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지방제도③…명주(溟州), 실직·예국의 땅
신라의 지방제도③…명주(溟州), 실직·예국의 땅
  • 아틀라스
  • 승인 2019.03.19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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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통천에서 경북 영덕까지 동해안 해상세력권…울릉도 영토화의 본거지

 

명주(溟州)의 치소는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슬라(何瑟羅)으로, 지금의 강릉이다. 명주 영역은 북한 강원도 통천에서 남쪽으로 경북 영덕까지 동해안 일대다. 태백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영동지방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데, 평창, 정선, 영월등 영서지방도 포함되어 있다.

당초에 강릉을 소경(小京)으로 격상시켰지만, 말갈족들의 지역이라 해서 소경을 폐지하고 주도로 삼았다. 정선현, 속제현, 지산현, 동산현등 4개 현을 직할현으로 두었으며, 직할지역이 강릉, 양양, 정선, 평창에 이른다.

명주는 고구려 땅이었던 것을 신라가 차지했다. 그 역사는 삼국 통일 이전, 지증왕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주의 옛 나라는 예국(濊國)과 실직국(悉直國)이었다.

 

그래픽=김인영
그래픽=김인영

 

 

해상왕국 실직국

삼척 일대는 신라에 의해 실직주로 개편되기 앞서 실직국(悉直國)이라는 독립국이었고, 토착 세력이 주권을 상실한 이후에도 수 세기 동안에 신라와 고구려, 말갈, 예국과 치열한 영토 싸움이 벌어진 분쟁지역이었다.

실직국은 신라, 백제, 고구려에 의해 사라진 숱한 소왕국들 가운데 비교적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나라다. 자세한 자료가 없지만, 삼국사기와 최근 고고학자들에 의해 출토된 유물을 통해 고대국가 실직국의 얼개를 그려볼 수 있다.

실직국에 관한 기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조에 등장한다. 그 기사를 단락별로 나눠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파사이사금 23(102) 가을 8,

음집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강역 문제로 다투다가(爭疆) 임금에게 찾아와서 이를 해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임금이 어려워하다가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이 나이가 많고 아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하여, 그를 불러와 물었다. 수로가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을 음집벌국에 귀속하게 했다.

이에 임금은 6부에 수로왕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도록 명했다. 5부는 모두 이찬으로 연회의 주인을 삼았는데, 오직 한기부(漢祇部)만은 직위가 낮은 자를 연회의 주인으로 삼았다. 수로가 노하여 그의 종 탐하리(耽下里)를 시켜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保齊)를 죽이게 하고 돌아갔다. 종은 도망하여 음집벌국 우두머리인 타추간(陁鄒干)의 집에 의탁했다. 임금이 사람을 보내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는 돌려 보내지 않았다.

임금이 노하여 병사를 일으켜 음집벌국을 공격하니,

그 우두머리가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했다. 실직(悉直) 압독(押督) 두 나라 임금도 와서 항복했다.

 

고대 철수송로 /김인영
고대 철수송로 /김인영

 

이 기사는 의문 투성이다. 삼척을 치소로 하는 실직국과 경주시 안강의 음집벌국, 그 먼 거리에 떨어진 소국이 과연 무슨 연유로 싸웠을까. 금관국은 왜 감놔라, 배놔라 하며 개입했을까. 전쟁 당사자도 아닌 압독국이 남의 전쟁에 구경만 하면 될 것이지, 왜 신라에 항복했을까.

삼국사기의 실직국 기사를 재구성해 본다.

경주 안강읍에 위치한 소국 음집벌국은 내륙국이었고, 금관국의 철을 수입하기 위해 가까운 포항 지역의 항구가 필요했다. 그런데 포항에는 실직국이 실직곡국이라는 식민도시를 건설해 동해안 일대의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두 나라는 실직곡국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며 진한 맹주국인 신라의 파사임금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그런데 철 수출국이자, 동남해안의 해상권을 쥐고 있는 금관국이 개입했다. 변한 맹주국인 금관국의 수로왕은 동해안의 해상세력은 실직국을 견제하기 위해 음집벌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경주에서 합의서를 작성하고 합의를 경축하는 연회가 열렸다. 수로왕과 파사임금, 음집벌국의 우두머리 타추간, 실직국왕도 참석했다.

그런데 신라 6부 가운데 음집벌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기부가 불만을 표시했다. 한기부는 이웃한 음집벌국이 해상교역로를 확보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수로왕은 부하 탐하리를 시켜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를 죽이고, 음집벌국으로 도망갔다.

이에 파사 임금은 진노했고, 병사를 일으켜 음집벌국을 공격해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포항의 항구도 빼앗았다.

포항의 해상거점을 잃은 실직국은 신라에 속국임을 선언하면서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하며, 그 대가로 해상 이용권을 얻어낸다. 또다른 내륙국인 압독국도 포항 항구를 이용하기 위해 신라에 속국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실직국은 포항의 실직곡국을 차지하기 위해 2년후인 파사이사금 25(104)에 신라에 반기를 들었다. 신라는 병사를 보내 실직을 토벌하고 평정했다. 그리고 삼척, 울진등지에 살고 있던 실직 국민을 남쪽 변경으로 옮기도록 사민(徙民)정책을 취한다.

삼국사기기록으로는 실직국이 2세기초인 파사이사금 25년에 멸망한다.

실직국 백성들은 고향땅을 등지고, 아마도 신라와 금관국과의 경계지역인 부산 또는 경상남도 일대로 보내져 가야와의 전투에 동원됐을 것이다. 고대에 나라 잃은 백성들은 노예나 다름없다. 실직국인들은 슬플 겨를도 없이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다. 남부여대(男負女戴). 삼척에서 부산까지, 그들은 마치 6.25 때 피난행렬처럼 아이와 가재도구만 이고지고 쫓겨갔다.

 

실직국에 대한 공식 기록은 삼국사기파사이사금조의 짧은 스토리 밖에 없어 실체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최근 영동지방에 개발사업이 활발해지면서 철기시대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굴되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영동지방의 유물들을 분석해 본 결과,

강릉 중심의 예국과 삼척 중심의 실직국이 동해안을 활동무대로 한 예족 계통이며,

실직국은 북쪽으로는 지금의 강릉시 옥계면 지역, 남쪽으로는 경북 동해안 일대(울진, 평해, 영덕, 청하)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특히 동해시 송정동 유적은 1996년 관동대 발굴팀이 처음으로 조사한 이래 지금까지 20여차례나 여러 조사기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송정동 마을 유적은 기원 무렵부터 4~5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600호 정도의 대규모 마을로 평가되고 있다.

 

강원도 삼척시 오분동에 세워진 신라장군 이사부 우산국복속 기념비 /사진=김인영
강원도 삼척시 오분동에 세워진 신라장군 이사부 우산국복속 기념비 /사진=김인영

 

 

실직국의 강역은 북쪽으로는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에서 경북 동해안인 영덕에 이르는 동해안 해상왕국이었다. 서쪽으로는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흐르고, 그 사이 바닷쪽으로 뻗친 지맥 사이로 소하천이 형성되고 있다. 실직국은 강원도 남부에서 경북 북부에 이르는 동해안에 좁고 길게 연맹체를 형성했다. 안데스 산맥에 가로막혀 길쭉하게 국토를 형성하고 잇는 남미의 칠레를 연상케 한다.

동해안 유적을 살펴보면 실직국은 해상왕국으로 북의 옥저, 남의 진한, 변한을 연결하며 중계무역으로 번성한 사실을 알수 있다. 강릉 교황리 유적에서 철 생산과 관련 있는 유구가 출토되고, 동해 망상동과 송정동 유적에서 송풍 파편이 발견됐됐다. 이는 실직국이 금관국의 철기를 수입해 자체적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북쪽의 예국에 수출한 것을 입증한다. 실직국의 수출품은 어물과 소금, 임산물등이 아니었을까. 강릉 유적지에서는 중국 한()대의 오수전이 발견되는데, 동해안 해로가 오래전부터 운영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고려조 이승휴가 남긴 기록에도 있지만, 삼척, 울진 등지에서 맑은 날에 울릉도가 보이고, 울릉도에서 육지가 보인다고 한다. 따라서 실직국과 우산국 사이에도 교역이 있었고, 실직인들은 삼척에서 울릉도까지 해로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록상으로 이사부가 실직주 군주가 되기 300년전에 실직국이 존재했다. 실직국은 동해를 장악한 고대 해상왕국이었고, 실직국인들은 해류와 해풍의 방행과 이용법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박제조술은 물론 항해술도 발달해 있었을 것이다.

신라는 숱하게 왜의 침공을 받아 제해권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지증왕이 가장 신뢰하는 왕족인 이사부를 실직 군주로 보낸 것은 동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라는 뜻이었다. 실직국은 멸망했지만, 그 후예들이 보존해온 선박제조기술, 항해술이 나중에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는데 활용됐을 것이 분명하다.

 

예국

이사부(異斯夫)502년 실직 군주의 명을 받은후 7년후 512년 하슬라 군주로 부임한다. 군주(軍主)의 직책이 중앙군(京軍)의 총책임자였으므로, 주둔지가 삼척에서 강릉으로 이동했다는 뜻이다. 실직군주였을 당시 이사부의 관할 구역이 경북 동해안에서 삼척까지였다가 7년후 하슬라 군주가 됐을 때 관할 영역이 강릉으로 넓혀졌다는 뜻이다. 기록이 없지만, 7년 사이에 신라군이 고구려와 그 동맹국과 수차례 전투를 벌여 삼척에서 강릉까지 북진했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이사부의 하슬라 군주 부임과 우산국 정벌이 비슷한 시기에 이뤄졌다는 사실에는 일치한다. 하지만 선후의 문제에서 삼국사기는 하슬라 군주 부임 직후에 우산국 정벌이 이뤄졌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선 우산국 정벌의 공로로 하슬라(아슬라) 주백에 보임됐다고 쓰여 있다.

어찌했든 이사부는 7년간 실직에서 육상 전투력과 해상 전투력을 동시에 키워 동해 제해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고구려를 강릉 이북으로 물러나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의 유명 장수 가운데 해상전과 지상전을 동시에 성공적으로 수행한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사부는 해전과 육상전에서 동시에 승전하는 장수로 기억될 것이다.

 

강원도 동해안은 과거 예국(濊國)의 영역이었다. 삼국시대 초기에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영동지역은 예족, 영서는 맥()족이 거주했다. 삼척, 울진, 영해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한 실직국도 예족의 한 갈래였다. 삼국사기에는 말갈에 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데, 지리적으로는 예와 맥의 영역과 오버랩핑된다. 따라서 예, , 말갈이 미분화한 상태에서 강원도, 경북 동해안, 경기도 서부지역에 거주하며, 부족국가를 이뤘던 것으로 보인다.

이사부가 실직, 하슬라 군주를 맡으면서 우산국의 항복을 받아낸 것은 신라의 영토를 강원도 북부까지 확장해 예족을 지배함과 동시에 동해안의 해상 부족을 통치권에 넣어 반도의 동해안은 물론 해의 영유권을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주에서 강릉까지 육지를 선으로 하고, 울릉도와 독도를 점으로 지나는 반원형의 육상, 해상 지배권을 확장했다는 의미다.

신라는 일찍부터 동해안 루트를 개발해 운영해왔다.

이사부가 북쪽 국경과 동해를 거쳐 공격해오던 예(말갈)와 왜의 루트를 차단했기에 신라가 서쪽과 남쪽으로 영토를 확대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예국의 정치, 사회, 문화에 관한 내용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자세하게 나온다. 1,000년 후에 고려인이 쓴 사서보다 중국인(진수)이긴 하지만, 당대에 쓴 사서가 보다 자세하고 정확할 수밖에 없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밝힌 예국의 생활상을 들여다 보자.

규모: 예의 호수는 2만으로, 인구 10만쯤 되는 것 같다. 부여의 호수가 8만이니, 부여보다 작고, 고구려의 3만과 엇비슷하며, 옥저 5천에 비하면 큰 나라다.

읍락국가체제: 대군장이 없고,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 관직에 후()읍군삼로가 있어 백성(하호)를 다스렸다.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종족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의 성질은 삼갈 줄 알고, 성실하다. 즐기고, 탐욕함이 적고, 겸손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알아, 고구려에 구걸하지 않았다. 언어와 법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은데 의복만은 조금 달랐다.

책화(責禍)제도: 산천을 중시하여 산천으로 각각 부()를 나누었고, 서로 들어와 허튼 짓을 못하게 했다. 읍락끼리 서로 침범을 하면, 서로 꾸짖어 소나 말로 갚는데, 이를 책화라 한다. 사람을 죽이면 죽음으로 갚아 도둑이 적다.

족외혼: 같은 성씨끼리는 혼인하지 않고 꺼리는 것들이 많았다.

질병으로 사람이 죽으면 서둘러 버리니 옛 집을 버리고 새로 집을 짓는다. 마포가 있으며 양잠을 하고 면을 짠다. 별자리를 보아서 그 해의 풍년이 들 지를 알고, 구슬과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

) 무천(舞天): 항상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없이 술마시고 노래하고 츰을 추니, 이름하여 무천이라 했다.

호랑이 신앙: 범을 신으로 모시고 제사지낸다.

) 전술: 창은 길이가 3장이나 되니 여러 사람이 함께 긴 창을 들기도 한다. 보병전에 능하다.

특산물: 낙랑단궁이 나오고 바다에서는 반어피가 나며 얼룩표범이 있고 또한 과하마(果下馬)가 나온다. 과하마는 높이가 석 자인데 타면 과일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고 해서 과하(果下)'라고 했다.

 

동이전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국은 공동체적 유대가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하지만 국가라는 개념보다는 부족의 개념이 강했다. 산천을 경계로 한 일정 지역 내의 경작지는 읍락 공동 소유의 개념으로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구슬과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탐욕이 없고, 호랑이를 신으로 섬기며, 무천과 같은 공동의 축제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회분화가 덜 이뤄진 초기 공동체사회로 파악된다. (55일 강릉 단오제가 예의 무천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예국은 처음에 고조선에 복속돼 있다가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원산, 안변 일대를 중심으로 임둔군(臨屯郡)을 설치하자 예국을 그 지배 하에 넣었다. 기원전 82년 임둔군을 폐하고, 기원전 75년에는 현도군(玄免郡)을 요동으로 옮기면서 한()은 한반도 동부지역에 예국과 옥저 지역 7개현은 새롭게 설치된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의 지배 아래 두었다. 동부도위의 치소(治所)는 예국의 불내성(不耐城)으로, 지금 함경남도 안변에 해당한다.

()은 서기 30년 동부도위마저 폐한후 예국과 옥저를 낙랑군 관할로 남겼다. 낙랑군은 거수(渠帥)라고 불리는 예국 부족장들을 현()의 후(), 즉 현후(縣侯)에 봉했다. 이때부터 예국의 현후(縣侯)들은 낙랑군의 간접지배를 받으면서 읍락내의 일을 자치적으로 처리했다.

예국은 2세기말 한()의 세력이 약화될 무렵에 고구려에 복속한다. 한이 멸망하고, 중국 중원에 위()가 들어서자, 고구려와 위가 만주와 한반도를 놓고 패권전쟁을 벌였고, 예국도 그 싸움에 휘말렸다.

고구려가 낙랑군을 멸망시킨 (313) 후 예국은 다시 고구려에 복속하게 됐다.

예국이 언제 멸망했는지는 알수 없다. 다만 이사부가 실직군주(505)에 이어 하슬라군주(512)에 임명되면서 동해안 일대에 대한 신라의 지배력을 확고히 한 시점을 전후로 예족은 북한 지역으로 밀려나 동해안에서 소멸된 것으로 관측된다. 그후 신라를 공격하는 말갈의 기사는 예족이 아닌, 진짜 말갈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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