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령 인도②…식민화의 첨병, 철도
영국령 인도②…식민화의 첨병, 철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2.06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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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로 내륙 연결…면화, 식량 등 원자재 수송하고, 영국산 상품 판매

 

19세기는 철도의 시대였다. 1825년 영국 스톡턴-달링턴 구간에 처음 건설된 이래, 철도가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자본이 철도에 대거 투자되는 바람에 투기붐이 일어났고, 미국과 러시아에 대륙철도 건설 바람이 일어났다. 인도 대륙을 갖게 된 영국은 이 보석을 가꾸기 위해 대대적으로 철도를 건설했다. 19세기말 인도에는 미국, 러시아, 캐나다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긴 철도가 놓여졌다.

동인도회사가 지배하던 시절에 영국은 해안의 항구 중심으로 인도에 접근했다. 영국인이 개척한 3대 거점 봄베이, 마드라스, 캘커타가 모두 해안 항구도시였다. 내륙에는 길이 불편했다. 건기에는 그나마 비포장도로를 걷든지, 동물에 짐을 싣고 갈수 있었다. 하지만 비가 오는 여름에는 물이 불어 내륙으로 접근하기 어려웠다. 우마차로 곡물을 실어나르는 한계는 하루 80km였다. 그 이상 이동하면 동물이 먹어치우는 사료의 양이 더 많아 운반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먼 곳에서 면화를 실어나르려면 먼지가 묻고 더러워져 봄베이까지 오면 상품성이 떨어졌다. 이런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한 최적의 신기술이 철도였다.

 

영국은 본국에서 실용화한 철도기술을 인도에 빠르게 적용했다. 인도에서 첫 철도건설이 논의된 것은 동인도회사 시절인 1832년이었다. 영국에서 철도가 놓인지 불과 7년후였다. 최초의 철도는 마드라스의 레드힐스부터 친타드리페트 다리까지 짧은 구간이었는데, 1836~1837년 사이에 증기기관차가 투입되었다. 동인도회사는 인도 철도건설을 위해 영국 민간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했다.

동인도회사가 해산되고, 영국이 지접 통치하면서 인도의 철도건설은 빠르게 진행되어 1860년에서 1880년 사이에 철도 총길이가 1,349km에서 25,495km20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 무렵에 봄베이와 마드라스, 캘커타, 델리를 연결하는 간선철도가 건설되었다.

1873년을 배경으로 하는 뷜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는 인도 대륙횡단철도가 완공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여행을 하다보니, 콜비~알리하바드의 80km 구간이 완공되지 않았다. 주인공은 하는수 없이 2,000파운드라는 거금을 들여 코끼리를 간신히 수배해 다음 정거장까지 갔다는 스토리가 전개된다. 이미 이 시기에 영국은 일부 난코스를 제외하고 인도 대륙 전역에 철도를 깔았던 것이다.

 

1909년 인도의 철도망 /위키피디아
1909년 인도의 철도망 /위키피디아

 

영국이 인도에 적극적으로 철도를 건설한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륙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용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면화, 식량과 같은 원자재를 손쉽게 취득하고 영국산 완제품을 인도인에게 판매하기 위한 상업용이었다.

인도 총독 달하우지 경은 1853년 동인도회사 이사회에 보낸 문서에서 인도 어느 곳이든 군사력을 집중시키는데 지금은 수개월이 걸리지만 철도가 놓이면 며칠이면 될 것이라고 썼다. 달하우지의 견해는 1857년 세포이 항쟁에서 입증되었다. 영국군은 철도를 이용해 반란군을 신속하게 진압했다.

철도는 식민지 경제를 본국의 하청구조로 떨어뜨리는데 기여했다. 인도의 면직업은 18세기까지 이전에 세계 최고였다. 하지만 철도 건설과 이에 따른 운송비 하락은 인도 산업화에 기여한 것이 아니라, 인도산업을 영국에 종속되도록 만들었다. 물레를 돌려 직물을 짜던 인도의 수공업 제품은 기계로 대량생산하는 영국산에 밀리게 되었다. 인도는 1차 농산물인 면화와 곡물과 공산품의 원료를 공급하고, 영국 공산품의 소비 시장으로 전락했다.

철도의 운송비용도 급격히 떨어졌다. 1830년대 초기 철도로 1톤을 1마일 실어나르는데 12센트의 비용이 들었지만, 1860년대엔 8센트, 1874년엔 2센트, 1990년엔 0.5센트로 급격히 하락했다.

전통 수공업이 몰락하면서 일자리를 잃은 전통 기능공들이 도시로 밀려들었다. 인도인들은 값싼 임금을 받으며 가혹한 노동에 종사해야 했다.

1853년 칼 마르크스는 영국은 인도에 이중의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하나는 파괴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흥시키는 것이다고 설파했다. 마르크스는 , 오래된 아시아 사회를 지우고, 아시아에 서양 사회의 물질적 기초를 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1855년 인도철도 /위키피디아
1855년 인도철도 /위키피디아

 

인도총독은 본국의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철도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5% 수익률을 보장했다. 적자가 나면 총독부가 갚은 조건이었다. 인도인의 인건비가 영국인의 4분의1 수준이었기 때문에 철도건설에 투입되는 비용이 저렴했다. 인도 총독이 좋은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에 영국 자본은 아낌없이 인도 철도에 투자했다.

가장 큰 회사는 GIPR(the Great Indian Peninsular Railway)EIR(East Indian Railway Company)였다. GIPR은 봄베이를 중심으로 했고, EIR은 캘커타를 근거지로 삼았다. 1870년 봄베이에서 출바한 GIPR의 철도와 캘커타에서 출발한 EIR의 철도가 만났다. 다음해엔 봄베이와 마드라스가 철도로 연결되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철도는 산업발전을 동반했다. 하지만 인도에선 철도가 산업발전을 이끌지 못했다. 영국이 본국산업 위주로 철도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철도 기관차와 부속품은 영국에서 제작되었다. 침목마저도 인도 목재를 쓰지 않고 발트해의 전나무를 썼다. 증기기관차의 에너지원인 석탄도 영국산을 썼다. 경영자, 기관사, 기술자는 모두 영국인이었고, 잡역부는 인도인에게 맡겼다. 철도회사의 복지제도는 영국인을 위한 것이었고, 인도인에겐 그 혜택이 조금도 돌아가지 않았다.

 

여객용 차량은 영국인과 인도인을 차별했다. 영국인들을 위해 1등칸이 별도로 운영되었고, 역 대합실에도 영국인 숙녀용이 별도로 마련되었다. 인도인은 3등칸을 탔고, 대합실도 제대로 없이 비바람을 맞아야 했다.

영국은 인도 지배를 위해 철도를 깔았다. 하지만 철도는 역으로 인도인의 차별의식을 강화했고, 인도인들 사이에선 민족주의가 불같이 일어났다. 간디는 베옷을 입고 염소젖을 마시며, 직접 물레를 돌려 실을 잣고 천을 짜면서 민중을 대변했다.

1947년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할 때 직할령에 42, 군주국(princely state)32개의 철도회사가 있었다. 인도는 이들 회사를 하나로 통합해 국영 인도철도공사(Indian Railways)를 만들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British Raj

Wikipedia, Rail transport in India

과학기술과 제국주의, 대니얼 R. 해드릭, 모티브북,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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