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진 인도 독립①…간디의 대중운동
찢겨진 인도 독립①…간디의 대중운동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2.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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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저항운동 전개…강경-온건파, 영국과 중재로 1937년 지방자치 실현

 

인도 독립운동은 남아프리카에서 민권운동을 벌이던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가 1915년 인도로 돌아오면서 분수령을 형성했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백인에 의한 인도인 차별에 반대투쟁을 벌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가 돌아와 그동안 유명무실하던 인도국민회의를 대중운동조직으로 전환시켰다.

인도인들은 1차 세계대전(1914~1918)에서 영국에 협조했다. 독립운동가들은 전쟁을 지지하면 영국이 인도인들의 충성을 감사하게 받아들여 그 보답으로 자치정부를 구성하게 해 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자와할랄 네루는 의무대에 자원했고, 남아프리카에서 갓 귀국한 간디도 인도 전역을 돌며 젊은이들의 입대를 권유했다. 1차 대전 직후인 1919년에 군인과 비전투요원을 합쳐 참전한 인도인은 150만명에 이르렀고, 인도에서 제공된 전비가 14,600만 파운드에 달했다.

인도인의 희생에 영국 내에서 인도의 자치 범위를 넓혀 주자는 목소리가 나와 1918년 몬타구-첼름스포드 개혁안이 나왔다. 런던의 인도 국무장관 에드윈 몬타구와 캘커타의 인도총독 첼름스포드 경 사이에 논의된 이 방안은 1919년 인도정부법으로 구체화되었다.

법안의 골자는 인도에 상하 양원을 두고, 지방정부의 자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다. 무슬림, 시크, 하층카스트에도 할당 의석이 배려되었다. 법안은 완전한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기에 민족주의자들에겐 불만스러웠지만, 인도인이 지방정부를 차지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귀국 직후 간디가 카라치에서 환영인파에 둘러싸인 모습(1916년) /위키피디아
귀국 직후 간디가 카라치에서 환영인파에 둘러싸인 모습(1916년) /위키피디아

 

영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식민지에 너무 많은 것을 내주었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그런 목소리는 1919년 롤라트 법(Rowlatt Act)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법은 심리 없이 인도인을 체포하고 투옥할수 있도록 규정했다. 롤라트 법은 전시계엄령을 연장한 것으로, 자치권을 조금 주는 대가로는 너무 가혹했다. 세계대전에서 본국을 위해 희생한 대가가 탄압으로 돌아왔고, 인도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간디는 이 법의 폐기를 요구하며 사타그라하 운동을 벌였다. 사탸그라하(Satyagraha) 운동은 간디의 주창에 의해 어떠한 폭력도 쓰지 않고 저항하는 비폭력 대중운동을 말한다. 식민정부는 간디를 체포했고, 운동은 폭력적으로 전개되었다. 펀잡 잘리안왈리 공원에선 축제 기간에 사탸그라하 운동을 벌이던 시위군중에 영국군이 예고도 없이 총격을 가해 379명이 사망하는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간디는 비폭력운동에 수많은 인명이 살상된 사건에 회의를 느끼고 사탸그라하를 철회했다.

 

잘리안왈리 학살사건을 묘사한 그림 /위키피디아
잘리안왈리 학살사건을 묘사한 그림 /위키피디아

 

무슬림들은 킬라파트(Khilafat)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1차 대전후 터키에서 일어난 것으로 인도 무슬림들이 받아들여 확산된 비협조 운동이다. 간디는 국민회의 이름으로 킬라파트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무슬림과의 연대에 손을 내밀었다.

간디는 1921년 비협조운동을 시작했는데 학생들의 등교거부, 변호사 활동 거부, 외제 의복 거부, 파업 등이 채택되었다. 이 운동은 중간계층보다 농민과 노동자 계층의 참여가 활발했다. 비협조 운동 기간에 힌두와 무슬림의 연합관계도 유지되었다.

하지만 비협조운동도 점차 유혈 사태로 발전했다. 간디는 비폭력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1922년 이 운동도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민족주의 운동이 격화하자 영국 의회는 1928년 사이먼 위원회를 인도에 파견해 현지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인도정부법의 보완을 추진했다. 이에 인도국민회의 의장이던 모틸랄 네루(Motilal Nehru)를 중심으로 자치운동을 진행했고, 네루보고서를 작성해 사이먼 위원회에 제출했다. 보고서는 우선 자치령을 받아들인 후 단계적으로 인도인을 위한 헌법을 제정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모틸랄의 아들인 자와할랄 네루는 아버지 이름이 들어간 네루 보고서의 내용을 반대하고 완전독립을 요구했다. 무슬림 연맹의 무하마드 알리 지나(Muhammad Ali Jinnah)도 네루보고서에 타협하지 않고 별도의 제안을 내놨다. 단계적 독립을 주장하는 온건파와 지금 당장 완전독립을 하지는 강경파가 갈라졌다.

간디는 독립을 이루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며 양측의 타협을 시도했다. 간디는 네루 보고서를 수용하되 영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완전 독립을 요구하는 비협조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했다. 간디의 설득으로 인도국민회의는 네루 보고서를 채택했다.

간디는 영국에 네루 보고서를 채택할 시간을 1년 주었다. 이듬해 영국은 인도 민족주의자들을 불러 원탁회의를 열었으나, 조금도 타협할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인도 정치인들은 다시 연합해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게 되었다. 1930126일 인도독립선언서가 선포되었고 간디와 정치인들은 비폭력 운동을 통해 인도의 대중적 저항운동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무슬림들은 인도국민회의가 힌두교를 대변하는 조직으로 판단하고 독자적인 노선의 필요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무슬림 사이에 온건·강경파의 노선 차이가 있었으나 차츰 독자노선을 추구하는 세력이 힘을 얻게 되었다.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1942) /위키피디아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1942) /위키피디아

 

간디는 시민불복종 운동을 재개했다. 이 운동의 상징적인 모습은 소금 행진이었다. 간디가 소금밭이 있는 단디까지 행진해 소금을 채취하는 시위 행렬을 보여주었다. 이 행위는 소금 독점을 규정한 법률 위반이었다. 이 공개행진을 계기로 지역에 따라 산림법 거부, 치안세 납세 거부등 다양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무슬림 연맹은 간디의 불복종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간디의 사탸그라하 운동 재개에 9만명 이상의 참가자들이 투옥되었고, 인도국민회의는 불법단체로 선포되었다. 영국식민당국은 인도 언론에 대한 검열이 강화했고,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수백명의 사상자를 냈다.

1931년 간디와 어윈 총독 사이에 극적인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은 비폭력 원칙을 지킨 정치범을 석방하고, 가정소비용 소금 채취를 허용하며, 외국제품 판매 가게에서의 피킷 시위를 인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1932년 영국이 주도한 원탁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이 입법화해 인도정부법이 영국의회를 통과했다. 이 법에 따라 각주에 인도인 자치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연방국가는 군주국과 연맹체로 구성되며, 의회는 양원제가 채택되었다.

이 법을 토대로 1937년 처음으로 지방정부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에서 카슈미르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인도국민회의가 승리했다. 무슬림연맹은 카슈미르에서만 승리했고, 무슬림 인구가 많은 벵갈에서도 제1당을 차지하지 못했다. 무슬림은 인도국민회의를 점점 불신하고. 독자적인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1939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영국 정부는 인도인에게 전쟁의 참여를 요청했다. 하지만 인도인들은 1차 대전 기간에 속은 것을 기억했다. 두 번째 세계전쟁에서 영국은 인도인의 도움을 얻지 못했다. 인도인들은 세계대전을 독립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Mahatma Gandhi

Wikipedia, MontaguChelmsford Reforms

Wikipedia, Rowlatt Act

Wikipedia, Khilafat Movement

 Wikipedia, Nehru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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