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빈전투가 가른 영국과 프랑스의 운명
부빈전투가 가른 영국과 프랑스의 운명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1.22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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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국민국가로서 결속력 강화…영국은 대헌장 체결, 시민권 확대

 

1214727, 지금 프랑스 북부 국경마을 부빈(Bouvines)에서 프랑스왕 필리프 2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4, 영국왕 존, 플랑드르 백작 페랑 등이 이끄는 다국적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전투는 작은 규모였지만, 이후 승자와 패자의 운명이 크게 엇갈렸다. 이 전투 이후 프랑스에선 왕권이 강화되어 강력한 국가가 형성된 반면에 영국에선 시민계급의 저항이 강화되고 왕권이 약화되었다.

전투에서 플랑드르 백작 등은 포로가 되었다. 영국의 존 왕은 노르망디를 비롯해 영국내 영지를 대부분 잃었고, 후세에 실지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영국에선 존(John)이란 이름은 수치의 상징이 되었고, 국왕 이름이 더 이상 붙지 않았다.

이 전투에 승리함으로써 프랑스왕 필리프 2(Philip II)는 카페왕조의 권위를 내외에 인식시켰다. 중갑기병이 전투의 성패를 결정지은 전투에서 프랑스의 여러 자치도시에서 시민병이 프랑스군에 참가했다. 게다가 이 전투는 프랑스내 영국 영토를 완전히 불식시켜 프랑스를 완성시킨 전투라는 평가를 들었다.

 

1214년 부빈전투의 전투도 /위키피디아
1214년 부빈전투의 전투도 /위키피디아

 

프랑스 필리프 2세는 교회와 부르주아의 지지를 받았다. 부르주아들은 2만명의 시민군을 구성해 외국 침략자를 격파했다. 전투는 시민의 승리였고, 그 공을 필리프가 먹었다. 시민들은 도처에서 춤을 추고, 성직자들은 노래를 불렀다. 교회는 화려한 테피스트리를 내걸었다. 파리의 학생들은 7일간 밤과 낮으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왕은 반역자까지 사면령을 내렸다. 프랑스 국가라는 개념이 이렇게 해서 생겼다.

 

영국왕 존은 부빈전투에서 패함으로써 프랑스내 영토를 회복하려던 소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영국은 전쟁에도 지고, 엄청난 빚더미에 올랐다.

영국의 귀족과 시민들은 왕에게 등을 돌렸다. 귀족들이 런던 시민의 지지를 얻어 템스 강변의 러니미드에서 대헌장(Magna Carta)을 작성했다. 대헌장에는 관습을 확인하고, 교회의 자유, 봉건적 부담의 제한, 재판 및 법률, 도시특권의 확인, 지방관리의 직권남용 방지, 사냥, 당면한 애로사항의 처리 등의 내용이 담겼다. 귀족들은 국왕에게 서명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1215615, 후에 존 왕은 템스 강변의 역사적인 장소 러니미드에서 마그나카르타의 63개 조항들에 동의할 것을 약속하며 이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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