, 아타가 칸 등 대신들이 어린 황제를 보필했다.

 

악바르 황제 /위키피디아
악바르 황제 /위키피디아

 

아버지의 명으로 어릴 때부터 보호자 역할을 한 바이람 칸(Bairam Khan)이 섭정을 맡았다. 악바르는 성년이 될 때까지 바이람 칸에게 정사를 맡겼다. 바이람은 수르 왕조의 잔당을 결집해 델리를 향해 진격하는 헤무(Hemu) 장군의 군대를 격파했다.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무굴을 지킨 바이람은 어린 악바르에게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며 노련하게 통치했다.

18살이 되자 악바르는 자신의 웅지를 펼치는데 바이람이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바이람은 무굴인이 아니었고, 시아파 무슬림을 채용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권력은 둘로 나눌수 없다. 바이람과 그 일파가 똘똘 뭉쳐 제멋대로 국정을 농단하는 게 성년이 된 악바르의 눈에 보였다.

악바르는 사냥하러 나간다며 아그라를 떠나 델리로 갔다. 그곳에서 전격적으로 바이람의 섭정 지위를 해임하고 신하들에게 델리로 찾아와 자신의 발 밑에서 충성을 맹세하라고 명을 내렸다. 바이람의 눈치를 보던 신하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바이람도 충성을 맹세하러 델리로 갔지만 악바르의 측근들은 그의 접근을 제지했다.

바이람과 그의 무리들은 항의성 시위를 벌였지만 권력의 해는 이미 저문 상태였다. 황제는 한때 자신의 보호자에게 메카로 가라고 했다. 바이람은 메카로 가던 중에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악바르의 어릴 때 유모 마함 앙가의 아들 아담 칸(Adham Khan)도 세도가였다. 악바르와 아담 칸은 어릴 때 유모의 젖을 함께 먹으며 자란 의형제나 다름 없었다. 바이람을 따르던 무리들도 그가 죽은 후 아담 칸에게 몰려갔다.

아담은 기세등등했다. 아담은 부왕 후마윤이 전쟁터에서 패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구해준 아타가 칸을 죽여버렸다. 악바르는 분노했지만 꾹 참고, 아담 칸을 남부 말와(Malwa)를 공격하는데 장수로 보냈다. 아담 칸은 힌두교의 나라 말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악바르는 아담 칸의 소행을 눈여겨 지켜보고 있었다. 아담은 패배한 말와의 주민들을 야만적으로 살해하고 적장의 부인까지 추행했다. 전쟁 땐 적국이지만 패하면 그 백성도 무굴의 백성이다. 악바르는 아담이 말와의 포로와 그 가족까지 살해했다는 소식을 보고받고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게다가 아담은 전리품이 코끼리 몇 마리에 불과하다는 보고를 올렸다. 나머지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착복하겠다는 뜻이었다.

악바르는 군대를 몰아 말와로 내려갔다. 그제서야 아담은 정신을 차리고 횡령한 재물을 내놓고 목숨을 빌었다. 황제는 그 못난 장군을 아그라의 왕궁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부하를 시켜 3m쯤 되는 베란다 아래로 아담을 던지라고 했다. 아담은 바닥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으나 살아서 꿈틀거렸다. 악바르는 다시 올라오라고 했다. 간신이 오른 아담 칸을 다시 밑으로 던졌다. 두 번째 추락으로 아담 칸은 즉사했다.

 

아담 칸을 궁정 베란다에서 추락시키는 그림 /위키피디아
아담 칸을 궁정 베란다에서 추락시키는 그림 /위키피디아

 

이로써 고명대신이란 이름으로 권력을 휘두르던 세력가들이 모두 제거되었다. 악바르는 우유부단한 아버지 후마윤과 달리 판단력이 뛰어났고 결단도 빨랐다. 또 그에게 대적하는 세력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악바르는 인도 역사에서 위대한이라는 칭호가 붙는 두명의 군주 중 하나다. 다른 한 사람은 BC 3세기 마우리아 왕조의 3대왕 아소카 대왕(Ashoka the Great)이다.

악바르는 전투에서 한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악바르의 무굴군은 몽골식 병농일치제도에서 따온 만사브다르(Mansabdar) 제도를 채택했는데, 무굴인 뿐 아니라 힌두인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부여했다. 무굴군은 화포로 무장하고, 요새를 강화했으며, 코끼리 군단을 활용했다. 또 서양식 화승총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인도 대륙의 어느 왕국, 종족에 비해 우세한 전략을 갖추고 있었다.

 

수르 왕조를 제압한 후 가장 큰 적은 서부와 남부의 힌두 세력이었다. 라지푸트(Rajput)라고 불리는 이 세력은 일본의 사무라이, 유럽의 기사단처럼 무사집단이었고, 계급적으로 크샤트리아를 기반으로 했다.

1568~1568년에 라지푸트 세력의 길목에 있는 치토르와 란탐보르를 공격했다. 치토르는 메와르 왕국의 수도로, 아그라와 구자라트의 길목에 있었다. 인도의 부국 구자라트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치토르를 가져야 했다. 메와르의 라자푸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치토르를 사수했다. 무굴군도 반드시 뺏아야 하는 성채였으므로 엄청난 사상자를 내며 공성전을 벌였다. 전투는 4개월간 지속되었고, 사상자만 양측에서 3만명이 넘었다. 군인이 아닌 백성의 희생도 수만명에 이르렀다.

치토르 전투는 악바르가 치른 전투 가운데 가장 처참한 전투였다. 그는 적장이지만 끝가지 싸우다 전사한 자이말(Jaimal)과 파타(Patta)를 위해 동상을 세워주었다. 이어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란탐보르를 함락했다.

 

악바르 말기(1605)의 무굴제국 영토(황색) /위키피디아
악바르 말기(1605)의 무굴제국 영토(황색) /위키피디아

 

악바르는 무력으로만 영토를 확장하고 적을 제압한 것이 아니다. 그는 포용정책을 채택했다. 항복하거나 협조한 왕국에는 결혼동맹을 맺었다. 악바르는 암베르(Amber)왕국의 공주를 아내로 맞고, 그 나라의 힌두교도들에게 높은 관직을 주었다. 암베르 공주는 악바르의 후임 황제가 된 자한기르를 낳았다. 이슬람 왕국의 궁전에 들어온 공주는 힌두교를 버리지 않았다.

악바르의 포용정책은 라지푸트 왕국들이 하나둘씩 칼을 거두게 했다. 악바라는 자신의 품에 들어온 라지푸트 왕들에게 돈을 주고 그에 걸맞는 지위를 하사했다. 하지만 저항하는 라지푸트는 가차 없이 진압했다. 그의 강온 정책으로 무굴제국은 반세기에 가까운 재위 기간 동안 데칸 고원을 제외한 인도 중부와 북부, 서부, 벵갈로 영토를 확장했다.

 

1572년 악바르는 인도반도 서부의 대표적인 무역항 수라트(Surat)를 침공했다. 악바르는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포르투갈의 상인을 만났다. 포르투갈은 고아에 이어 수라트를 점령해 식민도시로 건설할 계획을 세웠으나, 무굴제국이 선점하는 바람에 포기했다. 악바르는 수라트에 이어 구자라트를 손에 넣았다. 구자라트는 당시 인도반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다.

악바르의 재위기간은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재위기간(1558~1603)과 거의 겹친다. 영국은 포투갈, 네덜란드에 비해 늦었지만 아시아 진출을 서두르고 있었다. 여왕은 동양에 부국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악바르에게 무역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Akbar

Wikipedia, Bairam Khan

Wikipedia, Adham Khan

무굴황제, 이옥순, 2018, 틀을깨는생각

이야기 인도사, 김형준, 2020,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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