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진 인도 독립②…파키스탄 분리 결의
찢겨진 인도 독립②…파키스탄 분리 결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2.14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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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 부흥주의에 무슬림 소외감 커져…1940년 라호르 결의로 분리 결정

 

영국령 인도에서 무슬림 개혁의 선구자는 사이드 아흐마드 칸(Syed Ahmad Khan, 1817~1898)이다. 델리에서 태어난 그는 세포이 항쟁 이후 무슬림의 각성을 추구하면서 대학을 설립해 알리가르 운동을 통솔하기도 했다. 칸은 독립 후 힌두교도와 무슬림이 공존하는 연방제를 주창했다. 칸이 제기한 연방제는 초기 무슬림운동가들의 주류이론이 되었다. 즉 하나의 국가에 무슬림 밀집지역에 선거구를 분리해 자치권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1885년 결성된 인도국민회의는 종파를 구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구성원의 대부분이 힌두교도였고, 활동도 힌두교도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무슬림들이 별도의 조직을 만든 계기는 1905년 총독부의 벵갈 분할령이다. 영국은 인구가 많은 벵갈을 힌두 지역과 무슬림 지역으로 나누려 하자, 인도국민회의는 반대운동을 펼쳤다. 무슬림들은 오히려 벵갈 분할을 받아들였다. 동벵갈의 무슬림지도자들은 영국의 지원 아래 무슬림연맹을 조직했다. 친영조직으로 시작한 무슬림연맹은 1911년 벵갈 분할령이 철회된 이후 반영노선으로 전환했다.

 

초기 무슬림 지도자들은 인도국민회의에 우호적이었다. 무하마드 알리 지나(Muhammad Ali Jinnah, 1876~1948)는 두 조직에 동시에 가입하기도 했다.

191612월 인도 북부 럭나우에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무하마드 지나가 처음으로 회동했다. 이 회합에서 양측은 소수 종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로 합의했다. 럭나우 협정(Lucknow Pact)에서는 또 무슬림연맹이 인도국민회의와 하나로 합치면서 인도 전체의 자치와 독립을 위해 함께 영국에 대응하기로 약속했다. 아울러 인도국민회의는 무슬림들에게 지방의회 의석을 배분하고, 힌두와 이슬람을 가리지 않고 등용하기로 합의했다.

럭나우 회동 이후 간디는 무슬림이 주도하는 킬라파트 운동에 동참했다. 힌두와 무슬림은 잠시나마 연합할 가능성을 보였다. 간디는 힌두와 무슬림이 공존하는 나라를 추구했고, 지나도 두 종교가 화합할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밑으로 내려가 대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힌드교도들은 무슬림에게 너무 많은 혜택을 주었다고 불만을 품었고, 무슬림들은 힌두교도의 독점하려 한다는 생각을 강화해 나갔다. 럭나우 이후 두 종파의 연합은 오래 가지 못했다. 힌두와 무슬림의 오랜 갈등이 곳곳에서 재현되었고, 두 세력은 점점 서로를 믿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나는 무슬림과 힌두교의 화해를 주선했다. 그는 인도의 각 주에 이슬람인의 독자적 거주지를 만들어줄 것을 호소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인도 민족국가 내에 이슬람의 권익이 상충되지 않는다고 확신했고 이슬람과 힌두교의 화해를 이뤄 내겠다고 확신했다.

 

논쟁하는 무하마드 알리 지나와 간디(1939) /위키피디아
논쟁하는 무하마드 알리 지나와 간디(1939) /위키피디아

 

종교 갈등을 부채질하기는 힌두교도 마찬가지였다. 힌두 원리주의자들은 1875년 아리아 사마지(Arya Samaj)를 조직해 인도 고대문화로 돌아갈 것을 주창했다. 구자라트 출신의 다야난다 사라스바티가 봄베이에서 창설한 이 단체는 그리스도교 진출에 따른 인도의 서구화를 개탄하고 인도 고대 베다 정신으로 복귀할 것을 주장했다. 정치가와 유력자가 대거 이 단체에 가입해 1921년에는 회원이 46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 힌두 부흥주의 단체들은 힌두교를 국교로 하는 종교국가의 창설을 주장하며 이슬람도 배격했다. 이들은 세속주의를 채택하는 인도국민회의와도 거리를 두었다. 힌두주의자들은 힌두-무슬림의 통합에 반대했고,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투쟁을 거부했다.

 

두 종교의 대치 속에 간디와 지나와 같은 통합주의자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간디와 지나의 간극도 멀어졌다. 지나는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운동에 원칙적으로 반대했다. 간디의 무저항주의 운동이 실패하고, 인도 민족운동의 지도력 부재가 노출되는 상황에서 종교간 갈등, 힌두교 부흥운동이 나타나면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갈등의 골은 점점 깊이 패여갔다.

1926년 선거에서 무슬림이 대패했고, 인도국민회의도 무슬림과의 연정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지나는 둘의 화해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무슬림연맹과 인도국민회의의 관계가 급속하게 악화했다.

 

무슬림연맹은 1930년 연례회의에서 분리주의를 공식적으로 제기했다. 의장이던 무하마드 이크발은 인도에서 무슬림이 다수인 지역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수 있다는 제안을 처음으로 내놓았다.

1933년엔 영국에서 유학을 하던 무슬림 유학생들이 펀잡(Punjab) 신드(Sindh), 발루치스탄( Baluchistan), 아프가니스탄(Afganistan), 인디아(India), 아시아(Asia) 등의 머리글자를 모아 파키스탄(Pakistan)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이후 파키스탄은 인도내 무슬림 밀집지역을 나타나는 용어로 통용되었다. 또 파키스탄 운동은 2국론(Two-nation theory) 또는 무슬림 분리주의 운동을 일컫게 되었다.

무슬림 운동은 힌두 세력에 대한 반발로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1927년 무슬림연맹의 회원은 1,300명에 불과했으나, 1944년엔 벵갈지역에서만 50, 펀잡에서 20, 기타 지역에서도 수십만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하지만 1937년 지방선거에서 무슬림연맹은 참패했다. 인도국민회의가 압승했고, 벵갈에서도 무슬림연맹이 인도국민회의에 제1당의 자리를 내주었다. 그해 지나는 무슬림연맹 의장이 되어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는 각각 서로 다른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아직도 하나의 연방론을 벗어나지 않았다. 연방 내의 자치국으로서 파키스탄을 펼쳤다.

 

1940년 3월 라호르 선언에 참여한 무슬림 연맹 지도자들 /위키피디아
1940년 3월 라호르 선언에 참여한 무슬림 연맹 지도자들 /위키피디아

 

19392차 대전이 발발하자 린리스고 총독은 본국의 지시에 따라 일방적으로 선전포고를 했고, 인도국민회의는 1차 대전 때와 달리 영국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무슬림연맹은 영국을 지지했다.

지나가 이끄는 무슬림연맹은 전쟁에 협력해 주는 대가로 총독부에 이슬람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펀잡, 신드, 벵갈에 별도의 통치권을 줄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무슬림연맹은 인도국민회의가 구성한 내각에서 탈퇴하고, 본격적으로 연방제가 아닌 별개의 나라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1940324일 펀잡주 라호르에서 개최된 무슬림연맹 연례회의는 파키스탄 독립을 결의했다. 이날 회의는 이슬람 주민이 다수를 차지하는 서북인도(현재의 파키스탄)와 동부인도(현재의 방글라데시)로 나누어 자주적이며 주권을 갖는 독립된 단위를 구성한다는 정치적 목표를 내걸었다. 라호르 결의(Lahore Resolution) 또는 파키스탄 결의라고 하는 이날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그후 지나는 간디의 호소를 듣지 않았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Lahore Resolution

Wikipedia, Muhammad Ali Jinnah

Wikipedia, Two-nation theory

Wikipedia, All-India Muslim Lea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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