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제국 멸망기①…허수아비 황제들
무굴제국 멸망기①…허수아비 황제들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3.01.1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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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랑제브 사후 급속한 내리막길…권신에 의해 황제 자리 좌지우지

 

무굴제국의 전성기는 아우랑제브 시대였다. 역사지리학자들이 그린 지도에는 아우랑제브(16581707) 말기인 1700, 무굴제국은 타밀족 지역인 남쪽 끝 폴리가르(Polygar)를 제외하고 인도반도 전역, 파키스탄, 벵갈, 아프가니스탄까지 지배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때가 무굴제국 정점이었다. 아우랑제브 사후 바하두르 샤 1세가 제위에 오른 1707년에서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샤 2세가 영국군에 의해 강제퇴위 당한 1857년까지 150년간 무굴제국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마지막 무굴의 영토는 델리 부근의 소국에 지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내리막길의 시작과 끝의 황제 이름이 같다. 바하두르 샤(Bahadur Shah)는 무굴제국의 쇠망을 상징한다. 건국자 바부르에서 6대 아우랑제브까지 180년간에 황제의 평균 재임기간은 30년이었고, 악바르와 아우랑제브는 49년을 재위했다. 영리하고 탁월한 지도력을 가진 군주들이 오랫동안 통치했기 때문에 나라는 안정을 이루고 번영했다. 16~17세기 여섯 황제가 대를 이으며 무굴제국은 세계 초강대국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그 이후 150년간 13명의 황제가 등장했다. 평균 재위기간은 11.5, 1년도 황금의자에 앉지 못한채 쫓겨난 황제도 4명이나 되었다. 극심한 혼란기엔 두달, 세달만에 황제가 바뀌었다. 후반기 황제들은 전반기와 달리 힘이 없었다. 페르시아, 마라타, 아프가니스탄, 영국의 침략 또는 보호를 받으며 황제들은 생존했다. 당장 망할 것 같았던 제국이 150년을 버틴 것을 그나마 행운이라 해야 할 것이다.

 

아우랑제브 황제 재위기인 1700년의 무굴제국 최대영토 /위키피디아
아우랑제브 황제 재위기인 1700년의 무굴제국 최대영토 /위키피디아

 

쇠락의 씨앗은 아우랑제브 때 뿌려졌다. 악바르 황제가 시행한 비이슬람 관용주의를 아우랑제브는 무산시켰다. 아우랑제브는 주류 종교인 힌두교도에게 세금을 중과하고 힌두 사원을 파괴했다. 힌두 부족과 시크교도들이 반발하며 저항했고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장기간 전쟁을 수행함에 따라 프랑스 세수의 열배나 되던 국고가 고갈되었다. 병사들 봉급도 주지 못할 상황, 그것은 멸망의 신호였다.

무굴 황실은 장자승계의 원칙이 없었다. 자신이 아버지를 감금하고 황제가 된 것처럼 아우랑제브의 세 아들 모두 일찍부터 반란을 일으켰다. 아우랑제브가 89세에 사망하기 앞서 두 아들이 먼저 죽고, 마지막까지 살아 남은 무아잠 왕자가 황제에 올랐다. 그가 바하두르 샤 1(Bahadur Shah I). 아버지가 장수하는 바람에 아들이 황제가 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63세였다.

그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다. 우선 아버지의 정책을 뒤집어 힌두교 등 비이슬람에 대한 관용정책을 다시 도입하고, 힌두 왕국인 마라타와 라지푸트들과 화해하려 했다. 하지만 선왕이 추구했던 이슬람 제일주의에 심사가 뒤틀린 힌두 왕국들이 복종을 거부했다. 힌두 소국들은 무굴제국이 휘청이는 낌새를 차린 것이다.

바하두르 샤는 자비를 받아들이지 않는 제후국에 대해 가차없이 징벌을 가했다. 암베르(Amber), 조드푸르(Jodhpur), 우다이푸르(Udaipur)와 같은 라지푸트 국가들은 합병을 했다. 아직도 무굴은 소국들이 저항하기에 버거울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다.

펀잡의 시크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손수 병력을 이끌고 라호르로 진군했다. 하지만 그는 펀잡에서 병을 얻었다. 병은 급속하게 악화되었고, 17122월 바하두르 샤 1세는 사망했다. 아버지에게 네 번이나 반란을 일으키며 황제가 되려 했던 그는 4년밖에 재위하지 못한채 꿈을 포기해야 했다.

 

바하두르 샤 /위키피디아
바하두르 샤 /위키피디아

 

바하두르 샤가 죽고 왕자의 난이 벌어져 자한다르 샤(Jahandar Shah)가 승리했다. 그는 세명의 형제들을 죽이고 50살의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자한다르는 노는 것을 좋아 했다. 그는 황실 어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랄쿤와르(Lal Kunwar)라는 무용수를 후궁으로 받아 궁궐을 유흥과 오락의 장으로 만들었다. 자한다르는 술에 취해 살았다. 황제가 궁궐 밖에서 밤늦도록 술을 마시다 마차꾼의 집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런데도 아무도 몰랐다. 그는 연못에서 랄쿤와르와 벌거벗고 나흘간 목욕재개하고, 아들을 낳아달라고 빌기도 했다. 무슬림 국가에서 힌두 방식을 따른 것이다.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를 이용한 세력이 나타났다.

자한다르 샤는 11개월만에 조카 파루크시야르(Farrukhsiyar)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파루크시야르는 자한다르의 이복동생 아짐 샨의 아들로, 자한다르의 계승과정에서 아버지와 형을 동시에 잃었다. 그는 그 원한을 갚았다. 그는 큰 아버지 자한다르 샤와 애첩을 죽여 시내에 내걸었다.

 

자한다르 샤가 좋아한 무희 랄쿤와르 /위키피디아
자한다르 샤가 좋아한 무희 랄쿤와르 /위키피디아

 

파루크시야르 뒤에는 사이드(Sayyid)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 형 사이드 하산 알리 칸과 동생 사이드 후세인 알리 칸은 아우랑제브 황제 휘하의 무관이었던 사이드 압둘라 칸의 두 아들이다. 형 하산 알리 칸은 아버지의 이름 압둘라를 이어받았다. 형은 1698년 아우랑제브의 명을 받고 마라타동맹 세력의 확장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인도 중서부의 칸데쉬 일대를 통치했다. 동생도 아우랑제브의 신임 하에서 북서부 라자스탄 일대를 영지로 받았다. 사이드 형제는 파루크시야르의 쿠데타에 병력을 동원했다.

파루크시야르를 만나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가 미남이라고 기록한다. 하지만 황제는 귀가 얇았고, 판단력이 떨어졌다. 쿠데타에 성공하자, 황제의 측근들은 사이드 형제를 멀리하라고 귀뜸했다.

황위에 오른후 파루크시야르는 사이드 형제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가지웃딘 칸을 재상으로 삼을 작정이었다. 형 압둘라(하산)는 자신이 재상이 되겠다고 했다. 황제는 이미 약속한 사람이 있다면서 섭정 자리를 주겠다고 했으나 압둘라가 우격다짐을 벌이는 바람에 마지못해 재상 자리를 그에게 주었다. 이때부터 형은 재상에 동생 후세인은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어 사이드 형제가 권력을 장악했다.

 

파루크시야르 황제 /위키피디아
파루크시야르 황제 /위키피디아

 

파루크시야르 재위 기간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데칸 고원에는 마라타연맹이 세력을 확대했고, 북인도에 시크 반란이 거세졌다. 힌두국 말와에는 아짓 싱이 독립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압둘라 칸이 진압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사이드 형제에 반대하는 귀족들은 아짓 싱에 편지를 보내 압둘라를 패퇴시킬 것을 응원했으나, 압둘라의 승리로 끝났다.

파푸크시야르는 국익이란 개념이 없었다. 영국 의사 윌리엄 해밀턴이 자신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는 이유로 영국 동인도 회사가 벵갈지방에서 관세 없이 무역을 할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황제는 연간 2,000루피의 돈만 바치면 무제한의 무역권을 주었는데, 벵갈지역 토착상인들에겐 역차별이었다.

파루크시야르는 권력자들을 열악한 지방으로 발령내는 방법으로 권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사이드 형제, 아짓 싱이 그렇게 해서 지방 총독으로 부임했다. 황제의 인사조치에 불만을 품은 그들은 하나로 연합했다. 사이드형제, 아짓 싱은 17192월 군대를 이끌고 델리의 왕궁 붉은 요새(Red Fort)을 공격했다.

하룻밤의 전투로 왕궁은 함락되었다. 파루크시야르는 어머니와 후궁들과 함께 하렘에 숨어있다가 잡혀왔다. 황제는 궁인들이 보는 앞에서 끌려 와 구타를 당했다. 반란자들은 파루크시야르의 눈을 바늘러 찔러 실명시킨 후 목을 졸라 죽여버렸다. 무굴 황제의 위엄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파루크시야르는 6년만에 권신들에 의해 황위를 박탈당했다.

이제 세상은 사이드 형제의 것이 되었다. 사이드 형제는 파루크시야르의 후임으로 그의 사촌인 라피 웃 다라자트(Rafi ud-Darajat)를 황제 자리에 올렸다. 새 황제는 건강이 나빠 98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다라자트의 형 샤자한 2(Shah Jahan II)를 올렸으나 그도 105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1년 사이에 황제가 세 번 교체되었다. 세 번째는 바하두르 셔 1세의 손자 무하마드 샤(Muhammad Shah)였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Mughal Empire

Wikipedia, Bahadur Shah I

Wikipedia, Lal Kunwar

Wikipedia, Farrukhsiyar

무굴황제, 이옥순, 2018, 틀을깨는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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