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군 혼쭐낸 인도 마이소르 로켓
영국군 혼쭐낸 인도 마이소르 로켓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1.26 13: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이소르, 우수한 로켓으로 영국에 끈질기게 저항…영국, 콘그리브 로켓 개발

 

마이소르(Mysore) 왕국은 인도 남서부에 있던 나라로, 그 뿌리는 13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도 남부의 패권국이었던 비자야나가르 제국의 제후국에서 출발했으며, 중간에 짧은 기간 이슬람 왕조가 들어선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힌두 성향의 와디야르(Wadiyar) 왕조가 통치했다. 마이소르를 수도로 삼았기 때문에 마이소르 왕국이라 불렀다.

무국제국 시대에 무굴을 종주국으로 받들었으나 지방정권으로서의 자리매김에 흔들림이 없었다. 1861년 무굴제국에서 낮은 직급의 장군으로 있던 하이데르 알리(Hyder Ali)가 마이소르의 왕위를 찬탈했다. 그는 술탄이 되어 마이소르를 이슬람국가로 전환했다.

마이소르는 오스만투르크, 페르시아, 오만 등 이슬람국들과 친선관계를 맺으며 영국에 맞섰다. 하지만 힌두 세력인 마라타 제국과 두 차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마이소르-마라타 전쟁)

영국은 마이소르가 눈에 가시였다. 마이소르의 술탄은 영국의 경쟁국인 프랑스를 끌어들였으며, 프랑스 혁명에 관심을 갖는 계몽군주를 자처했다. 마이소르의 반영정책으로, 영국은 마이소르를 인도에서 가장 위험한 적으로 간주했다.

1766년부터 1799년까지 33년간 동안에 마이소르는 영국과 무려 네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1차 영국-마이소르전쟁(1766~1769), 2차 전쟁(1780~1784), 3차 전쟁(1789~1792), 4차 전쟁(1798~1799)을 거쳐 마이소르는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마이소르 왕국 /위키피디아
마이소르 왕국 /위키피디아

 

당대 세계 최강이라던 영국이 인도 남부의 지방정권에 이토록 고전한 것은 마이소르가 당대 세계 최고급 로켓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마이소르 로켓은 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 중 폴리우르 전투(1780)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영국군 전방에 로켓이 떨어져 선봉대가 전진을 하지 못했다. 그 틈에 마이소르 기병대가 덥쳐 영국군은 포위되어 퇴각해야 했다. 당시 최첨단 무기로 장착한 영국군이 남아시아의 토착군에게 무기력하게 당한 것이다.

하이데르 알리는 일자무식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선진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는 남다른 식견이 있었다. 로켓 기술은 중국에서 개발되어 유럽과 인도에 알려져 있었는데, 하이데르 알 리가 기술자들에게 로켓의 고도화를 추진해 성공한 것이다.

하이데르 알리는 또 일찍이 해군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하이데르는 해안에 항구를 건설하고 40여척의 함대를 갖추었다. 마이소르의 전함은 인도양의 섬나라 몰디브를 복속시키기도 했다. 하이데르 알리와 그의 아들 티푸 술탄은 해외 무역을 중시했고, 인도 무역을 독점하려는 동인도회사와 갈등을 키웠다.

마이소르 로켓의 위력은 대단했다. 로켓이 있었기에 마이소르는 마라타와의 전쟁도 승리해 영토를 크리쉬나강까지 확장함으로써 기세가 등등했다. 전선을 이끈 티푸 술탄은 마라타제국을 제압하기 위해 행군하던 도중 5만 대군의 영국군을 격파했다. 티푸의 군대는 17822월 있은 전투에서도 영국군을 대파했고, 주요 장군들을 포로로 획득하는 등 공을 세웠다.

하이데르 알리는 178212월 급성종양으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 티푸 술탄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영국과 마이소르는 1784년 망갈로 조약을 맺어 2차 전쟁을 중지하고 휴전상태로 전환했다.

 

마이소르 로켓에 쓰러지는 영국 동인도회사군 /위키피디아
마이소르 로켓에 쓰러지는 영국 동인도회사군 /위키피디아

 

마이소르 로켓은 대개 지름 20cm의 철제 통에 추진체와 검은 화약을 넣고 적진을 향해 쏘아 올리는 무기였다. 작은 것은 지름 3.8~7.6cm짜리도 있었다. 날아간 거리는 2km쯤 되었다. 이 로켓을 1m 길이의 대나무 끝에 설치했다. 심지에 불을 붙이면 철제 통 안에 있던 화약이 폭발해 추진체가 날아간다. 당시 유럽에도 로켓이 있었는데, 발사체를 철제로 만들지 못했고, 사거리가 마이소르의 것에 미치지 못했다. 영국은 이 전투에서 패전한 후에 마이소르 로켓 기술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왕위를 계승한 티푸 술탄은 다음 전쟁을 위해 로켓부대를 확장했다. 1789년에 일어난 3차 전쟁에서는 마이소르가 2개의 로켓부대를 운용했다. 하나에는 120, 다른 하나에는 131명의 병사가 배치되었다.

3차 전쟁은 프랑스의 지원이 약속되어 있었으나, 프랑스 혁명(1789)이 일어나는 바람에 프랑스는 참전하지 못했다. 마이소르 육군엔 로켓이 있었지만, 해군은 영국을 이길수 없었다. 마이소르는 남부지역을 영국에 할양하고 티푸 술탄의 두 아들을 영국에 인질로 보내는 조건에 합의하고 전쟁을 종결했다.

 

마이소르 로켓 점화 모습 /위키피디아
마이소르 로켓 점화 모습 /위키피디아

 

티푸 술탄은 끝까지 영국에 저항할 것을 결심했고, 새로 부임한 영국 총독은 마이소르를 완전히 제압할 계획을 세웠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점령한후 인도를 넘보았다. 영국은 마이소르가 프랑스와 제휴하기 가장 유력한 나라로 꼽았다. 영국은 마이소르를 제압할 필요성이 있었고, 티푸 술탄도 영국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영국은 선전포고도 없이 티푸 술탄의 마이소르를 공격했다. 전투는 치열했다. 하이데라바드와 마라타는 영국에 붙었다. 영국은 인도의 여러 나라들을 이간질시켜 반영국가를 제압하는데 활용했다. 역으로 인도의 분열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는데 이용되었다.

마지막 전투는 세링가파탐 요새에서 전개되었다. 영국과 인도 동맹군의 숫자는 5만명. 그들은 179945일부터 54일까지 한달간 요새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마이소르의 군대는 3만명이었다. 마이소르는 로켓으로 적의 진입을 저지했다.

52일 영국군은 마이소르군의 로켓과 머스켓 총의 화약이 보관된 탄약고를 폭파시켰다. 하늘엔 검은 연기가 올라갔다. 54일 영국군은 요새에 진입했다. 마이소르 병사들은 최후의 결전을 펼쳤지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영국군은 티푸 술탄을 찾았다. 어느 수로의 터널에서 술탄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티푸는 병사들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영국은 드디어 30년간의 전쟁을 끝내고 마이소르를 왕자령(princely state)으로 만들었다. 내정은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일종의 보호국 형태다. 다만 마이소르의 왕은 하이데르 알리가 집권하기 이전의 와디야르(Wadiyar) 왕조에서 인물을 선택해 괴뢰 정권으로 활용했다.

 

티푸 술탄의 죽음을 확인한 영국군 /위키피디아
티푸 술탄의 죽음을 확인한 영국군 /위키피디아

 

영국은 마이소르를 점령한 후 수백발의 로켓을 본국으로 가져다 개발작업을 벌였다. 1808년 영국의 발명가 윌리엄 콘그리브(William Congreve) 경은 마이소르 로켓을 모방해 콘그리브 로켓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콘그리브 로켓은 나폴레옹 전쟁과 영미 전쟁에서 사용되었다. 1814년 영미전쟁에서 영국은 미국의 머켄리 요새 공격에도 이 로켓을 사용했다. 미국 국가 가사에 "로켓의 붉은 섬광, 하늘에서 터지는 폭탄"이라는 구절은 작곡자 프랜시스 스콧 키가 이날 전투에서 콘그리브 로켓의 섬광이 밤하늘을 가르는 광경에 영감을 받아 쓴 것이다.

영국은 1824년 버마 전쟁, 1839년 중국 청나라와 아편전쟁에서도 이 로켓을 사용했다. 이 로켓은 러시아 로켓의 뿌리가 되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Mysorean rockets

Wikipedia, Kingdom of Mysore

Wikipedia, Siege of Seringapatam (1799)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