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무령왕의 도시
공주는 무령왕의 도시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3.04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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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확인된 유일한 고대왕릉…왕릉 출토 금제관식, 진묘수가 공주의 상징

 

KTX 공주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공산성 입구에서 하차했다. 교차로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무령왕 동상이었다. 2년전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공주시가 건립했다고 한다. 공주시는 무령왕을 상징물로 삼아 관광객 유치에 나서고 있는 느낌이다. 무녕왕릉에서 나온 금제관식을 엠블렘으로 만들어 도시 곳곳에 배치했다. 왕릉에서 나온 진묘수(鎭墓獸)라는 동물 모양의 석물도 도시의 상징이 되었다.

공주는 한성, 부여와 함께 백제 3개 도읍의 하나다. 사료에는 웅진(熊津), 순우리말로 고마나루라고 했다. 삼국사기 기준으로 백제 678년 가운데 웅진도읍기는 475년에서 538년까지 63년간에 불과하다. 이 기간은 문주, 삼근, 동성, 무령, 성왕 등 다섯 왕을 거쳤는데, 한성도읍기 493, 사비도읍기 122년에 비해 짧다. 따라서 공주에서 나오는 백제유물도 부여에서 나오는 것보다 적다. 그런데 무령왕릉에서 52년전에 다량의 유물이 쏟아졌다. 그후 공주는 무령왕릉의 도시가 되었다.

 

​공주 공산성 교차로에 서 있는 무령왕 동상 /박차영​
​공주 공산성 교차로에 서 있는 무령왕 동상 /박차영​

 

197175 새벽, 밤새 내린 비로 공주 송산리 고분군 6호분에 물이 흘러들었다. 물을 빼기 위해 인부들이 배수로 작업을 하던 중에 왕릉의 입구가 드러났다. 다행히 도굴의 피해는 없었다. 이 곳이 무덤인지도 몰랐다. 일제 시대에 일본 역사학자 가루베 지온이 6호분이라고 넘버를 매긴 무덤 주위에 언덕에 불과하던 곳이었다. 아무도 무덤인지 몰랐기에 도굴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발굴작업이 시작되었고, 도중에 묘지석이 나왔다. 지석(誌石)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 57일에 붕어하시고 을사년 812일에 대묘에 예를 갖춰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爀登冠大墓立志如左)”라고 되어 있었다.

백제사마왕(百濟斯麻王)’이란 글귀가 또렷히 새겨져 있었다. 발굴자들은 흥분에 휩싸였다. 삼국사기에 백제 25대 무령왕의 이름 사마(斯摩)라고 쓰여 있다. 발음이 같다. 일본서기에도 무령왕을 사마왕이라고 했다. 묘지석에 무령왕의 사망시 나이를 62세라고 했는데, 일본서기에 출생년도를 461년도라고 한 것과 일치했다. 엄청난 발굴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학계에 무령왕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짧은 기록이 전부였다. 우리 사학계는 일본서기를 불신의 눈으로 보았다. 그런데 묘지석에 나온 내용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내용과 일치했다. 오히려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내용을 묘지석이 입증했다.

 

무령왕릉 묘지석  /박차영
무령왕릉 묘지석 /박차영

 

이후 역사학자들은 무령왕(武寧王)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무령왕(재위 501~523)은 웅진도읍기의 왕으로,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긴 후 혼란에 빠져 있던 백제를 안정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강 유역을 빼앗긴 이후 호남지역에 잔존하던 마한세력을 통합한 것도 무령왕으로 본다. 호남이 백제의 땅이 된 것은 이때부터이고, 이후 백제는 망할 때까지 130년 정도 호남을 지배하게 된다. ‘호남=백제라는 등식도 이때 생긴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마지막 해이자 즉위 23년 되던 해(523)에 한성(漢城)으로 행차해 한수 이북 주와 군에서 15세 이상 된 백성들을 징발하여 쌍현성(雙峴城)을 쌓도록 했다고 한다. 개로왕 때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하류지역을 되찾은 것이다.

 

무령왕릉 /문화재청
무령왕릉 /문화재청

 

묘지석이 발견된 이후 무령왕릉은 송산리 6호분과 차별되었다. 문화재당국은 7호분이라고 할 것을 검토하다가 고분의 주인이 밝혀졌으므로, 무령왕릉이라고 명명했다. 우리나라에서 지석을 통해 무덤의 주인이 확인된 고대 왕릉은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공주 금성동은 송산(松山)의 능선이 뻗어 있다. 그 능선 구릉에는 웅진 백제시대 왕들의 무덤이 모여 있다. 이 일대의 고분은 모두 7기로 전해지는데, 문화재청은 일대를 무령왕릉과 왕릉원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고분들은 모두 표고 약120m 정도되는 송산 남쪽경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15호분은 모두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무덤 입구에서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널방(현실)에 이르는 널길이 널방 동쪽벽에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4호분은 바닥에 냇자갈을 깔아 널받침(관대)을 만들었는데, 5호분은 벽돌을 이용했다. 6호분은 활모양 천장으로 된 이중 널길과 긴 네모형의 널방으로 되어 있는데 오수전(五銖錢)이 새겨진 벽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널방 벽에는 7개의 등자리와 사신도·일월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무령왕릉은 6호분과 같이 연꽃무늬 벽돌로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반복하여 벽을 쌓았다. 벽에는 5개의 등자리가 있고, 무덤주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지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현재 남아있는 백제의 벽돌무덤으로, 모두 터널형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가지고 있으며 긴 배수로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벽돌무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벽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특히 무령왕릉의 경우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어 백제사회의 사회 ·문화상을 연구하는데 절대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무령왕 금제관식 /박차영
무령왕 금제관식 /박차영

 

무령왕릉 출토물 가운데 진묘수는 무덤 수호의 관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높이 30.8, 길이 49, 너비 22로 통로 중앙에서 밖을 향해 놓여 있었다. 입은 뭉뚝하며 입술에 붉게 칠한 흔적이 있고, 콧구멍 없는 큰 코에 눈과 귀가 있다. 머리 위에는 나뭇가지 형태의 철제 뿔이 붙어있다. 몸통 좌우, ·뒤 다리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날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꼬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배설 구멍이 달려 있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무령왕릉 묘지석  /박차영
무령왕릉 묘지석 /박차영

 

무령왕릉에서는 왕이 소지한 금제관식 1, 금귀걸이 1, 금제 뒤꽂이 1, 은제과대 외 요패 1, 금동식리 1, 용봉문환두대도와 금은제도자 각 1, 발받침 1점 등과 왕비가 착용한 금제관식 1, 금귀걸이 2, 금목걸이 2, 은팔찌 1, 금팔찌 1, 금은장도자(金銀裝刀子) 2, 금동식리 1, 베개 1점 등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 지석 2매과 청동제품으로 신수문경(神獸文鏡의자손명수대문경(宜子孫銘 獸帶文鏡수대문경(獸帶文鏡) 등의 각종 거울과 청동제 접시형 용기, 청동완, 청동개, 수저, 젓가락, 다리미 등이 나왔고, 기타 도자제품으로서 등잔이 출토되었다. 다수의 출토물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들을 보관하기 위해 국립공주박물관이 세워졌다. 공주는 무령왕의 도시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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