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과잉이 빚은 참극, 병자호란
이념 과잉이 빚은 참극, 병자호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09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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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비할 군사력도 없는 여건에서 한족 왕국에 충성하다 굴복당해

 

그리스 역사학자 투키디데스(Thukydides)강대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약소국은 그것을 인내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 진리가 우리 역사를 관통해 왔다.

조선은 성리학이 지배하는 이념의 나라였다. 조선 사대부들은 현실보다 명분에 치우쳤다. 국제질서와 정치의 세계는 현실이 지배한다. 조선사회엔 현실론이 명분에 밀려 발디딜 팀이 없었다. 광해군은 후금의 세력이 아주 미약하던 시절에 현실과 동떨어진 중립론을 펼쳐 후금을 제압하는데 실패했다면, 인조는 나라를 방비할 군사력 1만도 동원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한족 왕국에 대한 명분에 사로잡혀 전쟁의 참화를 당했다.

세계를 지배하지 못할 경우, 부국강병으로 나라를 방어할 힘을 갖추든가, 어느 편에 서느냐 하는 문제가 지도자의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인조의 조선은 힘도 없으면서 명분에 치우쳐 임금이 굴복하고, 수십만의 백성이 이국 땅으로 끌려가는 비극을 자초했다.

 

1636(인조 14) 2월 후금의 사신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도망치듯 한양을 떠나고, 4월 홍타이지 황제 즉위식에서 허리를 굽히지 않고 버티던 조선의 사신이 청의 국서를 버리고 베껴서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조선에서는 걱정이 태산같이 밀려왔다. 누구나 전쟁이 임박했음을 감지했다.

이럴 땐 외교로 풀어야 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전쟁 준비는 하지 않은 채 주전론, 즉 척화파가 기승을 부렸다. 임금이나 신료들은 모두 자신만만해 했다.

인조는 617일 청에 격문을 보냈다. 1)

 

중국 조정은 우리 나라에 대해 지존(至尊)이다. …… 금번에 신사(信使)가 갔을 적에는 비례(非禮)로써 겁주고 온갖 곤욕을 보였으니, 이것이 과연 이웃 나라 사신을 대우하는 예인가? 귀국의 사신이 와서는 우리 신료들에게 욕을 하면서 예로 공경하는 뜻이 전혀 없었고, 강매(强賣)하면서 마구 빼앗기를 끝이 없이 하였다.

 

인조는 국서보다 아래 등급인 격문()의 글을 보내면서 화해는커녕 모든 책임을 청나라에 돌렸다. 이유는 청이 명을 배신했고, 조선의 사신이 청 황제를 인정할수 없었으니, 잘못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주화파 최명길(崔鳴吉)은 사신을 보내지 못하더라도 청의 사정을 정탐하기 위해 역관을 파견하자고 주청했다. 척화론자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최명길을 타박했다. 그러던 중 국방을 담당하는 비변사가 겁이 났던지, 최명길을 지지했다. 논란 끝에 조정은 10월에 역관 박인범을 홍타이지에게 보냈다.

홍타이지는 오히려 역관에게 “1125일 이전에 대신과 왕자를 보내 화친을 결정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군사를 일으켜 칠 것이다는 내용이 담긴 최후통첩을 들려 보냈다. 홍타이지는 압록강이 얼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1125일까지 조선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121일 홍타이지는 만주병 78, 몽골병 3, 한족병 2, 도합 128천명의 대병력을 수도 선양(瀋陽)에 집결시켰다.

122일 마부대가 이끄는 기병 6천의 선봉대가 남하하고, 나머지 부대는 그 뒤를 이었다. 128일 마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조선 영토에 진입한 다음 날랜 기병 3백을 선발해 상인으로 변장해 밤낮으로 질주했다. 인조가 강화도로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기병 3백은 6일후인 1214일 한양에 도달했다. 도중에 아무런 저지나 방해도 없었다. 3백의 기병대에 조선 임금은 우왕좌왕하다가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도주한 것이다.

 

남한산성 행궁 복원 전경 /문화재청
남한산성 행궁 복원 전경 /문화재청

 

당시 군총사령관 격인 도원수에 인조반정의 주역 김자점(金自點)에 임명되어 황해도 황주(黃州)에 주둔하고 있었다. 청군이 압록강을 내려오기 직전에 김자점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익명의 신료가 쓴 <산성일기>(山城日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자는 16361214일부터 이듬해 1637130일까지 48일간,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난해 있을 때의 일을 일지 형태로 남긴 기록이다. 2) 

 

김자점이 도원수가 되어 말하기를, “도적이 반드시 오지 않으리라하였다. 혹 도적이 오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크게 화를 낼 뿐, 성을 지킬 군사를 조금도 더하지 않았다.

의주 저편 용골산 봉화가 서울까지 가면 소동이 나리라하여 도원수가 있는 정방산성(황해도 봉산)까지만 (봉화 불빛이) 오도록 하였다.

납월(병자년 음력 12) 6일 이후에 연이어 봉화 두 자루를 올렸으나, 자점이 말하였다.

"필시 사신을 맞이하는 불이다. 어찌 도적이 올 리 있으리오.“

9일에 비로서 군관 신용을 의주로 보내에 적병을 탐지하였다. 신용이 순안(평양 서쪽)에 이르러 보니 적병이 이미 널리 퍼졌으므로 달려와서 보고하자 자점이 크게 노하여 신용을 베려고 했는데, 다른 군관이 또 보고하니 비로서 경계를 올렸다.

대개 적병이 강을 건너는데 대로에 거리낄 것이 없으니 달려오기를 바람 같이 하고 번신(藩臣)이 보내는 장계는 적이 모두 빼앗아 가졌으므로, 조정이 막연히 몰랐다가 12일 오후에야 비로소 적세가 급한 줄 알았다.“

 

청군이 침공한지 6일 후에야 도원수 김자점이 위세가 급한줄 알았다는 얘기다. 이 정도의 군 책임자라면 당연히 사형시켜야 마땅하다. 병자호란 후에 군율로 처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긴 했지만, 김자점은 1년동안 유배갔다가 조정에 복귀했다. 인조를 임금으로 만들어준 반정의 공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에 영의정까지 오른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48일간의 남한산성 몽진(임금의 피신)에서 전투다운 전투는 없었다. 홍타이지는 맘만 먹으면 먹을수 있는 성을 그대로 두었다. 성을 에워싼 채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40여일간의 말의 전쟁 끝에 인조임금은 홍타이지에게 절을 하며 상황을 종식시킨다.

역사학자, 소설, 영화등에서 인조임금이 잠실 벌로 내려와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禮)를 한 사실을 놓고 삼전도 굴욕이라고 한다. 굴욕은 맞다. 임금이 야만인(오랑캐)의 수장에게 절을, 그것도 큰절 세 번하고 고개를 아홉 번이나 숙였으니, 굴욕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도 나오듯이, 조선의 역대 임금은 정월 초하루에 북경을 향해 명나라 황제에게 예를 갖춰 절을 했다. 보이지도 않는 먼 곳을 향해 상국(上國)의 황제에게 절을 하는 것이 더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장군이 북경을 향해 절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그렇게 떠받드는 성웅 이순신이 조선 사대부의 예를 따랐던 것이다.

한족의 황제에 절하는 것은 동방예의지국의 예절이고, 오랑캐의 황제()에게 절하는 것은 굴욕이라는 인식이 조선 사대부들의 생각이었다. 스스로 소중화라고 자부했던 사대부들이었다.

어쩌면 인조 임금에게는 큰 은혜를 입은 것일수도 있다. 승전국인 청나라는 왕을 죽이거나 교체하지 않았다. 몽골()이 고려를 지배할 때 숱하게 임금을 교체하던 것과 양상이 다르다. 그 댓가로 조선 왕실은 생명을 부지했고, 그후에 청나라가 왕실의 조공·책봉에 간여한 일은 명나라와 다를 바 없다. 결국 조선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삼전도의 굴욕이 아나라, ‘삼전도의 기사회생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대륙의 권력이 변동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세력에 온존하던 사람들이 척화파, 주전파이고, 현실의 세력을 인정하자는 세력이 주화파였다. 최명길이든 김상헌(金尙憲)이든, 그들은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명이냐, 청이냐, 어느 강대국을 사대(事大)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느냐를 놓고 목숨걸고 논쟁했을 뿐이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모두 청나라에 끌려가 옥살이하면서 만난 적이 있다.

최명길은 끓는 물과 얼음 모두 물이고, 가죽 옷과 갈포 옷 모두 옷이네”(湯氷俱是水, 裘葛莫非衣)”라고 읊었다. 청이든, 명이든 조선에겐 중국의 상국일 뿐인데, 누구에게 사대하든 무슨 상관이냐는 뜻이다. 청나라와 화친을 주장하던 최명길은 전쟁이 끝난후 우의정, 영의정으로 승승장구하다가 1642년 임경업 등이 명나라 잔당들과 내통하고 조선에 반청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진노한 청나라에 의해 불려가 구금되었다.

김상헌은 영화 <남한산성>에서처럼 자결하지는 않았다. 그는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살아남아 이렇게 시를 읊었다.

 

지난 날 사신으로 입조해 빈객이 되니 (奉節朝周昔作賓) /바다 같은 황제 은혜 신하에게 미치었네 (皇恩如海到陪臣) / 하늘과 땅이 뒤엎어진 오늘을 만나니 (天翻地覆逢今日) /아직 죽지 않아 부끄럽게 의를 저버린 사람이 되었구나 (未死羞爲負義人)”

 

김상헌은 명나라를 끝까지 흠모하던 인물이다. 주전론자라고 각색하는 것은 역사학자들이 만들어 낸 말이다.

김상헌의 후손은 조선후기에 세도를 떨친 안동 김씨들이다. 이들은 상황 변동에 따라 청을 공격하지는 북벌론(北伐論), 개화기엔 척화론(斥和論)으로 이념을 변형시켜가며 조선의 주류세력을 이어갔다.

 


1) 인조실록 1936617

2) 산성일기, 김광순 옮김, 2004년 서해문집 발행, 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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