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제국 멸망기②…페르시아의 약탈
무굴제국 멸망기②…페르시아의 약탈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1.16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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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라바드 독립, 마라타 세력 확대, 나디르 샤의 침공으로 기력 상실

 

무굴제국의 13대 무하마드 샤는 권신 사이드 형제가 세 번째로 선택한 황제였다. 1719년 제위에 올랐을 때 나이가 17세였다. 놀기 좋아하고 어리석고 귀가 얇은 어린 황제는 사이드 형제의 꼭두각시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사이드 형제는 심사가 뒤틀리면 사냥 나간 황제를 귀환시킬 정도로 오만방자했다.

사이드 형제의 최대 적은 그들 자신이었다. 형제의 악행은 많은 적을 낳았고, 황제는 사이드 형제의 정적들과 손잡고 그들을 함정에 몰아 넣어 죽여버렸다. 172010월에는 동생인 후세인 알리 칸이 황제가 보낸 군사에게 암살당했고, 위기감을 느낀 형 압둘라가 무함마드 이브라힘을 황제로 내세우고 반란을 일으켰다. 궁정대신 아사프 자흐(Asaf Jah)가 군대를 이끌고 압둘라를 제압했다.

 

무하마드 샤 /위키피디아
무하마드 샤 /위키피디아

 

사이드 형제는 제거되었으나, 새로운 궁정귀족들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파벌싸움을 일삼았다. 무하마드 샤는 아사프 자흐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황제는 문고리권력에 의지해 살았다. 그는 젖을 함께 먹고 자란 보모의 딸, 장사치 친구, 가정교사를 옆에 두고 그들이 귓속말로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사프는 무하마드 샤에게 악바르 황제처럼 신중하고 아우랑제브 황제처럼 용감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무하마드 샤는 그런 말을 듣기 싫어했다. 그는 점점 아사프를 멀리하게 되고, 아사프도 더 이상 델리의 궁정에 머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1723년 자신이 총독으로 있던 데칸고원으로 돌아가 버렸다.

아사프가 비운 데칸의 총독 자리에 무바리즈 칸이 차지하고 있었다. 황제는 데칸 총독에게 아사프를 죽이라고 지령을 내렸다. 아사프 자흐는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장군들을 끌어모아 무바리즈 칸을 몰아냈다.

1725년 아사프 자흐는 스스로 니잠(Nizam)이란 지위에 오르고, 하이데라바드(Hyderabad)라는 준독립국을 선포했다. 하이데라바드는 무굴제국을 종주국으로 인정하는 일종의 자치국이다. 중화권의 제후국과 비슷하고, 유럽 신성로마제국의 공작령에 해당한다. 무하마드 샤 입장에서 데칸고원 중앙부가 통치권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힌두연맹인 마라타 왕국이 세력을 넓히는 상황에서 울며겨자먹기로 아사프 자흐의 하이데라바드를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이데라바드는 영국식민지 시절에도 준독립적 지위(princely state)를 유지했다. 1947년 인도 독립후에도 독립국을 유지하려다 인도군의 공격을 받아 주로 격하되었다. 영토 넓이는 21.4로 남북한을 합친 면적보다 넓었다.

하이데라바드의 분리는 여타 지방 총독들의 독립 의지를 충동질했다. 총독 입장에선 세금을 황제에 상납하기보다는 현지에서 독식하고, 군대를 마음껏 운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도에서 가장 농업 생산력이 높은 벵갈, 오드의 총독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자신들의 영역을 구획했다.

 

하이데라바드 위치 /위키피디아
하이데라바드 위치 /위키피디아

 

이들 총독은 무슬림이어서 형식적으로는 무굴제국의 종주권은 인정했다. 그에 비해 힌두교도, 시크교도들은 무굴제국에 명백하게 반란을 선언했다. 독립적인 총독과 이교도 반란군은 서로 제휴하며 무굴제국을 압박했다. 하이데라바드의 아사프 자흐는 마라타 동맹으로 하여금 구자라트, 말와를 침공하도록 종용함으로써 황제의 압력을 약화시키려 시도했다.

힌두 세력인 마라타의 확장은 위협적이었다. 1728년 마라타의 바지라오 1세는 북상해 말와 지방을 다시 공격했다. 무굴 대군은 암즈헤라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와 지방은 마라타군에 짓밟혔다. 1737년에 무굴 제국과 마라타 동맹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말와를 넘겨주었다. 바지라오 1세는 수도 델리까지 쳐들어갔으나 무굴 정예군이 완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함락하는데 실패하고 돌아갔다.

펀잡의 시크교 신자들도 무굴 제국 약화를 노려 공격을 가했다. 시크 전사들은 게릴라 전술을 사용해 치고빠지면서 무굴 군대를 공격했고 지방군벌화한 아짓 싱이 세력을 규합해 무함마드 샤에 대항했다. 무굴 황제의 명령이 통하는 지역은 전성기의 절반도 되지 못했다.

 

업친데 덥친 격으로 외적이 쳐들어왔으니, 페르시아였다. 나디르 샤(Nader Shah)는 페르시아 서부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정복 군주로, 수백년 역사의 사파비드 왕조를 무너뜨리고 아프샤리드 왕조를 세웠다. 나디르 샤는 칸다하르를 점령하고 무굴제국의 영토를 넘보았다.

17385월 나디르 샤는 무굴제국의 영토인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고 6뤌에 카불을 함락했다. 이어 카이베르 고개를 넘어 페샤와르를 함락했다. 해를 넘겨 17391월 펀잡의 중심도시 라호르가 나디르 샤의 수중에 떨어졌다. 무굴제국의 수도 델 리가 위험한 상태에 처했다.

무굴 황제 무하마드 샤가 직접 10만 병역을 긁어 모아 페르시아군을 기다렸다. 나디르 샤의 군대는 55,000. 침략군은 신드와 구자라트를 약탈하며 델리로 접근했다. 224일 양측 군대는 카르날에서 대치했다. 전투는 쉽게 끝나버렸다. 병력수로 두배가 넘는 무굴군은 3시간만에 페르시아군에 참패했다.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와 무굴제국의 무하마드 샤의 회담 그림 /위키피디아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와 무굴제국의 무하마드 샤의 회담 그림 /위키피디아

 

카르날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무함마드 샤는 전투 의욕을 잃었다. 그는 나디르 샤와 담판을 통해 전쟁을 평화적으로 마무리하겠다고 생각했다. 장군과 대신들 사이에 주화파와 주전파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군총사령관 칸 도란은 무하마드 샤에게 나디르 샤와 만나지 말라고 간언하고, 전투에 나가 전사했다. 하지만 무하마드 샤는 나디르를 만났다. 담판에서 무굴의 샤는 페르시아의 샤에게 항복을 하고 수도 델리의 성문 열쇠도 넘겨 주었다.

두 군주가 나란히 델리에 입성했다. 겉으론 평화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곧이어 굶주린 늑대들이 본성을 드러냈다. 페르시아는 정복자임을 과시하며 나디르 샤의 얼굴이 새겨진 주화를 찍어 유통시켰다. 그리고 무굴제국의 금은보화를 남김없이 찾아내 빼앗았다. 약탈한 재물은 페르시아로 운반되었다.

나디르 샤는 3개월간 델리에 주둔했다. 그 기간은 무법천지나 다름 없었다. 무굴황제는 눈뜬 장님이나 다름 없었다. 세계 최대부국이었던 무굴제국의 창고에는 200년간 모으고 쌓아두었던 보물이 가득차 있었다. 칼을 든 강도들은 백주에 보물창고를 털어갔다. 승자의 전리품이었다. 무굴의 역사가 수두나르 사르카르는 약탈물의 목록을 적어두었다. 금화와 은화 3억 루피, 보석 25천만 루피, 샤자한 황제 때 만든 공작 왕좌를 포함해 9개의 의자 9천만 루피 상당. 모두 합치면 어림잡아 7억 루피에 이르렀다. 당대의 가격이므로 현대의 가치로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천문학적인 금액임은 분명하다. 특히 역대 무굴황제가 아끼던 다이아몬드 코이누르(Koh-i-Noor)도 빼앗아갔다.

페르시아 군대에 필요한 코끼리, 말도 가져갔다. 그것도 모자라 무함마드 샤는 자신의 딸을 나디르 샤의 막내아들에게 바쳐야 했다. 나디르 샤는 무굴제국에서 얼마나 털어갔는지, 그가 돌아가서 3년동안 페르시아 백성들에게 세금을 면제했다고 한다. 3년뒤에 다시 세금을 지우하자 사방에 불만티 터져나와 반란이 일어났고, 나디르 샤는 반란자의 하나인 쿠르드족에게 살해되었다.

 

나디르 샤가 델리 주민들의 폭동으로 죽은 페르시아 군대를 둘러보는 그림 /위키피디아
나디르 샤가 델리 주민들의 폭동으로 죽은 페르시아 군대를 둘러보는 그림 /위키피디아

 

어쨌든 나디르 샤의 약탈에 무하마드 샤와 궁정대신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렇지만 무지렁이들은 참지 못했다. 델리의 주민들은 거리로 뛰쳐 나와 페르시아 군인 3천명을 죽여버렸다. 나디르는 페르시아 병사들이 죽은 모습을 둘러보고 분노했다. 그는 델리 주민을 무차별 학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1739322일 하루동안에 수도 델리에서 2만명의 백성들이 처참하게 학살되었다. 나디르 샤는 왕궁 앞 이슬람 사원 옥상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 보았다.

페르시아의 폭군은 더 이상 약탈할 것이 없게 되자 철수했다. 3개월만이다. 그는 칭기스칸이나 티무르를 선망했지만, 그보다 더 강한 오스만투르크가 견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돌아갔다.

 

페르시아의 참략을 겪은 후 무굴제국은 더 이상 재기할 기력을 상실했다. 화려했던 제국의 수도는 황폐해졌고, 웅대했던 무굴황제의 권위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페르시아의 침공이 있은후 무하마드 샤는 9년을 더 살아 나디르 샤가 죽는 것도 지켜 보았다. 하지만 나라 꼴은 갈수록 피폐해 갔다. 무굴제국의 발상지인 아프가니스탄에는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페르시아에서 독립해 새 왕조를 세우고, 17482월 만만한 무굴제국을 쳐들어왔다. 썩어도 준치라고, 무굴은 두라니의 침공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그 전투에서 무하마드 샤가 총애하는 무함마드 파질이 전사했다. 무하마드 샤는 그 소식을 듣고 슬퍼하다가 세상과 이별했다. 45세의 젊은 나이였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Muhammad Shah

Wikipedia, Nader Shah

Wikipedia, Nader Shah's invasion of India

무굴황제, 이옥순, 2018, 틀을깨는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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