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시대 백제 왕궁 감쌌던 공산성
웅진시대 백제 왕궁 감쌌던 공산성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3.05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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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해자와 능선에 의지한 천혜의 방어지…불안했던 60여년 도읍지

 

백제왕국은 왜 공산성 산 위에 왕궁을 지었을까.

공주 공산성에서 왕궁지로 추정되는 곳은 해발 110m 공산(公山)의 높은 부위에 위치해 있다. 이곳이 왕궁터다, 아니다는 논란이 있지만 발굴이 진행될수록 왕궁지로서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서기 475년 백제 21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살해되고, 아들 문주왕이 급히 남쪽으로 피신했다. 당시 웅진은 마한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변방이었다. 문주왕은 패잔병을 수습하고 다시 왕조를 열었다. 북쪽에는 고구려가 밀려오고, 남쪽에선 마한이 버티는 상황에서 백제의 망명세력들은 생존 그 자체에 급급했을 것이다.

웅진성은 도읍지라기보다 방어의 진지로서 적합한 곳이다. 북쪽으로 금강이 해자 역할을 하고, 능선이 3면을 에워 싸고 있다. 그들은 가장 높은 곳에 지휘소를 마련했다. 언제라도 싸울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있기로 했던 웅진 피난살이가 60여년이 흘러갔다. 처음 와서 세웠던 사령부가 그대로 왕궁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웅진백제 시기에 다섯 왕이 거쳐갔다. 왕조가 약해지면 배신자도 많아진다. 2명의 왕은 반란세력에 죽임을 당했다. 정권이 불안했다. 그렇게 버티다가 성왕은 사비로 도읍을 옮겼다. 한성을 되찾으려는 꿈은 고사하고, 더 남쪽으로 내려간 것이다. 웅진은 백제 왕실의 임시거처였을 뿐이다.

 

금서루 /박차영
금서루 /박차영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이곳에 잠시 머물기도 했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이 이곳을 근거지로 일어났고, 조선시대 이괄의 난(1623)으로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공중에서 본 공산성 /문화재청
공중에서 본 공산성 /문화재청

 

공산성(公山城)은 동서 약 800m, 남북이 약 400m의 장방형 포곡식 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2,450m이다. 백제시대엔 웅진성(熊津城)이라고 불렀고, 고려시대에 공산성 또는 공주산성이라 했으며, 조선 인조 이후에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부르기도 했다. 백제 시대에는 토성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다. 1993년에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했다.

암문·치성·고대·장대·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영은사·연지·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해 백제 기와·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제민천교영세비 /박차영
제민천교영세비 /박차영

 

금서루 입구에 들어서면 비석군이 즐비하다. 공주에 주재했던 지방관들이 저마디 치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들을 한군데 모아 놓은 것이다. 송덕비가 주류를 이루며, 모두 47기다. 특히 제민천교영세비가 눈에 띤다. 비석에는 공주 시내를 관통해 흐르는 제민천(濟民川)1817(순조 17) 여름, 대홍수로 넘쳤는데, 다리와 둑을 복구하는 과정이 적혀 있다. 다리와 둑을 다시 세우는 데 3천여 금이나 되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게 되자 충청수영의 군자미를 얻고, 자체 자금과 부여·연기의 공전을 합해 사업자금을 겨우 마련했다는 내용이다. 그 과정에 공이 있는 관리와 자금 지원을 해준 10인의 이름을 적어둔 공덕비이기도 하다.

 

만하루 /박차영
만하루 /박차영

 

1980년 발굴조사에서 만하루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건물이며, 임류각(臨流閣)은 백제 때 세운 건물인데 파괴된 뒤 그 터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드러났다. 장대는 정면과 측면이 각각 2칸인 건물이었지만 현재는 적심석만 남은 상태로,주변에서 백제시대의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출토되고 있다.

1983년 조사에서는 길이 10.23m, 높이 1.67m, 너비 130.8m의 암문이 발견되었다. 현재 성 안에는 후대에 세워진 영은사를 비롯해 광복루·쌍수정·명국삼장비·쌍수산정주필사적비·주춧돌·창고터·연못터 등이 남아 있다.

 

상안마을 터 /박차영
상안마을 터 /박차영

 

백제가 멸망한 뒤, 북문인 공북루 인근의 땅에 마을이 조성되었고, 이 마을은 성안마을이라 불리었다. 성안마을에는 1997년까지 사람들이 살았으며, 그후 문화재 발굴과 관광지 개발이 진행되면서 사라졌다.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 8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공산성이 포함되었다. 공산성은 문화재청이 지정한 사적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보호되고 있다.

 

비석군 /박차영
비석군 /박차영
추정왕궁지 /박차영
추정왕궁지 /박차영
진남루 /박차영
진남루 /박차영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박차영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박차영
영은사 /박차영
영은사 /박차영
공북루 /박차영
공북루 /박차영
공산정 올라가는 길 /박차영
공산정 올라가는 길 /박차영
가을 공산성 /공주시청
가을 공산성 /공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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