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진 인도 독립④…무력으로 소왕국 합병
찢겨진 인도 독립④…무력으로 소왕국 합병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2.16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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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라바드, 주나가르, 보팔 강제 합병…카슈미르에선 인도-파키스탄 전쟁

 

영국은 인도를 이원적으로 지배했다. 총독부가 직접 통치하는 직할령과 군주들에게 권력을 이양해 간접통치하는 군주국(princely state)로 나눴다. 19478월 인도와 파키스탄이 독립할 때 크고 작은 군주국의 수는 공식적으로 565개였다. 이들 군주국을 모두 합치면 영토로 영국령 인도의 40%, 인구로 23%에 달했다. 영국지배 하에서 군주국에선 선거를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도국민회의나 무슬림연맹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작은 군주국은 총독부에 행정서비스와 징세 등을 위탁했기 때문에 자치령으로서의 위상이 약했고, 하이데라바드, 마이소르, 카슈미르, 바로다 정도가 면적도 넓고 인구도 많아 중소 왕국으로 대우를 받았다.

 

 

1947년 인도독립 당시 주요 군주국 /위키피디아
1947년 인도독립 당시 주요 군주국 /위키피디아

 

독립이 결정된 직후 영국 총독부는 군주국들에게 세가지 선택권을 주었다. 마지막 총독 마운트배튼 경이 군주들에게 내린 훈령은 독립할 것인지, 아니면 인도 또는 파키스탄을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총독부와 인도, 파키스탄은 스탠드스틸조약(standstill agreement)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독립 이후 1년 동안 소왕국들이 기존의 권력구조를 유지하되, 외교권은 인도와 파키스탄이 갖기로 했다. 일종의 휴전 조약이다. 이후에는 독립 또는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대다수의 군주국들은 인도와 파키스탄을 선택했다. 문제는 인도 지역이었다. 서북 지역 신드와 발루치스탄, 펀잡 서부는 파키스탄으로 합치길 선택했는데, 인도 지역 내의 몇 개 군주국들은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힌두왕국이었던 마이소르의 군주는 일찍이 인도를 선택했다.

독립을 선택한 나라는 하이데라바드, 카슈미르, 보팔, 트라반코르, 주나가르, 시킴 등이었다. 이들 나라가 독립하면 인도는 구멍이 숭숭 뚤린 나라가 되는 형국이다.

19467월 인도 임시정부의 자와할랄 네루 총리는 군주국이 군사력을 행사할수 없다고 밝힌데 이어 군주의 특권을 인정할수 없다고 했다. 네루는 19475월에 인도 영토내 군주국이 제헌의회에 합류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인도는 독립을 선언한 나라들을 위협하거나 직접 물리력을 행사함으로써 하나씩 합병해 나갔다.

독립을 선포한 나라들의 운명을 간추린다.

 

인도군의 하이데라바드 진격도 /위키피디아
인도군의 하이데라바드 진격도 /위키피디아

 

보팔(Bhopal)은 인도 중부 마디아 프라데시주에 위치한 무슬림 왕국이었다. 마지막 군주 하미둘라 칸은 인도도 파키스탄도 선택하지 않고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인도정부는 보팔 정부의 지도자들을 체포해 감옥에 넣었다. 혐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군주는 하는수 없이 인도 정부와 협상을 벌여 합병에 서명했다. 갇혔던 보팔 인사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트라반코르(Travancore)는 인도 서남단에 위치하며, 면적 2로 대한민국의 5분의1 크기인 힌두 소왕국이다. 19476월 총리가 독립을 선택하자 힌두주의자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총리는 결국 사임하고 마드라스로 도주했는데, 군주는 영토를 인도에 넘겨주고 말았다.

주나가르(Junagarh)는 주나가드(Junagadh)라고도 하는데, 구자라트 해안에 위치해 육지로는 인도에 포위되어 있으나 바다로 아라비아해를 건나면 파키스탄과 교류가 가능하다. 이 나라의 왕족은 무슬림인데 비해 주민의 80%가 힌두교도였다. 마지막 군주 무하마드 칸지 3세는 파키스탄을 선택했다. 그러자 영토내 일부 수장들이 군주의 결정에 등을 돌려 인도로 통합하겠다고 선언했고, 인도정부는 파키스탄이 힌두-무슬림의 합의를 파괴했다고 비난했다. 인도는 주나가르와의 모든 교역을 차단하고 군사적 위협을 가했다. 결국 군주는 가족을 데리고 파키스탄으로 도주했다. 군주가 망명한 이후 주나가르는 인도를 선택했다.

하이데라바드(Hyderabad)는 데칸고원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인도의 입장에서 독립을 허용할수 없었다. 하이데라바드의 군주는 무슬림이었는데 파키스탄 입장에서도 가뜩이나 동서로 갈라진 마당에 또다른 역외 영토를 유지하기 힘들었다결국 하이데라바드엔 인도가 무력을 투입했다. 194896일 인도군 35,000명이 공격을 개시했고, 918일 하이데라바드의 항복을 받았다.

시킴(Sikkim)은 히말라야 산맥 한가운데 네팔과 부탄 사이에 위치한 불교 왕국이다. 영국의 보호령이었던 시킴은 1948년 주인을 바꿔 인도의 보호령으로 변경한채 군주 초갈(Chogyal) 체제를 유지했다. 1973년에 군주제 반대 시위가 벌어졌고, 1975년 주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7.5%의 지지를 얻어 군주제를 폐지하고 인도로의 합병을 결의햤다. 인도는 시킴을 22전째 주로 받아들였다.

칼라트(Kalat)는 파키스탄 발루치스탄에 있던 440(1512~1955) 된 무슬림 왕국으로, 면적은 14로 한국보다 넓다. 19478월 독립을 선택했으나, 무슬림단체와 발루치스탄의 압력으로 통치자 아흐마드 야르(Ahmad Yar)가 이듬해 3월 나라를 파키스탄에 들어 바쳤다.

 

칼라트 /위키피디아
칼라트 /위키피디아

 

아직까지 분쟁이 해결되지 않은 곳이 카슈미르 지역이다. 카슈미르의 정식 명칭은 자무와 미르’(Jammu and Kashmir)인데, 인도와 파키스탄, 중국 사이 산악지대에 걸쳐 있다. 면적은 22로 한반도 전체 넓이보다 넓지만, 인구는 1941년 기준으로 400만명에 불과했다.

카슈미르는 주민의 다수는 무슬림이었으나 군주 가문인 도그라(Dogra) 가는 힌두교 집안이었다. 파키스탄은 카슈미르가 주민이 원하는대로 당연히 파키스탄으로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슈미르의 무슬림회의는 파키스탄을 지지했지만, 카슈미르를 봉건 통치하던 하리 싱(Hari Singh)과 지배층은 독립을 선포했다.

무슬림들은 군주의 결정에 반발했다. 그들은 카슈미르 철수운동을 벌이며 도그라 왕조를 몰아내려고 했다. 이에 하리 싱은 반대세력을 투옥시켰다. 1947년 파탄족이 핍박받는 무슬림의 복수를 한다며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아 카슈미르를 침략했다.

무슬림의 침략을 당하자 하리 싱은 인도에 군사개입을 요청했다. 인도는 카슈미르의 인도 연방 가입을 조건으로 지원을 약속했다. 하리 싱이 조약에 서명하자 인도는 군대를 파견했다. 이에 파키스탄이 군대를 파견하면서 카슈미르에사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벌어졌다. 양측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인도는 카슈미르 계곡 대부분과 자무, 라다크 지역을 장악했고 파키스탄도 카슈미르의 3분의1을 점령했다.

전쟁은 12개월이나 끌었지만 결말을 보지 못했다. 결국 유엔이 개입함으로써 양측은 휴전하게 되었다. 카슈미르에서는 1965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일어났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1971년 방글라데시 문제로 또다시 전쟁을 일으켜 완전히 적대국이 되었다.

 

1947~1948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에 투입된 파키스탄 군 /위키피디아
1947~1948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에 투입된 파키스탄 군 /위키피디아

 


<참고한 자료>

Wikipedia, Princely state

Wikipedia, Bhopal State

Wikipedia, Travancore

Wikipedia, Annexation of Junagadh

Wikipedia, Annexation of Hyderabad

Wikipedia, Sikkim

Wikipedia, Indo-Pakistani War of 19471948

Wikipedia, Khanate of Kal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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