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의 기억②] 보고서 한장에 해외자금 대탈주
[IMF의 기억②] 보고서 한장에 해외자금 대탈주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08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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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만삭스·메릴린치 보고서에 외국계 은행 한국시장에서 대거 자금회수

 

199710월말 뉴욕 월가의 유수 투자회사인 골드만 삭스의 한 시장 분석가가 한국의 외환보유액 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 월가 은행들에게 돌렸다. 보고서는 한국의 외환 보유액이 부족하기 때문에 태국처럼 IMF의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크며, 원화 환율이 3개월 내에 1달러당 1,150, 12개월 내에 1,250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얼마후 메릴린치 증권도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를 돌렸다. 메릴린치나 골드만 삭스의 시장 전략가들이 내놓은 분석은 곧바로 시장을 움직인다. 곧이어 미국의 언론들은 이 분석을 토대로 한국의 외환 사정이 어렵고,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보도했다.

그때 서울의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은 이 보고서를 간단히 무시했다. 오히려 한국 경제는 펀더멘털이 좋기 때문에 동남아 국가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 유럽등 외국 은행들은 월가 투자회사의 분석과 미국 언론보도를 근거로 한국 시장을 불안하게 바라보았고, 더 이상 손해를 보기 전에 돈을 빼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국에서의 달러 엑소더스가 벌어진 것이다. 그후 원화는 월가의 분석보다 더 큰 폭으로 하락했고, 한국은 IMF에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자료: 한국은행
자료: 한국은행

 

1027,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국제 외환 투기자들이 홍콩 달러를 공략하자, 홍콩 당국은 단기 금리를 무려 300%까지 인상했고, 홍콩증시의 항셍(恒生) 주가는 이미 몇주째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뉴욕 월가도 흔들리고 있었다. 월가의 블루칩 주가지수인 다우존스 지수(DJIA)는 사상 최대 낙폭인 554.26 포인트 (7.2%) 폭락했다. 10년전인 19871019508 포인트 폭락했던 블랙먼데이(Black Monday)10년만에 재현된 것이다.

이날 뉴욕에 나와 있는 한국 시중은행 지점들은 하루종일 북새통을 치렀다. 월가에는 "홍콩 다음이 한국이다"는 루머가 지배했다. 미국 은행들은 한국 시중은행과 기업에 빌려준 단기 자금을 일제히 회수하려고 덤벼들었다. 대출기간 3일 미만의 오버나이트 대출마저 끊어버렸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블랙먼데이이후 열흘동안 외국은행들은 한국에 대출한 단기자금 수백억 달러를 회수한 것으로 분석된다. 아마 세계 역사에서 며칠 사이에 이렇게 많은 자금이 빠져나가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한 나라를 죽이기로 작정을 하지 않고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

단기 자금은 하루짜리에서 만기 1년까지의 대출금을 말한다. 한국 금융기관과 재벌들은 짧은 만기로 돈을 빌려 계속 만기를 연장함으로써 장기로 사용해 왔다. 그런데 한꺼번에 자금을 회수하면 한국은행들은 그 많은 돈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 미국, 일본, 유럽은행들은 한국 사정을 조금도 고려치 않고 우선 자기가 빌려준 돈을 떼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서 한국에서 대탈주를 단행했다. 천둥소리에 놀란 양떼들이 좁은 계곡을 서로 밀치며 도망치듯 외국은행들은 한국을 빠져나갔다.

한국 경제규모는 앞서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의 경제력을 합친 규모이고,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었다. 동남아 경제는 핫머니의 공격에 의해 무너졌지만, 한국 경제는 선진국 은행들의 갑작스럽고, 일시적인 대탈주에 의해 붕괴됐다.

한국경제의 붕괴는 한국 경제 내부의 문제에서 발생한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국제 금융시스템의 문제에서 발생했다. 강경식씨가 아닌, 누가 부총리를 하더라도 이런 대탈주를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스위스 취리히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금융연구소(IIF: Institute of International Finance)가 선진국 은행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보니, 977월부터 그해 12월말까지 아시아를 빠져나간 자금은 1,000억 달러나 됐고, 한국을 빠져나간 자금은 이의 절반인 500억 달러나 됐다. 이 연구소는 이 자금이 구체적으로 언제 한국을 빠져나갔는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국제금융계 인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10월말에서 11월초에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한해 전까지만 해도 미국이나 일본, 유럽은행들에겐 한국과 아시아 개발도상국들이 기대와 약속의 땅이었다. 한국에 돈을 빌려주지 않은 은행은 은행 축에 끼지도 못했다. 그랬던 그들이 패닉 현상을 보이며 탈출했다.

국경을 넘나드는 단기 자본의 규모는 1조 달러가 넘는다. 이 자본이 한국을 쑥대밭을 만든 것이다. 국제은행들은 이익이 남을 만한 나라에 대거 돈을 빌려주었다가 불안하면 한꺼번에 돈을 빼낸다. 한국을 비롯, 아시아에서 빠져나간 돈은 선진국 은행 창고에 보관되어 썩어 넘치지 않는다. 그 돈은 또다시 이문이 나는 개발도상국으로 건너갔고, 그 나라가 언젠가 불안해지면 한국과 같은 꼴을 당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IIF의 조사에 따르면 선진국 은행들은 1997년 하반기에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동유럽 등에 2,120억 달러를 빌려줬는데, 이는 1년전 같은 기간에 빌려준 2,020억 달러보다 많은 금액이다. 아시아에서 빠져나간 돈이 단물을 빨아먹기 위해 아시아 이외의 지역에 투자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1998년 하반기 아시아에서 빠져나간 국제 은행들의 잘못된 관행을 실증적으로 알아보자.

국제결제은행(BIS) 자료에 따르면 선진국 은행들이 홍콩과 싱가포르를 제외하고 아시아에 빌려준 돈은 199612월에 3,670억 달러에 이르렀다. 1997년초 아시아 경제가 나빠질 것이라는 경고가 여러 곳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선진국 은행들은 아시아에 돈을 더 빌려주었다. 19976월말 현재 아시아에 대한 대출금이 3,894억 달러로 6개월 전보다 224억 달러나 더 많은 돈이 아시아에 유입됐다. 국제 은행들로선 아시아만큼 이익을 만들어주는 곳이 없었고, 아시아에는 일시적인 경기 둔화는 있을지언정 완전한 몰락을 생각조차 못했다. 그들은 스스로의 잘못된 판단의 결과를 몇 개월후 아시아를 한꺼번에 빠져나감으로써 보상받으려 했다.

이들의 명단을 보자. 미국의 체이스맨해튼, 씨티, JP 모건, 뱅크어메리카, 뱅커스 트러스트, 프랑스의 크레디 리오네, 소시에테 제네랄, 방크 파리바, 일본의 도쿄-미쓰비시, 독일의 코메르츠방크, 베스트도이체, 바이에리시 은행등 국제사회에 이름 있는 은행이 총망라돼 있다.

국제 은행들 중에서 일본계 은행들이 지리적 여건으로 아시아에 가장 많은 대출을 해주었다. 아시아 국가의 총 해외차관 중에서 일본에서 빌려온 돈은 19976월 현재 전체의 32%나 됐고, 독일 12%, 프랑스 10%, 영국과 미국 8%였다. 미국은행들은 아시아에 물린 돈이 크지 않았지만, 나중에 한국 외채협상 등을 주도하며 세계 금융계를 좌지우지했다.

 

국제은행들은 아시아에 대출을 해주면서 만기 1년 미만의 단기자본을 줬다. 장기로 빌려주기보다는 언젠가 빠져 나오겠다는 심사였다. 아시아 국가들은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만기를 계속 연장하면 장기 자본이나 다름없으니 별 걱정없이 국제은행들로부터 단기자금을 빌려 썼다. 이게 화근이었다. 국제 은행들이 그 자금을 장기로 빌려 주었더라면 아시아는 서서히 침체하는 과정은 있었을지언정, 급격히 붕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더욱 한국은 그러했을 것이다.

앞서 동남아시아의 통화시장을 공격한 것은 헤지펀드나 외환 투기자들이었다. 이에 비해 한국의 경제 위기를 초래한 것은 외국 은행들이었다. 외국계 은행들이 한국에 빌려준 단기 자금을 일거에 회수하는 마당에 한국에 축적된 외국 돈이 씨가 마르기 시작했다. 한국은행이 비상금으로 갖고 있는 외환보유액이 10월말과 11월초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한국은행는 보유 외환을 풀어 원화 방어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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