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령 인도③…수탈경제
영국령 인도③…수탈경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2.07 11:3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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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인도 면직산업, 영국산 섬유에 붕괴…농민의 이중 수탈

 

식민지를 겪은 나라들은 제국주의 본국이 경제적으로 약탈해 산업이 피폐해지고, 인민이 가난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인도도 그런 경우다.

17세기에 인도산 면직물은 유럽인들을 사로잡았다. 인도에는 면화가 풍부하게 생산되는데다 오랜 면직산업 역사와 우수한 기술, 인도인들의 솜씨 등이 가미되면서 양질의 옷감이 생산되어 영국에 밀려들었다. 캘리코(Calico)라 불리는 인도 면직물로 인해 영국 모직업이 고사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영국 의회는 부랴부랴 인도 면직물 수입을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켜야 했다.

인도의 면직업은 동인도회사가 지배하던 18세기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였다. 인도는 세계 옷감 수출시장의 25%를 차지했다. 인도 주재 영국 관리였던 헨리 파툴로는 1772년 보고서에서 경쟁국에서 동질의 제품을 만들지 않는한, 인도의 면직물 수요는 결코 감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의 전통 면직산업은 당시 세계 최고의 제품을 생산했고, 인도는 최대 면직물 수출국이었다. 그러던 인도의 면직물 산업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공장에서 만들어진 영국산 면직물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다.

인도 면직물의 사양화에 대해 경제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붙어 있다. 영국의 제국주의적 수탈이 원인이라는 견해와 인도 면직업이 산업혁명 이후 경쟁력을 잃었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영국의 경쟁국인 네덜란드 출신 윌리엄 볼츠는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인도 면직업을 죽이기 위해 면직업 종사자의 손가락을 잘랐다고 주장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경우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 일반화하기는 힘들다.

영국은 인도산 면직물의 수출을 억제하기 위해 70~80%의 관세를 물렸다. 관세로 인해 인도산 옷감 가격이 두배 가까이 상승하기 때문에 수출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 영국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값싼 면직물이 철도를 타고 인도 내륙으로 유입되었다. 인도인들도 값싼 영국산을 쓰게 되었고, 수공업에 의존하던 현지 면직산업은 적자에 허덕이다 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영국의 직접지배가 시작된 1858년 이전에 인도의 글로벌 제조업상품 수출 비중이 27%였으나, 독립하는 1947년에 2%로 급락했다. 90년 사이에 인도 제조업이 무너진 것이다. 붕괴된 산업은 면직업이었다.

 

역사적으로 추정한 각국의 세계GDP 기여도(Angus Maddison 산출) /위키피디아
역사적으로 추정한 각국의 세계GDP 기여도(Angus Maddison 산출) /위키피디아

 

영국 지배하의 인도 경제는 영국 제조업과 영국 자본, 영국 상인을 위한 것이었다. 인도는 영국 제조업에 필요한 원자재를 관세없이 수출하고, 영국 상품을 무관세로 수입했다.

인구 25천만(1881년 센서스)의 인도는 세계 최대시장이었다. 영국의 인도 지배 시기에 중국은 내란과 전쟁에 휩싸여 있었다. 인도의 마르크스 경제학자 우차 파트나이크(Utsa Patnaik)는 영국이 173년간(동인도회사 시기 포함) 인도에서 45조 달러의 수출이익을 빼앗아갔다고 주장했다.

영국 지배시기의 인도 성장률이 무굴제국 지배기보다 높았다는 견해가 있다. 영국 지배로 인해 인도에 단일시장이 형성되었으며, 물자와 상품의 시장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면직업이 해체되면서 쏟아져 나온 인력이 농촌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농민이 되었는데, 농업생산성이 오르지 않는한 농업인구의 과밀화로 빈곤의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요인이 되었다.

영국 지배하의 인도는 수시로 대기근에 시달렸다. 1860~1861년의 웃타르 프라데시에서 기근이 발생했고, 1865~66년의 오디샤, 벵갈, 비하르와 마드라스 기근에서는 200만명의 피해가 났다. 1868~1870년 웃타르 프라데시, 봄베이, 펀잡의 기근 때에더 140만명 이상이 죽었다. 1876~1878년에는 마드라스, 마이소르, 하이데라바드, 마하라슈드라, 서부 웃타르 프라데시, 펀듭 등지에 대기근이 휩쓸고 지나갔다. 이 기근은 가혹했다. 마하라슈드라에선 80만명이 죽었고, 마드라스에서는 거의 350만명이 죽었다. 마이소르에선 인구의 20%를 잃었고, 웃따르 프라데시에선 120만명이 죽었다. 그 외에도 1896~1897, 1899~1900년의 전국적 기근이 있었고, 독립직전인 1943년 벵갈에서 300만명이 기근으로 목숨을 잃었다.

 

1854년 준공한 갠지스 강 관계수로 운하 /위키피디아
1854년 준공한 갠지스 강 관계수로 운하 /위키피디아

 

식민당국은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관개사업을 벌였다. 하리드와르에서 카운포르(칸푸르)까지 560km의 운하를 뚫어 관개수로로 활용하고, 아삼 지역에선 정글을 개간해 160만 헥타르의 농경지를 조성해 식량생산을 늘렸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대기근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농민들은 이중 수탈에 시달렸다. 식민당국은 농업 소출의 50%를 세금을 약탈했고, 지주계급인 자민다르는 강제노동을 부과했다. 삶에 지친 농민들은 해외로 이주했다. 몸뚱이밖에 없는 인도인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노동력을 팔며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British Raj

Wikipedia, Economy of India under the British Ra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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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 이 2023-10-11 14:56:58
기사 잘봤습니다. 오타 하나만 고쳐주시길. 관계수로--> 관개수로(灌 漑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