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지휘 받아 영국과 싸운 인도국민군
일본군 지휘 받아 영국과 싸운 인도국민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2.18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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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에 잡힌 인도인 포로로 구성…영국에는 반역, 인도에는 애국자

 

2차 대전중에 인도국민군(Indian National Army)이란 이름으로 동남아 전선에 투입된 군대가 있었다. 인도어로는 아자드 힌드 파우지(Azad Hind Fauj)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인도해방군이지만 영국인의 입장에선 일본의 부역군대였다. 이들은 영국령 인도군 소속 병사로 동남아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일본군에 잡힌 포로들로 구성되었다. 전선에 투입된 영국령 인도군이 7만명 정도 되었고, 영국군에 속한 인도인 병사 가운데 때 4만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으므로 인도국민군의 숫자는 많을 때 4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버마전선에서 포로로 잡힌 인도국민군 병사들 /위키피디아​
​버마전선에서 포로로 잡힌 인도국민군 병사들 /위키피디아​

 

인도국민군은 일본군이 동남아 공격을 개시한지 두달이 되던 19421월에 조직되었다. 창설자는 일본에서 인도 독립운동을 벌이던 라시 비하리 보스(Rash Behari Bose, 1886~1845)였다. 그는 폭력으로 영국 제국주의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혁명주의자로, 1912년 영국 총독 하딘지 경 암살사건미수사건에 연루되어 도피 생활을 하다가 191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일본 여인과 결혼해 살며 인도독립연맹이란 조직을 만들어 1942년초 도쿄와 방콕에서 회의를 주재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군의 동남아 침공에서 잡힌 인도인 포로들을 군대로 독립군으로 조직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일본은 그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포로로 잡힌 인도인들로 인도국민군을 조직했다. 19422월 싱가포르가 함락되면서 4만명에 가까운 인도인들이 포로로 잡혔다. 일본군은 보스를 앞세워 인도인 포로들을 군대를 편성한 것이다.

보스는 모한 싱(Mohan Singh)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모한 싱은 펀잡 출신의 시크교도였다. 2차 대전에서 인도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이 영국의 전쟁을 거부했기 때문에 시크교도가 영국령 인도군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모한 싱은 인도국민군이 일본의 앞잡이라는 세간의 비판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는 인도국민회의가 지시할 경우 병력을 동원하고자 했고, 그의 생각은 일본군 지휘부와 대립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군에 의해 사령관직에서 해촉되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라시 보스 등 지도부는 인도국민군을 해산하고 병사들을 일본군 포로수용소로 되돌려 보냈다.

 

일본군 후지와라 이와이치 소령과 악수하는 인도국민군 사령관 모한 싱(1942) /위키피디아
일본군 후지와라 이와이치 소령과 악수하는 인도국민군 사령관 모한 싱(1942) /위키피디아

 

일본은 새로운 지도자를 찾았는데, 그가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 1897~1845)였다.

수바스 보스는 벵갈 출신으로 자와할랄 네루와 함께 대표적 사회주의자였다. 캘커타 시장을 거쳐 1938~39년에 인도국민회의의장을 지냈다. 시민불복종운동을 벌이다 총독부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1941년 그는 인도를 탈출해 베를린으로 건너가 나치의 수반 아돌프 히틀러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에게 적의 적은 동맹이었다. 독일에서 반영 선전전을 벌이던 그는 일본군의 요청으로 말레이시아로 가 인도국민군들 지휘하게 되었다.

1943년 이후 수바스 보스에 의해 인도국민군이 다시 조직되었다. 2차 인도국민군은 일본군 예하로 편성되어 버마 전선에 투입되었다. 수바스 보스는 싱가포르에서 자유인도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인도국민군으로 델리를 공격해 함락시킨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인도국민군은 코히마, 임팔 전투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전투했다. 영국군에도 인도인 병사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결국은 인도인들은 영국과 일본의 전쟁에 끼어들어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눈 것이 된다.

하지만 미군이 참전하면서 일본군이 동남아 전선에서 밀리기 시작했고, 인도국민군도 퇴각했다. 그들은 퇴각하면서 보급이 끊어져 악전고투를 했다. 일본이 항복한 후 도쿄로 이동하던 수바스 보스는 1945818일 그가 탄 항공기가 대만 상공에서 추락하는 바람에 사망했다. 버마 전선에 남아 있던 인도국민군은 전쟁 포로가 되어 인도로 송환되었다. 일본에 잡힌 인도인 포로가 43,000명으로 추정되는데, 영국군에 다시 잡히거나 송환된 인도국민군은 16,000명이었다.

 

1943년 도쿄에서 연설하는 수바스 찬드라 보스 /위키피디아
1943년 도쿄에서 연설하는 수바스 찬드라 보스 /위키피디아

 

194511월부터 19465월까지 델리 왕궁의 붉은 요새(Red Fort)에서 인도국민군 지도부 3인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아직 독립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고, 재판은 영국인에 의해 진행되었다. 영국의 입장에선 이들은 전범이자 반역자였다.

인도국민회의는 변호위원회를 구성해 전범 변호에 나섰다. 위원회에는 인도인 베테랑 변호사들로 구성되었고, 자와할랄 네루도 25년만에 법복을 입고 법정에 나갔다. 변호인단은 피고인들이 비록 적국에 가담해 영국군을 배반하고 반역죄를 저질렀지만, 이는 조국 인도를 위한 충성심의 발로였다고 옹호했다. 변호인들은 이들을 길을 잘못 든 애국자”(misguided patriots)라며 영국인 재판부에 선처를 호소했다.

이 공개재판은 대중적인 관심사가 되었고, 인도 독립의 염원을 고양시키는 기회를 제공했다. 어차피 영국은 인도에서 물러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영국인 판사들은 이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으나, 영국정부는 19461월 이들을 석방했다. 인도국민군은 영국인에겐 반역이었지만 인도인에게는 애국자였던 것이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Indian National Army

Wikipedia, Rash Behari Bose

Wikipedia, Subhas Chandra Bose

인도가 보이는 인도사, 강영남·이지은, 위더스북,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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