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제국⑤…종교는 달라도 신은 하나다
무굴제국⑤…종교는 달라도 신은 하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1.07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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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바르, 힌두교·불교·자이나교 등 비이슬람에 관용…말년에 아들 문제로 고생

 

기원전(BC) 262~261년에 인도 동부지역에서 벌어진 칼링가 전쟁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이 전쟁에서 양측의 희생자는 20만명이 넘었다. 승자는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아소카는 승리에 도취해 싸움터를 둘러보았다. 피가 강을 이루었고, 몸뚱이가 잘린 시체가 들판을 가득 메웠다. 인도를 통일했지만, 아소카 왕은 회의를 느꼈다. “보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죽어 갔는가. 군인은 그렇다 치고, 죄 없는 백성들은 왜 죽어야 했나.” 깊은 회의에 빠진 아소카 왕은 불교에 귀의했고,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800년 후 악바르 대제도 피를 강물처럼 흘려보내고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아소카 왕과는 색다른 종교적 체험을 했다.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악바르는 1575년 신비한 기운에 흽싸이면서 말로 표현할수 없는 황홀경에 빠졌다. 그는 신과 합일한 상태에서 하루 밤을 보냈다. 그 신비한 체험은 그의 생각을 바꿨다. 자신의 종교, 자신의 신만이 옳고 유일하다는 생각은 잘못되었으며, 이슬람과 불교,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 기독교의 신이 하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악바르는 종교전쟁은 허무하다고 판단했다. 이슬람 왕조인 무굴제국이 힌두의 라지푸트 국가들의 항복을 얻어내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소카 왕이 불교에 천착한 것과 달리 악바르 황제는 종교의 통합, 종교의 화해를 추구했다. 그 신비한 체험 이후 악바르는 아그라에 파테푸르 시크라는 신도시를 만들고, 그곳에 이바다트 카나(Ibadat Khana)라는 기도소를 만들었다. 그는 여러 종교의 지도자를을 기도소에 불러 모아 토론을 벌였다. 이슬람은 물론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 나아가 최근 들어온 기독교의 승려, 신부, 성자들이 이곳에서 만나 황제와 진리를 논했다.

악바르 황제는 토론을 통해 종교는 달라도 신은 하나라는 믿음을 굳혀 나갔다. 그는 모든 종교를 통합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기도 했다. 이름하여 디니일라히(Din-i Ilahi). 악바르는 스페인 왕 필리페 2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에 의문을 품지 않고 있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교육받은대로 자신의 종교에 집착하고 있다. 사람들은 진리를 확인하길 꺼려 한다.”고 했다. 황제는 어느 종교도 진리를 독점할수 없다고 하면서 1582년 자신의 종교로 개종했다. 그의 측근 몇몇도 그를 따라 개종했다.

하지만 다수의 종교 지도자들이 황제의 이론에 동의하지 않은 것 같다. 황제의 주장에 이론적 근거가 약한데다 각 종교의 이해가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정통파 무슬림들은 황제의 독자적 종교에 강한 불만을 피력했다. 벵갈의 무슬림 판관, 셰이크 아마드 시르힌디와 같은 무슬림 지도자들은 황제의 견해를 신성모독이라고 비판했다.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악바르의 신념이 종교화했는지에 의문을 표시하기도 한다.

 

이바다트 카나에서 종교적 토론을 벌이는 악바르 황제 /위키피디아
이바다트 카나에서 종교적 토론을 벌이는 악바르 황제 /위키피디아

 

악바르 황제가 자신의 종교를 관철하지는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종교적 관용을 실천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지배자로서 피지배 종족, 또는 비이슬람 종교에 대해 관대했다. 아랍과 페르시아 등지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인두세를 물렸다. 종교차별이었다. 악바르는 이슬람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물리던 인두세를 철폐했다. 아울러 힌두교 또는 불교, 자이나교의 신자들이 자신의 성지를 다녀올 때 물리는 순례세도 폐기했다. 그의 영토에 힌두교도가 다수였다. 그는 경제적 이득을 버리고 민심을 얻은 것이다. 포로로 잡힌 적군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살려주던 제도도 없애 버렸다.

이슬람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버리면서 정복된 나라의 지배자와 주민들이 무굴을 따르게 되었다. 힌두 왕국인 암베르 왕국의 공주는 악바르에게 시집와서 힌두의 풍습을 유지했다. 그녀를 따라온 시녀들도 힌두문화를 이행했다. 남편인 황제도 왕비의 종교행사에 참석했다.

황제는 다른 종교에도 관심이 많았다. 조로아스터교, 힌두, 자이나교의 브라흐만과 승려를 불렀고, 요가 수행자도 초대했다.

포르투갈의 제주이트 교단의 신부들도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 검은색 긴 옷을 입고 이상한 모자를 쓰고, 수염과 머리카락이 노란 사람들이 궁전으로 들어가 황제를 알현했다. 황제는 가톨릭의 교리를 듣고 고맙다는 표시로 돈을 주었다. 기부금이었다. 제주이트교단은 인도 황제가 카톨릭으로 개종했다고 착각했다. 아그라 왕궁에는 카톨릭 성당도 들어섰다. 악바르는 어머니에게 성모 마리아라는 의미로 마리암 마카니(Mariam Makani)라는 타이틀을 붙여 주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인 셈이다.

 

코끼리를 타고 가는 악바르 황제 /위키피디아
코끼리를 타고 가는 악바르 황제 /위키피디아

 

악바르 황제는 인도의 고질적인 악폐에도 손을 댔다. 인도에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를 함께 매장하는 사티(Sati)라는 야만적 제도가 남아 있었는데, 황제는 사티를 폐지했다. 아울러 과부의 재혼을 허용했다. 첫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자가 두 번 이상 결혼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혼 풍습도 개선해 남자는 16세가 넘어야 결혼할수 있도록 했다.

학문 분야도 발전했다. 악바르는 글을 읽지 못했다. 아버지 후마윤이 망명하던 중에 태어났기에 악바르는 글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렇지만 학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번역기관을 설치해 산스크리트어와 그리스어, 아랍어로 된 문헌을 페르시아어로 번역시켰다. 학교에서는 수학을 강조했으며, 농학, 기하학, 천문학, 법학, 논리학, 역사학 등이 중시되었다.

악바르는 글을 배우지 못했지만 주변에 아홉 현자들이 보필했다. 아홉명의 보석들은 그의 재위 후반기를 태평성대로 만들어 놓았다. 다만 한가지, 그가 마음대로 하지 못한 것은 자식 농사였다. 인도를 지배한 황제였지만, 악바르는 자식을 이기지 못했다.

 

악바르의 무덤 /위키피디아
악바르의 무덤 /위키피디아

 

악바르에겐 세 아들이 있었다. 맏아들이 살림, 그 아래에 무라드와 다이알이었다. 세 아들 모두 술에 절어 살았고, 아편을 했다. 아버지만 해도 고생을 했는데, 아들들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살림은 일찍부터 아버지가 빨리 죽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1594, 악바르가 52세 일 때 24살의 살림은 성급하게 반란을 일으켰다. 아버지는 아들의 반란을 쉽게 진압했다. 유교권이라면, 반란을 일으킨 왕자는 처형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악바르는 장자를 용서했다. 제국을 확장하고 다스리는데 엄격했던 그였지만, 아들에겐 약한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는 큰아들이 황제감이 아닌가 싶어 둘째 무라드에 무게를 두었다. 살림과 무라드 사이에 후계 갈등이 깊어졌다. 무라드도 아버지 말을 듣지 않고 지방총독 발령을 거부했다. 그러던 둘째도 술에 중독된 일찍 죽었다. 악바르는 셋째에게 마음을 주었다. 그런데 다이알도 술에 빠져 있었고, 남편이 죽어 순장될 여인을 화장터에서 구해 사랑을 했다. 아버지는 실망해 맏아들의 아들, 즉 손자 쿠스라우를 염두에 두었다. 아들을 건너 뛰고 손자에게 바로 제위를 물려줄 셈이었다. 살림은 아들 쿠스라우를 미워했다. 자식들은 아들에서 손자까지 각기 갈라져 서로를 향해 투쟁했다.

1599년 살림은 두 번째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이라기보다 자신이 주둔하는 알라하바드(Allahabad)에서 독립한 것이다. 부왕이 아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사신을 보내자 살림은 사신의 혀를 잘라버렸다. 살림은 독자적인 화폐를 발행했다. 독립왕국을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살림의 아내는 남편과 아들 사이를 화해시키려다 자결해 버렸다. 1601년엔 살림 왕자가 3만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아그라로 쳐들어왔다. 아버지는 군대를 놓아두고 그냥 오라고 했다. 아들은 감히 아버지를 공격하지 못하고 알라하바드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 막장드라마는 마지막 순간에 부자간 화해로 결실을 맺었다. 부왕 악바르가 죽기 1년전 살림 왕자는 아그라 왕궁으로 기어들어가 아버지에게 사과했다. 악바르는 용서했다. 다만 아들을 궁궐에 감금시켜 놓고 감시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마지막이 보였기 때문에 더 이상 대들지 않았다.

16051124일 악바르 대제는 숨을 거두었다. 63살이었고, 49년 재위했다. 조금이라도 일찍 황제가 되려 했던 살림 왕자가 무굴제국 황제에 올랐으니, 그가 제4대 자한기르(Jahangir) 황제다. 왕자가 부왕을 거스르는 일은 자한기르도 당하고, 그 후대에도 이어진다. 무굴제국에서 잘못 형성된 전통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Akbar

Wikipedia, Ibadat Khana

Wikipedia, Kalinga War

무굴황제, 이옥순, 2018, 틀을깨는생각

이야기 인도사, 김형준, 2020,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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