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주동해비에 동해 쓰나미의 기록
척주동해비에 동해 쓰나미의 기록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2.01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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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항 육향산에 허목이 설치…고종황제, 천지에 고한 평수토찬비도

 

강원도 삼척시 삼척항으로 가는 길에 육향산(六香山)이라는 해발 25m의 야트마한 야산이 있다. 이 산은 원래 섬이었다. 삼척군지인 진주지에는 "예전에 죽관도(竹串島)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죽관도에 육향대(六香臺)라는 정자가 서 있었는데, 그후 삼척항을 만들면서 뭍으로 연결해 육향산이라 불렀다. 육향산 산 꼮대기에는 육향정(六香亭)이라는 정자와 함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와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 비석이 있다.

 

척주동해비 비각 /사진=박차영
척주동해비 비각 /사진=박차영

 

척주동해비에는 많은 사연이 있다. 이 비는 허목이 1661(현종 2)에 삼척부사로 부임해 쓰나미를 물리치기 위해 세웠다. 쓰나미는 일본에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비의 사연을 들어보면 동해에 쓰나미가 여러차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허목(許穆, 1595~1682)은 남인의 우두머리로, 현종 때 1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의 우두머리 송시열(宋時烈)과의 당파싸움에 밀려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그가 삼척부사로 부임했을 때 그 지방은 격심한 해파와 조수가 읍내에까지 밀려들어 강의 입구가 막히고 오십천이 범람해 백성들은 인명과 재산을 잃어버리는 큰 재앙에 시달리고 있었다. 백성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긴 허목은 평생 연구하고 깨달은 철학의 이치를 담아 동해바다를 예찬하는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그의 독특한 전서체(篆書體)에 담아 비를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척주동해비다.

비를 세운 이후 바다가 잠잠해지고, 아무리 심한 폭풍우에도 바닷물이 넘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에 삼척 사람들은 조수를 물리친 신비한 비석이라 하여 퇴조비(退潮碑)라 부르게 되었다. 척주동해비 비문은 효험이 있어 비문을 소장하면 재액이 없어진다고 소문이 났다. 많은 사람들이 비문의 탁본을 떠 집에 소장하거나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척주동해비(전면) /사진=박차영
척주동해비(전면) /사진=박차영

 

허목이 척주동해비를 만들어 세운 곳은 지금의 위치보다 바다쪽으로 더 떨어진 만리도(萬里島)였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고지도에는 만리도가 표기되어 있다. 만노봉(萬弩峰) 또는 정라도(汀羅島)로 표기되기도 했다. 이 모래섬은 삼척항 방파제 끝부분에 있었는데, 지금은 해류에 의해 사라지고 없다.

허목이 만리도에 비를 세운후 언젠가, 동해척주비는 풍랑으로 침몰해 바닷속에서 사라졌다. 일설에는 누군가 비석 탁본을 뜨러 부역을 갔다가 힘이 들어 비석을 깨뜨려 바다에 던져버렸다고 하는데, 만들어 낸 말인 것 같다. 조류에 의한 해식작용과 풍랑은 지금도 동해안 백사장을 계속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허목이 부사로 와서 만든 비는 풍랑작용으로 묻혔을 가능성이 보다 객관적이다.

비석이 파손되자 조수피해가 다시 일어나므로 1709(숙종 35)에 삼척부사로 부임한 홍만기(洪萬紀)가 사방으로 비문을 찾다가 허목의 문하생 한숙(韓塾)의 처소에서 원문을 구해 글자를 베껴 비에 새겨 넣었다. 이듬해인 1710(숙종 36) 삼척부사로 부임한 박내정(朴乃貞)이 지금의 육향산, 당시 죽관도(竹串島) 동쪽 기슭에 비각을 짓고 옮겨 세웠다.

그후 비석은 259년간 그 자리에 보존되어 오다가 비각의 위치가 음지라 훼손의 염려가 있어 1969126일 지방 유지들이 햇볕과 바람이 잘 드는 현재의 삼척시 정상동 육향산 산정으로 이전했다.

 

육향정 /사진=박차영
육향정 /사진=박차영

 

척주는 삼척의 옛이름이다. 신라에 합병된 실직국(悉直國)이 사직(史直), 삼척(三陟)으로 음운 변화를 일으켜 지명으로 살아남았으며, 그 삼척의 척()자에 주()가 붙어 조선시대 지방행정명으로 사용되었다. 척주동해비는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척주동해비의 글자체는 허목의 전서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글씨라고 하는데, 특히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독창적인 서체로 품격 있고 웅혼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한다.

 

대한평수토찬비 /사진=박차영
대한평수토찬비 /사진=박차영

 

척주동해비 아래에 평수토찬비(平水土贊碑)라는 또다른 비각이 있다. 이 비각은 허목이 동해비와 같이 세운 것으로 비문은 중국 고대 하()나라를 세운 우() 임금이 썼다는 전자비(篆字碑)에서 48자를 선택해 목판에 새겨 군청에 보관하던 것을 고종황제가 1904년에 칙사 강홍대(康洪大)와 삼척군수 정운석(鄭雲晳)로 하여금 석각(石刻)하도록 해 세운 것이다. 이 비각의 첫머리에 대한(大韓)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데, 1897년 고종이 황제를 칭하면서 바꾼 국호 대한제국(大韓帝國)이다.

그러면 고종이 왜 멀리 동해바닷가에서 대한제국의 위엄을 떨치려 했을까. 황제를 칭했다 함은 중국과 대등한 천자의 나리임을 의미한다. 고종은 중국의 우 임금이 나라를 세우고 천지신명에게 고했듯이, 천자의 나라가 되었음을 동해의 신에게 고하기 위해 이 비석을 세운 것이다. 이 비를 세운 직후에 을사늑약, 한일합방이 있었으니, 통탄할 일이다.

 

척주동해비(후면) /사진=박차영
척주동해비(후면) /사진=박차영

 

<< 척주동해비 비문(碑文) 풀이 >>

이 고을은 옛날 실직씨의 땅으로 예나라의 옛터 남쪽에 있으며, 서울에서 7백리이고 동쪽은 큰 바다에 닿았다. 도호부사 공암 허목 씀

큰 바다 끝없이 넓어/ 온갖 냇물 모여드니/ 그 큼이 무궁하여라/

동북쪽 사해(沙海)1)여서/ 밀물 썰물 없으므로/ 대택(大澤)이라 이름했네/

바닷물이 하늘에 닿아/ 출렁댐이 넓고도 아득하니/ 바다 동쪽에 구름이 끼었네/

밝고 밝은 양곡(暘谷)3)으로/ 태양의 문이라서/ 희백(羲伯)이 공손히/ 해를 맞이하네/

석목(析木)의 위차요/ 빈우(牝牛)의 궁()으로/ 해가 본시 돋는 동쪽의 끝이네/

교인(鮫人)의 보배와/ 바다에 잠긴 온갖 산물은/ 많기도 많아라/

기이한 만물이 변화하여/ 너울거리는 상서로움이/ 덕을 일으켜 보여주네/

조개 속에 든 진주는/ 달과 더불어 성하고 쇠하며/ 기운을 토하고 김을 올리네/

머리 아홉인 괴물 천오(天吳)8)/ 외발 달린 짐승 기()/ 태풍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네/

아침에 돋는 햇살/ 찬란하고 눈부시니/ 자주 빛 붉은 빛이 가득 넘치네/

보름날 둥실 뜬 달/하늘의 수경이 되니/뭇별이 광채를 감추네/

부상과 사화(沙華)/흑치(黑齒)와 마라(麻羅)/상투 튼 보가(?)/

연만의 굴과 조개/조와(爪蛙)의 원숭이/불제(佛齊)의 소들/

바다 밖 잡종으로/무리도 다르고 풍속도 다른데/ 한곳에서 함께 자라네/

옛 성왕의 덕화가 멀리 미치어/ 온갖 오랑캐들이 중역으로 왔으나/

멀다고 복종하지 않은 곳 없었네/

아아, 크고도 빛나도다/그 다스림 넓고 크나니/그 치적은 영원히 빛나리.

 

육향산 기슭의 삼척 영장과 관찰사 선정비 /사진=박차영
육향산 기슭의 삼척 영장과 관찰사 선정비 /사진=박차영
육향산 안내도 /박차영
육향산 안내도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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