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 외교와 허위 공론에 빠져 있던 인조 정권
무시 외교와 허위 공론에 빠져 있던 인조 정권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08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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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임박했음에도 후금 외교관에 무례…사대부들은 문무종사 문제로 허송세월

 

우리 역사를 들여 보다가 외국의 침략을 당할 때 느끼는 공통점이 있다. 당대 지도자들이 참으로 어리석었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 때 그랬던 것처럼, 병자호란 때도 그랬다.

임진왜란의 굴욕을 당한지 30여년이 지났는데도 조선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임금이나, 신하 모두가 무능했다. 국제정세를 파악하지 못했고, 국가의 역량이 얼마나 되는지 몰랐다. 실용은 팽개치고 이념 논쟁에 빠졌다. 2천년 전에 죽은 공자와 맹자를 읊어대며 성리학의 교조주의에 빠졌고, 한족 왕국을 하늘처럼 모셨다. 외적이 침입하면 상국(上國)이 막아주겠지 하는 생각에 군사력을 키우지도 않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1636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돌이켜보자.

한해 전 몽골 차하르 부족을 원정하던 중에 도르곤이 대원 옥새’(大元 玉璽)를 얻어 홍타이지는 황제에 오를 것을 꿈꾸게 된다.

1636년 새해가 밝자 후금은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를 주축으로 하는 사신단을 조선에 보냈다. 숨진 인조의 비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를 조문한다는 명분이었다. 이 사절단에는 몽골족의 추장 77명이 포함되었다.

후금 사신단이 의주에 도착하자 의주부윤이 보고서를 올렸다. 보고서에는 후금 왕이 황제에 오르려 하니, 몽골족 추장들이 조선왕과 이 문제를 의논하려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대항할 힘이 없으면서 목소리만 높은 게 조선 사대부들이었다. 조선의 대신들은 어찌 감히 오랑캐가 황제가 될수 있느냐”, “몽골 부족은 명을 배신하고 후금에 붙은 배신자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문관등 삼사의 신료들, 성균관 학생 138명은 상소를 올려 개돼지 같은 오랑캐에 욕을 당하여 조종에 수치를 끼쳤다. 사신의 목을 베고 서신을 불에 태우라고 목청을 높였다. 어떤 사대부는 후금 사신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명나라에 보내라며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222일 용골대 일행이 한양에 도착해 서신을 제출했다. 그러자 조정은 접수 자체를 거부했다. 용골대는 화가 나서 궁궐을 나가 버렸고, 마부대만 홀로 인열왕후의 빈소를 찾았다. 조선의 신료들은 빈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조문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마침 강풍이 불어 장막이 걷혔다. 장막 뒤에는 무장한 궁궐 수비대(금군)가 보였다. 마부대는 기겁을 하고 빈소를 빠져 나와 용골대와 함께 한양을 빠져 나와 후금으로 돌아갔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조선 조정은 겁이 덜컥 났다. 이제 전쟁이 눈에 보였다. 인조 임금은 신료들을 모아 전쟁 준비를 하자는데 의견을 모으고, 전국 팔도에 격문을 내려보냈다.

"요즈음 오랑캐가 더욱 창궐하여 감히 참람된 칭호를 가지고 의논한다고 핑계를 대면서 갑자기 글을 가지고 나왔다. 이것이 어찌 우리 나라 군신이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에 강약과 존망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한결같이 정의로 결단을 내려 그 글을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 충의로운 선비는 각기 있는 책략을 다하고 용감한 사람은 종군을 자원하여 다 함께 어려운 난국을 구제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1)

아뿔사, 오랑캐와의 전쟁을 준비하라는 임금의 지시 격문이 오랑캐의 손에 들어갔다. 임금의 격문을 들고 평안감사에게 가던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붙잡혀 문서를 빼앗기고 말았다.

 

병자호란 직전의 동아시아 판도 /유튜브 캡쳐
병자호란 직전의 동아시아 판도 /유튜브 캡쳐

 

411, 후금의 수도 선양(瀋陽)에서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이 열렸다. 나라 이름도 청()으로 바꿨다. 즉위식에는 조선에서 나덕헌(羅德憲)과 이확(李廓)이 사신으로 참석했다. 황제에게 절을 올리는 국궁배례(鞠躬拜禮)가 진행되었다. 후금의 신하와 몽골의 부족대표들이 모두 절을 하는데, 조선의 두 사신만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조선은 형제국이지, 신속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본질적으로는 오랑캐 황제에게 복종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사방에서 눈총이 조선 사신에게 쏘아졌다. 청의 신하들이 두 사신을 집단 폭행하면서 죽이자고 홍타이지에게 건의했다.

홍타이지는 하챦은 분노 때문에 사신들을 죽인다면 저들에게 구실을 주는 것이라며 부하들을 달랬다.

나덕헌과 이확은 황제 즉위식에 무릎을 꿇지 않은 것으로 명나라에 충성하고 조선 사대부의 기개를 보였지만, 그 다음을 걱정했다. 청 황제의 국서를 들고 갈수는 없었다. 그들은 만주 땅에서 칙서를 버리고 대신에 그 칙서를 베껴 조정에 보고하기로 했다. 보고는 하되, 접수는 하지 않겠다는 기발한 꾀를 냈던 것이다.

그 자체가 정쟁거리였다. 사대부들은 나덕현 등이 오랑캐의 글을 받은 즉시 던져버려야 했다며 두 사람의 목을 베어 홍타이지에게 보내라고 촉구했다. 나덕헌과 이확은 그 죄로 춥고 험한 평안도로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성균관의 석전 /성균관 홈페이지
성균관의 석전 /성균관 홈페이지

 

그러면 병자호란 직전에 조선의 지도창이었던 사대부들은 어떤 일에 골몰했을까. 그들은 문묘종사(文廟從祀)라는 논쟁으로 하염없이 세월을 보냈다. 문묘종사라 함은 공자(孔子)를 모시는 사당에 유학자들을 모셔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지금의 서울 성균관대 명륜당에 어느 선현을 모셔야 하는지의 논쟁이다.

청 태종 홍타이지가 침공하기 1년전인 인조 13(1635) 5, 성균관 유생 270명이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을 문묘에 올려 제사를 지내자는 집단상소문을 인조 임금에게 올렸다.

오랑캐의 아우가 되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은지 8년밖에 되지 않았고, 홍타이지가 몽골을 장악하고, 조선에 명나라 침공에 필요한 물자를 더 달라고 요구할 때, 조선 사대부는 전쟁 대비는커녕 수준 높은 공맹의 도리를 논했다.

서인계 유생들이 율우(이이와 성혼)의 종사를 주장하고 나서자, 인조는 문묘종사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가볍게 의논할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자 이번엔 남인계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율곡과 우계의 문묘종사가 불가하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들의 주장인즉, 이이는 젊어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므로 흠이 있고, 성혼은 임진왜란 때 임금을 모시지 않았으므로 문묘에 모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이는 젊은 시절에 어머니 사임당이 죽고 한 때 삶의 문제를 고민하다 금강산에 잠시 중이 된 적이 있었고, 성혼은 왜란 때 파주에 머물다가 선조가 의주로 피난가자 모시러 가는 도중에 왜군에 막혀 숨었다 나중에 알현했다. 남인계 정치인과 유생들은 이를 트집 잡아 대성현으로 모실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인조도 또한 서인계 사대부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 답을 내리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문묘종사 문제는 유림은 물론 성균관 학생들을 양분시켰다. 서인계 학생들이 의견을 모으는 과정에서 반대의견을 펴는 남인계 학생들을 핍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영남을 대표하는 남인계 학생들은 상복을 입고 궁궐로 가 집단상소를 벌였다. 이이는 불제자고 성혼은 임금을 버린 자라는 것이다. 남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이와 성혼은 적폐청산의 대상이고, 서인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패당을 만들어 준 현자(賢者)였다. 수십년전 과거에 벌어진 이이와 성혼의 일을 끄집어내 정치권이 뜨거운 논쟁을 벌인 것이다.

 

성균관 대성전에 모셔진 위패. 오성, 공문 10철, 송조 6현, 우리나라의 18현 모두 39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성균관 홈페이지
성균관 대성전에 모셔진 위패. 오성, 공문 10철, 송조 6현, 우리나라의 18현 모두 39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성균관 홈페이지

 

율우의 문묘종사 문제는 인조 즉위 때부터 시작되어 10년 이상 끌어온 주제였다.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들이 그들의 스승을 공자님 수준으로 격상시키자는 것이었고, 인조는 서인들에 대한 견제로 이를 저지했고, 남인들이 가세했다. 이들에겐 나라와 임금보다 자기네 파당의 이익이 중요했다.

북방의 정세가 급변하는 상황에서도 문묘종사의 문제로 유림 세계는 시끄러웠다. 임금에게 불손하게 상소를 올린 남인계 성균관 유생 6명에 대해 과거 응시가 금지되었다. 그러자 남인 유생들은 출석표(圓點)와 과거 응시도 거부했다. 요즘 대학가에서 벌어지는 출석거부와 시험거부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남인계 학생 20여명은 자신도 처벌해달라고 자청하기도 했다.

서인계 학생들에 대해서도 제재가 가해지자 그들도 과거 응시를 거부했다.

사태가 이 지경으로 흐르자 대제학이었던 최명길이 수습책을 내놓았다. 양측 학생들을 타일러 되돌아가게 하고 시험(과거)을 치도록 권유했다. 하지만 이 또한 실패했다. 남인계 학생들은 수습책에 불만을 품었고, 최명길도 화를 내며 수습책을 포기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사대부들은 병자호란 직전까지 수준 높은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을 논하며 그 사상을 체계화한 이이와 성혼을 공자님 곁에서 모시게 하자는 사변적 논쟁에 목청을 돋우었다.

문무종사의 논쟁에 빠져 사대부들은 청나라가 다시 침공할 것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전쟁은 아랫것들이 하는 것이지, 사대부에겐 병역의 의무가 없었다. 강화도로 도망가 버티다보면 명나라가 도와주겠지, 하는 알량한 생각이 전부였다.

수습책이 무산되자 유림 전체가 들끓었다. 전국 각지의 유생들이 율곡과 우제의 문묘종사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인조는 지방 유생들을 비난조로 타이르자 무려 1,400명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렸다. 홍타이지가 침공하기 두달 전의 일이다.

 


1) 인조실록 163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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