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칸고원의 사라진 왕국 하이데라바드
데칸고원의 사라진 왕국 하이데라바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1.27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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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년 무굴제국에서 독립, 영국지배 시절에 자치국, 인도 독립후 무장해제

 

인도 데칸고원에 하이데라바드(Hyderabad)라는 왕국이 있었다. 1724년부터 1857년까지 133년간 존속하다가 영국의 보호령으로 떨어졌는데, 영국 지배하에서도 국왕(니잠)이 내정을 맡아 통치했다. 1947년에 인도와는 별도의 독립국임을 선포했다가 인도 정부가 무력으로 제압하는 바람에 연방에 편입되었으며,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1948년에 해체되었다. 무굴제국, 대영제국, 인도연방을 합치면 224년이나 수명을 이어간 것이다.

 

하이데라바드의 출발은 무굴제국의 13대 황제 무하마드 샤(재위 1719~1748)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하마드 황제는 당시 세 번이나 황제를 갈아치며 권력을 주무르던 사이드 형제가 꼭두각시로 내세운 인물이었다. 제위에 올랐을 때 17세였다. 놀기 좋아하고 어리석고 귀가 얇은 어린 황제는 사이드 형제가 가지고 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사이드 형제의 악행은 많은 적을 낳았다. 사이드 형제의 정적들은 어린 황제를 앞세워 사이드 황제를 함정에 몰아 넣어 죽여버렸다. 172010월에 먼저 동생이 암살되었고, 위기감을 느낀 형 압둘라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을 제압한 사람이 궁정대신 아사프 자흐(Asaf Jah)였다.

아사프 자흐는 사이드 형제를 제거하는데 세운 공으로 재상이 되었다. 황제는 정무를 아사프 자흐에게 맡기고 측근과 친구들과 노는데 정신이 없었다. 아사프는 황제에게 정신차리고 나라 일에 신경 좀 쓰라고 타일렀지만, 무하마드 샤는 그런 말을 듣기 싫어했다. 황제는 아사프를 멀리하게 되었고, 아사프도 1723년 델리를 떠나 데칸고원으로 가 버렸다. 데칸고원은 과거에 그가 총독으로 있던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이듬해 아사프 자흐는 자신을 따르는 장군들을 끌어모아 데칸고원에서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 그는 왕의 칭호를 니잠(Nizam)이라 부르고, 나라 이름을 하이데라바드라고 했다.

하이데라바드는 무굴제국을 종주국으로 인정하는 일종의 자치국으로 출발했다. 중화권의 제후국과 비슷하고, 유럽 신성로마제국의 공작령에 해당한다. 무굴제국은 데칸고원 중앙부가 통치권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힌두연맹인 마라타 왕국이 세력을 넓히는 상황에서 울며겨자먹기로 아사프 자흐의 하이데라바드를 인정하게 되었다.

 

하이데라바드 왕국의 영토 /위키피디아
하이데라바드 왕국의 영토 /위키피디아

 

하이데라바드의 역대 니잠은 영국에 적극 협조했다. 하이데라바드 니잠국은 영국이 인도식민지 확장을 위해 벌인 전쟁에 늘 영국편을 섰다. 카르나디크 전쟁, 마이소르 전쟁, 마라타 전쟁, 세포이 항쟁에서 하이데라바드는 영국의 앞잡이 역할을 했다. 영국은 인도 지배 과정에서 도움을 준 하이데라바드에 자치권을 부여했다. 1798년 하이데라바드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인도에서 최초의 왕자령(princely state)이 되었다. 면적은 21.2, 남북한을 합친 면적보다 넓었다. 영국인들은 하이데라바드의 니잠에 대해 위대하고 경애하는”(His Exalted Highness) 등등의 존칭을 붙였고, 니잠이 영국령 인도를 방문할 때 23발의 예포를 쏘았다.

하이데라바드 왕조는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 영국 국왕을 국가수반으로 모시고 7대를 이어갔다. 니잠국은 영국의 요구에 따라 1차 대전에 참전하고, 영국이 전쟁으로 어려울 때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영국에게는 보호국 중에서 가장 든든한 우방이었다.

 

1947815일 영국 의회가 인도 독립안을 가결하고, 인도와 파키스탄에게 인도의 주권을 넘겨주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기뻐했으나, 인도내 자치령들은 어찌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영국이 자기네들을 도와준 자치 왕국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 없었던 것이다. 영국이 철수하기 직전에 인도(파키스탄 포함)555개의 왕자령이 있었다. 왕자령은 인도대륙 면적의 48%, 인구의 28%를 차지했다.

왕자령 가운데 하이데라바드가 가장 크고 부유했다. 24,000명의 자체 군대를 보유했고, 예산을 따로 운영했으며, 철도와 통신, 우체국등 공공서비스를 갖추고 있었다. 국내에 라디오 방송과 항공사도 운영했다. 1937년 미국의 타임지는 하이데라바드의 니잠을 세계 최고 갑부로 소개하기도 했다. 1947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결혼식에 니잠은 다이어먼드가 박힌 왕관과 목걸이를 선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이데라바드의 마지막 니잠 미르 오스만 알리 칸(가운데)과 신하들(1911) /위키피디아
하이데라바드의 마지막 니잠 미르 오스만 알리 칸(가운데)과 신하들(1911) /위키피디아

 

1947년 독립하기 이전에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는 제헌의회가 각각 활동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소왕국과 토후국 들이 종교와 지리적 위치에 따라 인도와 파키스탄에 합병을 선언했다.

하지만 하이데라바드 왕국의 통치자 미르 오스만 알리 칸(Mir Osman Ali Khan)은 어느 나라에 붙어야 할지 발표를 하지 않았다. 왕족은 무슬림이고, 국민 대다수는 힌두교였다. 왕족 입장에서 파키스탄에 붙어야 했지만, 지리적으로 인도에 포위되어 있었다.

니잠은 일단 파키스탄에 손을 내밀었다. 파키스탄은 이슬람교가 다수인 동벵골 지역을 동파키스탄이라는 이름으로 합병할 것을 인정했지만, 데칸 고원 중부에 위치한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파키스탄의 본토와 상당히 떨어져 있고 힌두교도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파키스탄에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하이데바라드가 힌두교도가 중심인 인도와는 합병을 할수 없었다.

결국 니잠은 독립을 선택했다. 1947611, 하이데라바드는 인도와 파키스탄 어느쪽에도 참여치 않고 독립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이데라바드는 일단 인도와 파키스탄과 체결한 스탠드스틸 조약을 준수키로 했다. 스탠드스틸조약(standstill agreement)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 영국, 그리고 수많은 소왕국들이 맺은 것으로, 1년 동안 영국 통치 하의 권력구조를 유지하되, 외교권은 인도와 파키스탄이 갖기로 합의한 현상유지 조약이다. 일종의 휴전 조약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약정한 휴전 1년 동안에 건국 준비에 공을 들였다. 이 기간에 수많은 제후국들이 인도 또는 피키스탄으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하이데라바드엔 정규군 이외의 별도의 무장군이 출현했다. 국왕(니잠)을 지지하는 라자카르(Razakars)라는 이슬람 사병조직이 만들어져 인도와의 통합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사병 조직은 정규군 수와 맞먹는 2만명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사단이 벌어졌다. 하이데라바드가 파키스탄에 1,500만 파운드나 되는 거액의 자금을 빌려준 사실이 인도에 알려졌다.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는데, 그 돈은 파키스탄의 군비 확대에 사용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하이데라바드 정부가 왕국을 통과하는 인도 화물을 저지하고, 인근 봄베이주 등을 부추기는 움직임도 인도 정부에 포착되었다.

막 독립한 인도 정부 지도부에 강경파들이 등장했다. 인도의 동쪽과 서쪽의 파키스탄과 내부의 하이데라바드가 동시에 전쟁을 벌인다면, 인도는 곤경에 빠질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인도 독립의 지도자 자와할랄 네루의 생각도 하이데라바드의 분리주의 움직임을 저지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대화와 타협을 선호했다. 이에 비해 강경파들은 무력진압을 주장했다. 영국 제국주의에 대항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던 인도 독립세력들이 이젠 소왕국이 독립하려는 것을 막겠다고 나선 것이다.

 

1948년 9월 18일 하이데라바드군 사령관(오른쪽)이 인도군 사령관에게 항복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1948년 9월 18일 하이데라바드군 사령관(오른쪽)이 인도군 사령관에게 항복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4만명의 군대가 있다고는 했지만, 훈련받고 무장한 병력은 6,000명에 불과했다. 싸움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외교적 노력에 최선을 다했다.

먼저 영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하지만 영국정부는 인도와 파키스탄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만 할뿐, 과거의 우방국을 저버렸다. 유일하게 하이데라바드의 독립을 지지한 영국인은 실각한 윈스턴 처칠 등 보수세력 뿐이었다. 미국과 유엔 안보리를 찾아갔지만, 소용없었다.

 

1년간의 휴전기간이 끝났다. 먼저 공격한 것은 하이데라바드의 사병조직 라자카르였다. 194896일 라자카르의 한 부대가 인도군 초소를 공격했다.

아니나 다를까. 91335,000명의 인도군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이데라바드로 침공했다. 작전명은 폴로 작전(Operation Polo)이었다.

전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918일 오후 4시 하이데라바드의 총사령관이 인도군 총사령관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인도군 사망자 32, 하이데라바드 정규군 사망자 807, 사병조작 라자카르 사망자 1,373명이고, 부상자는 수천명에 이르렀다.

다음날인 919일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인도 정부에 강제 병합되었다. 인도 최대이자, 최후의 번국은 이렇게 소멸했다. 폴로 작전 이후 왕실을 제외한 정부와 군부의 요인들은 파키스탄으로 망명한다.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건국 224년만에, 7대에서 끝을 맺었다.

 

인도는 1949년 하이데라바드의 영토를 인도 연방에 가입시켰고 1950년 하이데라바드 주로 격하했다. 1956년 인도는 하이데라바드 주를 안드라프라데시(Andhra Pradesh) 주로 이름을 바꾸었고, 왕국의 이름은 고작 주도 하이데라바드에만 남겨 놓았다. 하이데라바드 시는 면적 625으로 서울보다 약간 넓고, 인구는 680만명 정도다.

2014년 인도 정부는 안드라프라데시 주의 북서부에 텔루구어 사용 지역을 텔랑가나(Telangana) 주를 분리했다. 하이데라바드시는 행정상 텔랑가나 주와 안드라프라데시 주의 공동 주도를 겸하고 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Nizam of Hyderabad

Wikipedia, Hyderabad State

Wikipedia, Annexation of Hyderab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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