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 찾아 이전한 충정로 민영환 동상
제자리 찾아 이전한 충정로 민영환 동상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1.08 10: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을사늑약에 항거해 자결한 애국지사…지난해 여름 시호를 딴 충정로로 이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사거리를 지나다가 전에 보지 못한 동상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동상이다. 지난해 여름에 이전해 세웠다고 한다. 충정로가 구한말 애국지사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시호에서 따온 만큼 제자리를 민영환 동상은 찾은 것이다.

 

충정로 사거리의 민영환 동상 /박차영
충정로 사거리의 민영환 동상 /박차영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은 조선말기 문신으로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후 자결함으로써 순국한 애국지사다. 본관은 여흥(驪興)으로 고종의 어머니 여흥부대부인의 남동생이며 호조판서를 지낸 민겸호의 장남이다.

1877(고종 14) 동몽교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정자·검열·설서·수찬·검상·사인 등을 역임했다. 1881년 동부승지,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에 발탁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에 아버지 민겸호가 살해되자 사직했다. 1884년 이조 참의를 시작으로 다시 관직을 맡았으며,1887년 상리국 총판·친군전영사·호조 판서가 되었다. 1888년과 1890년 두 차례 병조 판서를 역임했고, 1893년 형조 판서·한성 부윤, 1894년 독판 내무부사·형조 판서가 되었으며, 18958월 주미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주미전권대사에 부임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갔다. 18964월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특명 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윤치호·김득련·김도일 등을 대동하고 참석했다. 이때 인천을 떠나 상하이·나가사키·도쿄·캐나다·뉴욕·런던·네덜란드·독일·폴란드를 지나 모스크바에 여장을 풀었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그해 10월 귀국했다. 그뒤 의정부찬정·군부대신을 역임했고, 18971월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 전권공사가 되었으며, 영국 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후 고종의 척신으로 여러 관직을 맡았으며, 러일전쟁 후 친일 내각과 대립하다가 한직인 시종무관으로 좌천당하기도 했다.

민영환 /국가보훈처
민영환 /국가보훈처

 

1905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조병세 등과 연소(聯疏)를 올려 조약에 찬동한 을사오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했다. 그후 항쟁을 도모하다가 국운이 이미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자택에서 자결했다. 세 통의 유서가 나왔는데, 한통은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통은 재경 외국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한통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조병세를 비롯해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등 많은 사대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민영환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했다.

 

고종은 민영환의 충절을 기려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의 관작이 추증하고, 충정공의 시호도 내렸다. 유해는 경기도 용인에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했다.

민영환의 동상은 1957년 자택이 있던 종로 안국동 사거리에 처음 건립되었다. 1970년 창둑궁 정문인 돈화문 옆으로 이전되었다가 2003년 다시 종로 조계사 옆 우정총국으로 옮겨졌다.

2018년 민영환선생 동상이전 추진위원회가 동상이전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학계·재계와 후손들의 정성을 모았다추진위는 민영환의 시호가 붙어 있는 충정로로 옮기기로 하고 2022년 8월 충정로 사거리 교통섬에 동상을 이전하게 되었다.

동상의 방향은 경복궁을 향하고 있닫. 이는 자결로 일본에 항거하고 죽어서도 임금과 나라에 충심을 다하겠다는 충정공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민영환 동상 /서대문구청
민영환 동상 /서대문구청

 

선생은 주변 강국과의 외교에 관해 명쾌하게 진단했다. 그는 세계각국과 교류하되, 그들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적극적인 외교가 필요하다고 했다. 다만 일본과 교류는 하되 합치지는 말고, 러시아를 사귀되 섬기지는 말며, 청국에 사대하던 일은 버리고 선린우호 관계를 유지하라고 설파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