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진 인도 독립③…유혈이 낭자한 이별
찢겨진 인도 독립③…유혈이 낭자한 이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2.15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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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설득에도 불구, 인도-파키스탄 분리…폭동과 유혈사태 유발

 

2차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19423월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 총리는 인도 자유화를 주장하는 노동당 출신 스태포드 크립스를 대표로 하는 위원회를 인도로 파견했다. 크립스 위원회는 마하트마 간디를 만나 전쟁을 지원하면 종전후 자치를 허용하겠다고 제안했다. 간디는 완전한 독립이 최종 목표였기에 크립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처칠 총리도 인도의 독립을 허용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크립스의 중재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간디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국민회의는 본격적인 반영투쟁에 돌입했다. 그해 8월 국민회의는 영국은 인도에서 손을 떼라며 인도철수운동(Quit India Movement)를 시작했다. 반면 무하마드 지나가 이끄는 무슬림연맹은 영국에 비교적 협조적이었다. 인도철수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국민회의가 장악하고 있던 주 정부들은 일제히 관직을 사퇴했지만, 무슬림연맹이 집권한 아쌈, 신드, 벵갈, 서북변경주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종교를 기반으로 한 두 정파는 사사건건 대립했고, 영국은 이를 이용했다.

국민회의가 주도하는 인도철수운동에 노동조합, 농민연합 등 각 사회단체와 정당들이 참여했으며, 간디의 사탸그라하(비폭력저항주의)를 비롯해 파업, 전보 업무 마비, 납세 사보타지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운동가들은 비밀 라디오 방송도 만들어 선전전을 펼쳤다. 영국정부는 간디를 체포하고, 시위 지도부와 가담자를 대대적으로 체포했다. 총독 린리스고는 1857년 세포이 항쟁 이후 가장 심각한 반란으로 받아들였다.

 

1944년 9월 간디와 지나 /위키피디아
1944년 9월 간디와 지나 /위키피디아

 

2차 대전이 종전한 후 영국은 인도를 독립시킬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을 더 이상 억누를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인도 독립에 우호적인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이 들어섰다.

독립의 여건이 고조되면서 지도자들 사이에 독립 후의 인도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인도국민회의는 하나의 국가로 독립한 연후에 연방제를 채택, 무슬림 자치령을 두는 안을 제시했다. 이에 무슬림연맹측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을 주장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파키스탄 분리독립은 영국의 분할정책에 영합하는 것이란 견해를 갖고 있었다. 19449월 간디는 무슬림 지도자 지나를 만나 담판을 벌였다. 지나는 결연코 독립하겠다고 주장해 간디-지나 회담은 결렬되었다.

마지막으로 영국이 중재에 나섰다. 1945614일 총독 웨이벌 경은 심라에서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 지도부를 불러 힌두와 무슬림이 동수로 연방 정부를 구성하고 하층 카스트 등 소수 집단이 참여하는 정부를 제안했다. 지나는 무슬림연맹이 내각의 무슬림 몫을 모두 차지하겠다고 했고, 국민회의의 무슬림 지도자들은 이에 반대했다. 결국 심라회의도 무산되었다.

 

19461월 선거에서 무슬림연맹은 신드와 펀잡, 벵갈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고, 국민회의는 나머지 지역에서 승리했다. 지방의회는 제헌의회를 구성해 헌법을 제정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했다.

영국은 연방제를 제시했다. 서피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을 하나로 묶어 연방정부에 소속시키고, 10년간의 임시정부를 운영한뒤 독립을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이 대립했다. 국민회의는 아쌈을 동파키스탄에 넣는 것과 무슬림연맹이 의원지명권을 독점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에 지나는 분노해 동의를 철회하고 분리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제는 갈라서는 길 밖에 없었다. 1846816일 지나는 직접 행동의 날”(Direct Action Day)을 선포하고 힌두 정파와 영국 정부에 대한 투쟁을 선언했다. 무슬림 갱단이 무장을 하고 캐커타에 모였고, 힌두 민족주의자들도 폭력으로 맞섰다. 양측은 서로에게 폭력을 가했는데 3일간 벵갈에서만 4천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후 인도 전역에서 힌두대연합, RSS 등 힌두종교단체들은 무슬림 학살에 참여했고, 무슬림도 복수에 나서 독립이 이뤄지기 전에 인도는 대혼란에 빠졌다. 간디는 폭동지역을 찾아다니며 진정할 것을 호소했지만 양측의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래드클리프 라인 /위키피디아
래드클리프 라인 /위키피디아

 

결국 웨이벌 총독인 무슬림을 배제한채 194692일 자와할랄 네루를 총리로 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영국은 인도에서 빨리 손을 떼고 싶어했다. 영국은 19486월까지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선언했다. 권력 이양을 책임질 마지막 총독으로 마운트배튼 경이 19472월에 부임했다.

마운트배튼 경이 와서 보니, 인도가 하나로 독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인도의 발칸화(Balkanization)를 추구했다. 인족과 종교가 다른 종족을 여러개로 분리, 독립시키는 방안인데, 이 방안에는 네루와 지나가 동시에 반대했다. 최종 중재안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하되, 각 주와 군주국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마운트배튼의 가장 큰 실책은 분할시기를 앞당긴 것이었다. 그는 당초 19486월로 잡았던 독립의 시기를 1947815일로 10개월 앞당겼다. 200년 가까이 인도를 지배한 영국이 물러날 땐 무책임했다. 영국인에게서 존경받는 마운트배튼이었지만 그는 인도인에게는 미움의 대상이었다. 시간이 국가 분리의 시간이 몇 달 남겨 놓지 않고 영국은 급히 떠나려 했다. 한때의 지배자였던 그들은 더 이상 먹을 게 없게 된 인도에서 몸만 빠져나가려 한 것이다.

 

1947년 국가분할 이후 이주자를 실은 암발라 역의 특별열차 /위키피디아
1947년 국가분할 이후 이주자를 실은 암발라 역의 특별열차 /위키피디아

 

펀잡주와 벵갈주는 무슬림과 힌두, 시크교도가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두 주를 어떻게 나누는지에 대한 해답도 없이 분리독립 예정일만 우선 정해 놓은 것이다.

펀잡과 벵갈 주의회는 6월에야 분할안을 의결했다. 국경선을 설정하기 위한 경계선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위원회에게 주어진 시간은 독립예정일까지 6주였다. 이 짧은 시간에 경계를 그어야 했다. 두 개의 경계선 위원회 의장은 영국의 시릴 래드클리프(Cyril Radcliffe)가 맡았다. 위원회에서 힌두와 무슬림 대표들이 팽팽하게 맞섰다. 숱한 경계선이 그려졌다. 서로 팽팽하게 맞섰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래드클리프가 그린 경계선이 채택되었다. 그는 어떤 이유로 경계를 설정했는지, 끝내 설명하지 않았다.

래드클리프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독립을 선언한지 이틀후인 1947817일에 발표되었다. 펀잡주와 벵갈주를 합치면 면적이 45으로 남북한을 합친면적의 2배 이상이고, 인구는 당시 8,800만명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살던 곳이 하루 아침에 남의 나라가 되었다. 펀잡과 벵갈에서 종교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는 인도로, 무슬림은 동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 또는 서파키스탄으로 각각 이동했다. 구자라트와 델리에 살던 무슬림은 서파키스탄으로, 신드에 살던 힌두교는 인도로 건너갔다.

인위적으로 설정된 국경을 넘어간 이동인구는 모두 1,450만명으로 집계되었다. 광란의 폭동이 일어났다. 고향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은 상대 종교의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대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100만명이 죽고, 75,000명의 여성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지금 펀잡은 인도와 파키스탄에 별도의 주로 편성되어 있고, 뱅갈에서 분리된 인도의 영토는 서벵갈주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Partition of India

Wikipedia, Interim Government of India

Wikipedia, Radcliffe Line

Wikipedia, British Ra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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