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루엣에 비친 프랑스 혁명의 전조
실루엣에 비친 프랑스 혁명의 전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2.0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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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귀족에 과세하려다 특권층 반발에 8개월만에 실각…미술 명칭으로 남아

 

프랑스는 7년 전쟁(1756~1763)에 끼어들었다가 손해만 보았다. 인도에서 영국에 패해 철수하고 아프리카 세네갈도 내주었다. 영국의 제해권에 밀린 것이다. 육지에서도 큰 성과는 없어 프로이센이 실레지엔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 국왕 루이 15세는 육군과 해군을 재건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국방비 증액처럼 국가 예산이 드는 일은 없다. 재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7593월 루이 15세는 에티엔 드 실루엣(Étienne de Silhouette, 1709 ~ 1769)을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실루엣은 귀족 출신으로, 아버지가 부자였다. 그는 금융과 경제를 전공했는데 1년간 런던에서 유학하며 영국의 재정정책을 눈여겨 보았다.

실루엣(제인 오스틴) /위키피디아
실루엣(제인 오스틴) /위키피디아

 

실루엣은 루이 15세의 애첩인 퐁파두르 부인의 눈에 들었다. 퐁파두르는 국왕을 움직였기 때문에 궁궐에서 영향력이 높았다. 이 여인은 실루엣을 국왕에게 천거해 그가 재무장관이 되었다.

실루엣이 프랑스 곳간을 맡은 해에 세수는 28,600만 리브르였고, 지출은 5300만 리브르였다. 들어오는 것보다 나가는 게 두 배나 많은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재무장관은 새로운 세원을 발굴하고 지출을 가급적 줄여야 했다. 실루엣은 영국의 방법을 도입해 그동안 새금을 내지 않은 특권계급에 과세하는 방법을 추진했다. 특권계급은 성직자와 귀족이었다.

그의 조세정책은 구질서를 몹시 흔들었다. 새로운 세원이 된 성직자와 귀족들은 크게 반발했다. 그는 전시 경제를 꾸려나가기 위해 왕실과 귀족들이 애지중지하던 금붙이와 은붙이를 녹여 주화를 만들었다. 왕실과 귀족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그는 8개월만인 175911월에 해임되었다.

 

그는 재정을 늘리기 위해 숨 쉬는 공기에까지 세금을 물리려 했다는 전설을 남겼다. 또한 정부 지출을 줄이기 위해 초상화도 비싼 유화물감을 사용하지 않고 검은색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확실치 않은 얘기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에는 검은색 종이에 얼굴 옆모습의 그림자를 그리는 기법이 유행했다. 비싼 유화물감을 사용하지 않고 저렴한 비용으로 초상화를 남기는 방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람들은 극단적인 재정 절약을 주창해온 실루엣 장관의 이름을 이 미술사조에 붙였다. 이후 창문에 비친 사람의 그림자, 또는 불빛에 비친 물체의 그림자 혹은 세부적인 부분의 디자인을 제외한 윤곽이나 외형을 지칭하는 그림의 풍조를 실루엣(silhouette)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정작 실루엣 본인은 초상화를 남기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 그를 그린 유화가 몇점 있었지만, 프랑스 대혁명 때에 모두 피괴되었다.

일설에는 윤곽은 있지만 실체가 없는 것을 '실루엣'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의 재정정책, 조세정책은 실체적 접근이 이뤄지기도 전에 무산되었기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실루엣의 정책은 프랑스 대혁명 30년전에 추진되었다. 만약 실루엣의 주장대로 성직자와 귀족들에게 과세가 이뤄지고 재정적자가 해소되었다면, 프랑스 혁명은 달리 전개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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