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령 인도⑤…종교로 분할통치
영국령 인도⑤…종교로 분할통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2.10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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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와 무슬림 운동, 별도로 전개…벵갈분할로 두 종교세력 대립 구체화

 

인도국민회의는 서구 계몽주의를 배운 인도 지식인들의 모임이었다. 영국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영국과의 대화, 청원 등 온건한 운동을 벌였으나, 그나마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보다 대중적인 독립운동은 종교를 매개로 전개되었다. 종교는 광범위하게 조직되어 있는데다 신자들의 생활과 의식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므로, 대중운동의 강력한 모멘텀이 되었다.

영국령 인도에서 민족주의적 접근이 먼저 이뤄진 종교는 힌두교다.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1881년 인도의 인구는 25,500만명이었고, 이중 힌두 신자가 70%, 무슬림 20%, 불교 3%, 시크교 1%, 자이나교 1%, 기독교 1.5%를 차지했다.

힌두교는 인도인의 민족종교다. 힌두 민족주의자들은 서구적 계몽주의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가운데 힌두 역사와 문명을 조명하면서 힌두 국가의 건설을 추구했다. 이들은 찬란한 힌두 문화가 영국과 무슬림의 침략에 의해 쇠퇴했다고 가르쳤다. 이들 힌두부흥주의(Hindu Renaissance)는 소수 무슬림을 자극했다.

민족주의는 소 보호운동(Cow Protection Movement)으로 발전했다. 인도에서 소는 힌두교는 물론 불교,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 시크교 등 소수 종교도 광범위하게 신성시하고 보호하는 동물이다. 소 보호운동은 1871년 시크교도에서 시작되어 힌두교가 받아들임으로써 대중화되었다. 이 운동은 인도 민중에게 먹혀들어 힌두 부흥주의 확산에 기여했고, 힌두교와 소수 종교와의 연대에 기여했다. 하지만 무슬림들은 소를 신성시하지 않았고, 희생제에 양이나 염소보다 싼 소를 사용했기 때문에 종교갈등을 유발했다. 힌두교와 무슬림을 소 도살문제로 폭력적 소요가 일어났다. 결국 소 보호운동은 힌두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으나 무슬림과의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었다.

무슬림 운동은 힌두 운동에 자극을 받아 조직화되었다. 무슬림들은 힌두 민족주의에 소외되었고, 지역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무슬림은 영국 지배하에 북서부(지금의 파키스탄 지역)와 동부 벵갈(방글라데시 지역)에 주로 거주했다. 무슬림은 힌두교도와 다른 카스트제도를 채택하고 있는데, 지배계급을 아슈라프(Ashuraf). 농민을 아즐라프(Ajlaf)라 불렀다. 북서부 무슬림은 아슈라프 중심으로 우르두어를 사용했고, 벵갈 무슬림은 주로 아즐라프로 벵갈어를 사용했다. 벵갈 무슬림은 서구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드물었고, 하층 인구가 많았다.

 

1909년 영국령 인도의 종교분포 /위키피디아
1909년 영국령 인도의 종교분포 /위키피디아

 

벵갈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다. 20세기초 벵갈 인구는 7,850만명으로 인도 인구의 30%를 차지했다. 역대 인도 총독부는 벵갈에 과도하게 인구가 밀집되어 통치에 어려움을 지적했다.

19057월 인도총독 커즌 경(Lord Curzon)은 벵갈을 동서로 분할하겠다고 발표했다. 커즌의 벵갈분할령(Partition of Bengal)은 힌두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힌두 운동가들은 영국이 인도의 심장부를 생체해부 하듯이 잘라냈다면서 인도인을 종교로 구분해 분할통치(divide and rule) 하려는 속셈이라고 비난했다.

총독부는 공식적으로 통치의 원활화를 위해 행정구역을 분리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무슬림들도 처음엔 힌두 운동가들과 한 목소리를 냈다. 무슬림도 인도 민족주의를 종교로 분리하려는 영국의 의도를 간파했다.

벵갈지역은 힌두 민족주의 운동이 거셌던 곳이다. 민족주의자들은 인도국민회의의 온건노선에 반발해 스와데시(국산품 애용), 스와라지(자치) 운동을 펼쳤다. 민족주의 운동은 벵갈에서 시작해 마하라슈트라, 펀잡 지방으로 확장해 나갔다. 영국인들은 인구가 많고 민죽운동이 거칠어지고 있는 벵갈을 약화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것이 벵갈 분할이었다.

무슬림마저 벵갈 분할을 거부하자, 커즌 경은 설득에 나섰다. 그는 그동안 감추었던 속내를 드러냈다. 그는 무슬림 지도자들에게 동벵갈의 주도를 다카(Dacca)로 정해 무슬림의 독립적 지위를 강화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커즌의 설득이 통했다. 190510월 무하메드 연맹이 설립되었고, 동벵갈 나왑(지도자)이 분할을 지지했다. 동벵갈은 무슬림이 다수였고, 벵갈(서벵갈)은 힌두교가 다수였다. 벵갈을 힌두 지역과 무슬림 지역으로 분할하려는 시도는 무슬림의 지지로 관철된 것이다.

그해 12월 인도 총독부는 약간의 행정구역 조정을 통해 인구 3,100만명의 동벵갈과 인구 5,400만명의 벵갈의 2개 주로 분리했다.

 

1905~1911년 벵갈 분할령 /India Today
1905~1911년 벵갈 분할령 /India Today

 

벵갈 분할은 힌두 급진주의자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힌두 운동가들은 식민수도 캘커타에서 파업을 단행했고, 금식운동을 벌였다. 식민당국은 동벵갈을 떼내 힌두와 무슬림 민족운동을 분리하려 했으나, 오히려 힌두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결과를 빚었다.

벵갈의 힌두 민족주의자들은 시위, 대중집회, 결의문 채택만으로 목적을 관철시킬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스와데시와 스와라지 운동을 벌이며 영국의 식민 지배를 무력화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많은 곳에서 영국산 옷감을 불태우는 행사가 열렸고, 외국산 옷감을 파는 가게에는 피킷 시위가 벌어졌다.

온건파가 지배했던 인도국민회의도 급진파에 의해 장악되어 1906년에 4대 강령이 채택되었다. 총독부는 전인도무슬림연맹의 발족을 후원하며 힌두 민족주의를 상쇄하려 했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벵갈 분할령을 계기로 스와데시 운동은 정치적 극단주의로 나아갔다. 과격파들은 외국산 제품 거부운동의 한계를 지적하고 자치운동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으로선 민족운동을 약화시키려던 시도가 오히려 피지배 민족을 자극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벵갈 분할은 191112월 영국 국왕 조지 5세가 인도 델리를 방문한 자리에서 철회되었다. 벵갈은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앞서 총독부는 수도를 캘커타에서 델리로 이전했다. 수도 이전으로 벵갈은 인도에서 주변부로 전락했다.

이때 분할된 지역의 하나(동벵갈)1947년 파키스탄으로 병합되었다가 나중에 방글라데시로 독립했다. 서벵갈은 별도 주로 인도에 속해 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British Raj

Wikipedia, Partition of Bengal (1905)

Wikipedia, Hindu nation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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