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진 인도 독립⑤…방글라데시 탄생
찢겨진 인도 독립⑤…방글라데시 탄생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2.17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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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파키스탄이 권력과 예산 독점, 동파키스탄 소외…인도의 지원으로 벵갈 독립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40322일 인도 전역의 무슬림 지도자들이 펀잡 라호르에 모여 파키스탄 건국을 선언했다. 파키스탄(Pakistan)1933년에 만들어진 신조어로, 펀잡(Punjab),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카슈미르(Kashmir), 신드(Sindh), 발로치스탄(Balochistan)의 머리글자와 끝글자를 합친 단어다. 벵갈의 무슬림 지도자들은 라호르 선언에 참여했지만, 파키스탄이란 용어에서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파키스탄이 건국되기 직전에 벵갈 지도자들은 별도의 국가수립을 요구했으나, 물러나는 영국인들은 그런 요구를 묵살했다. 그렇게 해서 멀리 떨어진 서북지역과 벵갈은 종교가 같다는 이유로 19478월 하나의 나라로 독립했다. 하지만 3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은 인종과 문화, 역사의 차이로 원수처럼 갈라서게 되었다.

파키스탄은 독립 직후 인도와 전쟁을 벌이면서 군부가 권력을 장악, 계엄령으로 선거를 미루다가 197012월에 독립후 첫 총선을 실시했다. 이때 동파키스탄 사람들이 일치단결해 지역정당인 아와미연맹(Awami League)을 찍었다. 이 정당은 집권 인민당을 누르고 전체 의석 313석 가운데 과반인 160석을 얻었다. 동파키스탄 인구가 서파키스탄보다 약간 더 많았다. 아와미연맹은 대표 셰이크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을 총리로 밀었지만, 군부의 지지를 얻은 줄피카르 부토(Zulfikar Ali Bhutto) 대통령은 라흐만의 총리 지명을 거부했다.

이에 반발해 동파키스탄 벵갈인들이 대규모 파업과 폭동을 일으켰고, 326일 아와미연맹은 라흐만을 앞세워 방글라데시(Bangladesh)의 독립을 선언했다.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 /위키피디아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 /위키피디아

 

벵갈 무슬림들은 왜 갈라서기로 했을까. 동서파키스탄의 인구는 비슷했지만 예산집행은 서파키스탄에 집중되었다. 서피키스탄에 배정된 예산을 100으로 했을 때 동파키스탄 예산은 1950~5546.4%, 1955~6031.7%, 1960~6541.8%, 1965~197041.2%에 불과했다. 함께 했던 기간의 예산 비중은 연평균 40.5%였다. 권력은 서쪽 사람들이 쥐고, 동쪽 사람들은 수탈당하는 구조였다. 지역차별에 대한 불만은 197011100년만에 최대라는 볼라(Bhola) 사이클론이 벵갈에 닥쳐왔을 때 극도로 높아졌다. 사이클론으로 30만명이 사망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대재앙에 직면해 실수였다며 방재책임에서 벗어나려고만 했고, 적극적인 수습에 나서지 않았다.

역사에서도 동서파키스탄은 다른 과정을 거쳤고, 문화도 달랐다. 특히 언어에서 서파키스탄의 우르두어를. 동파키스턴은 벵갈어를 썼다. 파키스탄은 독립 직후 우르두어와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벵갈어는 배제했다. 벵갈사람들은 언어운동을 벌이며 벵갈어의 공용어 채택을 요구했으나 1952221일 동파키스탄의 경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학생과 시민이 죽는 일이 벌어졌다. 유네스코는 1999년 이날을 세계모국어의 날’(International Mother Language Day)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이슬람에 대한 견해도 동서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서파키스탄 사람들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원칙으로 하지만, 동파키스탄의 무슬림들은 정교일치를 주장했다. 군대도 서파키스탄 사람들이 장악했다. 벵갈 출신들은 고위장교 승진에서 베제되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군배치도 /위키피디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군배치도 /위키피디아

 

가장 큰 문제는 서파키스탄 지도부가 동파키스탄의 다름을 안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벵갈 무슬림들이 독립을 선언하자 서파키스탄 정부는 동파키스탄 주둔군에게 신생 방글라데시 정부의 타도를 지시했다. 아와미연맹은 인도에서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독립전쟁을 수행했다. 벵갈인들은 묵티바히니(Mukti Bahini)라는 저항군을 조직해 게릴라전을 펼쳤다. 인도 정부가 동파키스탄을 지원했다. 당시 인도 총리는 자와할랄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였다.

서파키스탄 군은 서치라이트 작전(Operation Searchlight)라는 이름으로 동파키스탄에서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당시 얼마나 학살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학살된 숫자가 30만명에서 300만명에 이른다는 다양한 추정이 나오고 있다. 파키스탄군은 여성, 특히 힌두교도를 대상으로 무차별 집단강간을 자행했는데, 그 숫자가 수십만명에 이른다. 벵갈인들은 파키스탄군의 무자비한 폭력을 피해 국경을 넘어 인도로 피난을 갔다. 피난인이 한때 1천만명에 달했고, 인도정부는 서벵갈, 아쌈, 비하르, 메갈라야 등지에 난민 캠프를 만들어 수용했으나 역부족이었다.

 

1971년 12월 16일 파키스탄 총사령관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71년 12월 16일 파키스탄 총사령관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마침내 인디라 간디 총리는 방글라데시 독립을 지지하고 인도군의 투입을 결심했다. 파키스탄은 인도군 개입에 앞서 선제공격을 감행함으로써 197112월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13일만에 인도군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파키스탄군은 9만여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2차 대전 이후 가장 많은 포로였다. 19711216일 파키스탄 군사령관은 인도군 장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방글라데시는 파키스탄에서 분리, 독립하게 되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Bangladesh Liberation War

Wikipedia, Indo-Pakistani War of 1971

Wikipedia, 1970 Pakistani general e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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