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제국⑦…타지마할의 저주
무굴제국⑦…타지마할의 저주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1.1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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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샤자한이 황후를 위해 만든 무덤…아들에게 강제 퇴위후 아내 곁에 묻혀

 

인도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관광명소가 타지마할이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무굴왕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순백색의 대리석으로 장엄하게 꾸며졌으며, 입구엔 수로가 조성되었고, 좌우 대칭의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한다. 궁전인줄 착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무덤이다. 무굴제국의 제5대 황제 샤자한(Shah Jahan)이 황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을 추모해 만들었다. 건축기간만 22년이 걸려 1648년에 완공되었다. 무굴제국은 물론 이탈리아, 프랑스, 투르크, 페르시아의 외국 건축가와 기술자들이 불려오고, 기능공 2만명이 동원되었다. 최고급 대리석과과 붉은 사암은 인도에서 조달되었고, 궁전 내부를 장식한 보석은 이집트, 중국, 티베트, 투르크, 미얀마 등 세계 각지에서 수입되었다.

이 무덤은 사랑의 금자탑으로 알려져 있다. 황제가 사랑하는 황후의 영생을 기려 만든 사후의 집이다. 황후가 그 집에 먼저 들어가고 황제는 나중에 들어갔다. 살아서의 사랑이 죽어서 이어졌다. 인도의 윤회 철학을 이슬람 묘지에 실현한 것이다.

하지만 무덤을 만들어준 샤자한의 인생은 동화 속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는 냉혹하고 잔인했으며, 그의 인생도 비참했다. 그는 부인 뭄바즈 마할이 죽은 후 타지마할의 저주에 휩싸여 말년을 보냈다.

 

타지마할 /위키피디아
타지마할 /위키피디아

 

샤자한의 왕자 시절 이름은 쿠람(Khurram)이었다. 10대였을 때 아그라 궁궐에서 열리는 축제에서 아주만드 바누라는 한 살 아래 소녀를 만나 첫눈에 반했다. 그의 아버지는 황후 누르자한의 오빠 아사프 칸으로 무굴의 실세 장군이었다. 일석이조였다. 예쁜 여자와 결혼도 하고 장인의 힘을 이용할수 있는 기회였다. 스무살이 되던 해 쿠람은 이 소녀와 결혼했는데, 그녀가 뭄타즈 마할이다.

쿠람 왕자는 권력욕이 강했다. 그의 뒤에는 장인이 든든하게 버텼다. 그는 경쟁자인 형 쿠스라우 왕자를 살해했다.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용서를 빌고 목숨을 건졌다. 아버지 자한기르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왕자의 난이 격화되었다. 황후는 샤르야르 왕자를 밀었는데, 황후의 오빠 아사프는 사위 쿠람을 밀었다. 자한기르가 사망하자 샤르야르가 황제에 올랐으나 장인이 황제 즉위를 보류시키고 사위가 수도로 올라오길 기다렸다. 쿠람은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들어와 무력으로 황제 자리를 차지했다. 황제가 된 후 쿠람은 경쟁자였던 동생 샤르야르 왕자의 눈을 멀게 해 감옥에 가두고 형과 동생, 삼촌, 조카들을 모조리 죽였다. 아버지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했던 계모 누르자한을 유배보냈다.

 

샤자한 /위키피디아
샤자한 /위키피디아

 

그러던 쿠람이 황제에 오른 시기는 162836살이었다. 샤자한은 황후를 끔찍이 사랑했다. 둘 사이에 자식이 열넷으로, 아들 여덟, 딸 여섯이었다. 그는 전쟁터에도 아내를 데리고 다녔다. 즉위한지 3년째 되던 1631, 샤자한은 데칸고원으로 원정길에 나섰다. 뜨거운 여름, 데칸의 천막은 숨도 쉬기 어려웠다. 황후는 열네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딸을 낳았다. 하지만 황후는 산후후유증으로 죽음을 맞았다. 나이 38세였다.

아내를 잃은 샤자한은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전쟁을 중단하고 회군했다.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다. 뭄타즈 마할은 죽기전에 자기를 기억하기 위해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달라는 했다. 샤자한은 아내의 시신을 수도 아그라로 가져와 야무나 강가에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었다. 그는 무덤의 이름을 선택된 자의 거처라는 뜻으로 타지마할(Taj Mahal)이라고 했다.

샤자한 시기의 무굴제국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화려한 무덤을 짓기 위해 막대한 국가재정이 투입되었다. 당시 돈으로 500만 루피나 소요되었는데,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0억 달러에 이른다. 이 정도는 무굴 제국에 큰 돈이 아니었다. 당시 유럽은 처참한 30년 전쟁(1618~1648)의 와중에 있었다. 유럽 각국이 인도산 화약을 사가는 바람에 돈이 흘러 넘쳤다. 중국은 명청 교체의 혼란한 시기였다. 타지마할은 당대 최고의 국력을 보유한 무굴제국의 상징이 되었다.

 

뭄타즈 마할 /위키피디아
뭄타즈 마할 /위키피디아

 

샤자한은 수도를 아그라에서 델리로 옮겼다. 아그라는 도시가 팽창해 길이 비좁았다. 인구가 팽창해 황제가 코끼리를 타고 장엄한 행렬을 펼칠수 없었다. 델리는 무굴제국에 앞서 300년간 다섯 술탄국의 수도였다. 황제는 구도시를 개조해 신도시로 만들었다. 수도 이전은 1638년에 발표되어 10년간 공사를 했다. 1648년 공사를 마쳤을 때 델리는 세계적인 도시가 되었다. 당시 인구 20만이 넘는 도시가 인도에만 9개나 되었는데, 유럽에는 3개에 불과했다. 델리는 1857년 무굴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200년간 수도로서 역할을 다했다.

 

샤자한의 가장 큰 걱정은 사랑의 씨앗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었다. 황제의 자리는 하나인데 황제가 되려는 아들은 많았다. 딸들도 아버지의 애정을 독차지하려고 서로를 견제했다. 무굴제국엔 장자계승이란 원칙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도 형제 싸움에서 승리해 황제가 되었기에 그는 아들이 더 크기 전에 교통정리를 해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일찌감치 자신의 후계자로 장자인 다라시코(Dara Shikoh)를 지정했다. 다른 아들들이 아버지의 방침에 반발했다. 반발한 아들은 샤슈자, 아우랑제브, 무라드였다. 왕위계승전에 4파전이 벌어진 것이다.

딸들도 편이 갈렸다. 죽은 어머니를 대신해 왕실 일을 보던 자하나라는 다라시코의 편이었다. 둘째 딸 로샤나라는 아버지가 언니만 이뻐하는 것에 질투를 느끼고 야심만만한 아우랑제브를 지지했다.

아버지 샤자한은 아들 가운데 아우랑제브를 가장 싫어 했다. 그는 자신이 죽기 전에 아우랑제부를 제거할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다라시코와 짜고 아우랑제브에게 편지를 보내 델리로 오래고 했다. 셋째 아들이 수도로 오면 감옥에 가두고 죽일 생각이었다. 이 음모를 로샤나라가 알아채고 아우랑제브에게 델리로 오지 말라고 일러주었다.

다라시코는 증조할아버지 악바르를 닮아 모든 종교에 관용을 베풀자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이슬람과 힌두교의 공통점에 관심을 가졌고 종교적 화해를 역설했다. 정통 무슬림들은 황태자의 종교적 견해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아우랑제브는 독실한 무슬림이었다. 그는 힌두교를 비롯해 이교도들이 제국 내에 번성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이런 종교적 갈등이 형제간 권력투쟁을 부채질했다.

 

1658년 샤자한이 병이 들어 맏아들 다라시코에게 섭정을 맡겼다. 그러자 세 아들이 아버지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일제히 궐기했다. 샤슈자는 벵갈에서, 무라드는 구자라트에서 무기를 들었고, 아우랑제브는 데칸에서 일어나 무라드와 연합했다. 아우랑제브와 무라드의 연합군이 델리를 공격했다. 다라시코가 이끄는 군대가 반군을 제압해 동생들의 군대가 밀려났다. 이때 첩자가 다라시코에게 코끼리에서 내려 말을 타고 반란군을 추격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말을 듣고 다라시코는 말로 갈아탔는데, 그때 다라시코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병졸들이 코끼리를 보니 대장이 없었다. 다라시코의 군대는 빠른 속도로 붕괴되었다. 무라드와 아우랑제브는 전세를 역전시켜 쿠데타에 성공했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보다 더 잔혹했다. 그는 함께 싸운 무라드를 구금했다. 벵갈의 샤슈자는 아우랑제브에 패해 버마로 도주하다가 살해되었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에게 퇴위를 요구했다. 샤자한은 강제로 퇴위당한채 구금되었고, 아우랑제브가 꿈에도 그리던 황위에 올랐으니, 무굴제국 제6대 황제다.

아우랑제브는 차마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는 맏형 다라시코를 죽이지 못했다. 누나 로샤나라는 다라시코를 죽이라고 아우라아제브를 압박했다. 동생은 형 다라시코를 더러운 코끼리에 태워 델리 시내에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선 겁에 질린 조카들이 보는 앞에서 형을 죽이고, 머리를 잘라 아버지에게 보냈다. 아버지는 대경실색했다. 아우랑제브는 야차 그 자체였다.

다라시코의 시체는 2대 황제 후마윤의 무덤에 매장되었다. 2020년 인도 정부는 다라시코의 유해를 찾기 위한 고고학적 발굴에 나섰는데, 후마윤 무덤에서 나온 140명의 유골 가운데 다라시코의 것을 구분하는데 실패했다.

 

아그라 성에서 바라본 타지마할 /위키피디아
아그라 성에서 바라본 타지마할 /위키피디아

 

샤자한은 아들에게 황위를 빼앗긴 후 과거 수도 아그라의 성에 유폐되어 8년을 더 살았다. 그는 아그라 성의 창문 너머로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먼저 간 아내를 그리며 남은 인생을 슬픔과 후회로 보냈다. 그의 옆에는 맏딸 자하나라가 시중을 들었다. 16661월 그는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살아 생전 타지마할 건너편에 검은색 무덤을 만들 계획을 세웠으나, 자신의 무덤을 만들지 못했다. 30년간 대제국의 황제를 지낸 샤자한은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채 아내의 곁에 누웠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Shah Jahan

Wikipedia, Mumtaz Mahal

Wikipedia, Taj Mahal

Wikipedia, Dara Shikoh

무굴황제, 이옥순, 2018, 틀을깨는생각

이야기 인도사, 김형준, 2020,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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