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제국⑧…나쁜 황제 아우랑제브
무굴제국⑧…나쁜 황제 아우랑제브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1.13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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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정책 포기하고 이슬람 우월정책 펼쳐…데칸고원 마라타 정벌 나서

 

6대 황제 아우랑제브(재위 1658~1707)는 권력을 잡은 후에 형제와 조카, 사촌형제들을 모조리 죽이고, 아버지 샤자한을 유폐시켰다. 40세에 황제가 된 그는 89세까지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3대 악바르와 같은 49년간 황제 자리에 있었지만 통치방식에선 증조할아버지와 판이하게 달랐다. 악바르는 힌두를 비롯해 모든 종교에 관용을 베풀었지만 아우랑제브는 이슬람 우선주의를 펼치며 타종교를 말살하려 했다.

그는 왕관의 장식이란 의미의 아우랑제브(Aurangzeb) 칭호로도 모자라, ‘세계의 정복자라는 의미의 알람기르(Alamgir) 칭호를 더 가졌다. 그의 재위 말년에 무굴제국은 데칸고원까지 차지해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지만 종교차별로 인한 반란과 오랜 전쟁으로 국가 재정은 고갈되어 갔다.

아우랑제브 /위키피디아
아우랑제브 /위키피디아

 

아우랑제브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인도에서 그는 무굴제국 황제 가운데 최악으로 꼽힌다. 악바르의 관용정책을 접고 힌두교를 억압한 지배자로 지목된다. 반면에 파키스탄에서 그는 최고의 지배자로 추앙받고, 대신에 관용적인 악바르가 폄하 대상이다.

아우랑제브는 피를 부르며 집권했기에 처음엔 잘해보려고 했다. 그가 죽인 사람은 황족이고 귀족이었다. 그는 백성들에겐 자애로운 황제가 되려고 했다. 빈민을 위한 무료급식소를 세우고, 걸인들에게 음식과 식량을 공급했다. 곡물 운송과 판매에 물리는 세금을 면제하고, 물가 상승을 억제했다. 당대 세계최고 부자의 나라였기에 이 정도의 복지로 나라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초심은 10년쯤 갔다. 나이가 쉰 즈음에 들면서 그는 점점 정통 무슬림이 되어갔다. 그는 금욕생활을 강화해 나갔다. 술과 아편은 일절하지 않았다. 건국자 바부르도 술을 좋아했고, 할어버지 자한기르는 술과 아편에 중독되다시피했는데, 그는 환락의 욕망을 버렸다. 할렘의 후궁도 이슬람에서 허용하는 네명으로 제한했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동전에도 코란 구절을 삭제했다. 사람들이 코란 구절을 만지는 것이 불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라는 부자여서 먹을 것은 풍부했지만 그는 금식을 했다. 그는 코란 구절을 암송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황제의 종교적 심취는 정책으로 나타났다. 그는 궁궐에서 음악도 없애 버렸다. 어느날 길가에서 악사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보고 황제가 그들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다. 악사들은 음악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궁궐에 음악을 살려달라는 하소연이었다. 황제는 음악의 영혼에 기도하고 잘 묻어주라고 말하며 악사들의 요청을 묵살했다고 한다. 궁궐은 황제가 기도하는 모스크로 변해갔다.

 

문제는 황제 한 사람의 신앙적 독실함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선대 황제들도 독실한 무슬림이었지만, 타종교에 대한 관용은 베풀었다. 아우랑제브는 독선적이었다. 그는 비이슬람 종교가 이슬람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재위 중반기에 그는 인도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에서 이슬람의 통치자로 변신한다. 힌두교도는 더이상 무굴제국의 동반자가 아니라, 피지배자로 떨어졌다. 악바르 대제 때 폐지한 인두세(지즈야)1679년부터 비이슬람교도들에게 다시 부과되었다. 상인들에게 물리는 관세도 차별화해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차이는 두배가 되었다. 비이슬람교도들이 자기네 성지를 순례할 때 순례세도 부활되었다.

아우랑제브는 비이교도의 사원과 학교를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아흐메다바드에 있는 친타마니 사원, 바라나시의 비슈와나트 사원, 마투라의 케샤와 라미 사원 등이 파괴되었다.

아우랑제브의 비이슬람 척결조치는 무굴정권에 협조했던 이교도들의 반발을 샀다. 인두세 부과에 불만을 품은 힌두교도들은 악바르 황제의 묘를 약탈하고, 아우랑제브가 행차할 때 돌이나 몽둥이를 던지거나 웅성거리며 비웃기도 했다. 힌두 무사 라자푸트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아우랑제브의 탈관용주의는 무굴제국 약화의 원인을 제공했다. 그렇다고 당장 망하지는 않았다. 아우랑제브 재위기간에 무굴제국은 세계 1위의 부국이었다. 당시 무굴제국의 조세수입은 루이 14세의 프랑스보다 열배나 되었고, 인구만 15,000만명을 기록했다.

 

아우랑제브는 이슬람 우월주의, 특히 수니파 위주의 정책은 반란과 전쟁을 유발했다. 가장 먼저 무굴제국에 복종한 힌두국가 암베르와의 관계는 끊어졌고, 펀잡의 시크교도는 독립을 추구했다. 1675년 아우랑제브는 시크교 구루(지도자) 테그 바하두르를 처형했다. 그후 시크교도들은 아우랑제브의 치세 내내 저항을 계속했다.

데칸고원에 2개의 술탄국은 비자푸르와 골콘다는 수니파의 무굴에 등을 돌리고 시아파 국가인 페르시아와 손잡았다.

 

무굴 황제 아우랑제브와 마라타의 시바지 왕 /위키피디아
무굴 황제 아우랑제브와 마라타의 시바지 왕 /위키피디아

 

가장 큰 위협은 데칸고원의 마라타(Marata) 왕국이었다. 마라타족은 힌두교 국가로 인종적으로 피부색이 검은 드라비다 계열이었다. 그들은 시바지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힌두교도들을 결속시켜 수라트 항구를 두 번이나 약탈했다. 1666년 아우랑제브는 시바지와 회담하고 그에게 제국의 지위를 주며 유화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시바지는 데칸에서 마라타 왕국을 세우고 군주가 되어 무굴제국에 대항했다.

아우랑제브는 처음에는 마라타를 심각하게 취급하지 않았으나, 그들이 점점 세력을 확장해 나가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그는 50년에 가까운 제위기간 중에 절반이 넘는 26년을 데칸고원에서 살았다. 데칸고원은 무더웠다. 나이 60대 이후 기후가 다르고 물이 다른 곳에서 천막생활을 했다. 데칸고원이 제국의 수도로서 기능을 하면서 델리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50만 대군. 5만마리의 낙타, 3만마리의 코끼리 부대가 장기간 움직였기 때문에 비용도 많이 들었다.

마라타는 시바지가 사망한 이후 아들 삼바지가 왕위에 올라 대항했다. 1689년 아우랑제브는 삼바지를 포로로 잡아 처형했으나, 삼바지의 동생 라자람이 잔여세력을 이끌고 게릴라전술을 펼쳤다. 마라타의 끈질긴 저항으로 무굴제국은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했고, 결국 국고가 바닥이 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우랑제브 말년에는 병사들의 봉급이 밀릴 지경이었다.

 

아우랑제브 시기의 무굴제국 /위키피디아
아우랑제브 시기의 무굴제국 /위키피디아

 

형제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유폐시킨 업보는 그에게도 이어졌다. 세째 아들 무하마드 아잠(Muhammad Azam)는 재위 12년째를 맞는 아버지에게 도전장을 냈다. 나이 52세의 아우랑제브는 애걸복걸하는 아들을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살려주었다. 10년후 아잠은 또다시 내란을 일으키다 실패해 연금상태가 되었다. 다시 풀어주었더니 또 무장봉기를 시도했고, 또다시 풀어주고, 네 번째 배신을 해다가 실패를 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7년간 감옥에 가두었다가 1795년 풀어주며 카불 총독으로 보내 버렸다.

넷째 아들 마하마드 악바르(Muhammad Akbar)는 힌두 무사집단인 라지푸트들과 공모해 모반을 시도했다. 아우랑제브는 아들의 동태를 감시하다가 사전에 적발하고 반란을 사전에 저지했다. 악바르는 데칸고원으로 도주해 마라타 왕국의 삼바지와 제휴했다. 아우랑제브는 삼바지 왕을 체포해 처형했으나, 악바르를 붙잡는데 실패했다. 악바르는 페르시아로 도주했으나, 아버지보다 1년 먼저 세상을 떠나 계승자가 되지 못했다.

맏딸 제분니사(Zeb-un-Nisa)는 아우랑제브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제분니사가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 악바르와 연락을 취하자 아버지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맏딸을 감옥에 쳐넣었다. 제분니사는 20년간 수감생활을 하다가 죽었는데, 감옥에서 그는 시를 썼다. 그의 시는 1929년 델리에서 출간되었고, 2001년 테헤란에서도 출간되었다. 그녀의 원고는 인도 이외에 영국, 프랑스, 독일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가족이든, 신하이든 아무도 믿지 않았던 아우랑제브에게도 죽음은 다가왔다. 1706년 그는 전쟁을 마무리하지 못한채 회군을 결정했다. 몸이 따라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황제는 델리에서 죽길 원했다. 돌아가는 길에 크라슈나강 유역에서 6개월을 쉬어야 했다. 병은 빠르게 악화되었고, 코끼를 탈 힘도 없어 가마를 타야 했다. 1707, 그의 병세는 한층 나쁘졌고, 죽기 전에 그는 병사들의 밀린 봉급을 지급했다. 아우랑제브는 끝내 델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그해 33, 아메드나가(Ahmednaga)라는 곳에서 숨졌다. 89세였다.

네 번 반란을 시도하다가 카불로 쫓겨난 셋째 아들 아잠이 후임 황제에 올랐다. 아우랑제브가 죽은 후 무굴제국은 급속하게 무너졌다.

 


<참고자료>

Wikipedia, Aurangzeb

무굴황제, 이옥순, 2018, 틀을깨는생각

이야기 인도사, 김형준, 2020,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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