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周)의 동천…포사 웃음에 가려진 소빙기 재난
주(周)의 동천…포사 웃음에 가려진 소빙기 재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09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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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제1차 소빙기…가뭄에 민심이반, 견융족 침입으로 서주 끝나고 춘추전국시대

 

고대중국의 주()왕조는 도읍을 호경(鎬京)에서 동쪽의 낙양(洛陽)으로 옮긴 BC 770년을 기준으로 서주(西周)와 동주(東周)로 시대를 구분한다. 여기에는 나라를 기울게 할만한 경국지색(傾國之色) 포사(褒姒)라는 미인이 등장한다.

포사는 주 유왕(幽王)이 남쪽의 포국(褒國)을 정벌할 때 포나라 사람(褒人)이 바친 천하절색의 미인이다. 유왕은 왕비가 있는데도 포사를 사랑했다.

포사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고 한다. 유왕은 포사의 웃음을 보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는데, 현상금까지 내걸면서까지 포사를 웃게 하는 방법을 찾았다. 어느 신하가 봉화를 피워보자는 의견을 냈고, 그의 말을 따라 유왕은 위급하지도 않은데도 봉화를 피워 올려 제후들을 오게 했다. 봉화를 피우자 제후와 군대가 허둥대며 달려왔고, 포사는 비로소 웃었다고 한다. 이후 유왕은 포사의 웃음을 보기 위해 수시로 봉화를 피웠고, 매번 거짓말에 속은 제후들은 유왕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

포사는 백복(伯服)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러자 유왕은 정실왕비인 신후(申后)와 태자 의구(宜臼)를 폐하고, 포사를 황후로, 포사의 아들 백복을 태자로 삼았다.

이에 신후의 아버지 신후(申侯)가 격분해 BC 771년 오랑캐 견융(犬戎)족과 연합해 쳐들어 왔다. 유왕이 봉화를 피워 올렸지만, 제후들이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에 신후가 유왕과 백복을 죽이고, 자신의 외손주 의구를 주왕에 올렸으니, 그가 평왕(平王)이다. 평왕은 이듬해 견융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도읍을 낙읍(洛邑, 낙양)으로 옮겼다. 포사는 납치되어 견융의 여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殷과 周시대의 영역 /그래픽=김현민
殷과 周시대의 영역 /그래픽=김현민

 

주나라의 동천(東遷)은 중국 고대사에 터닝포인트다. 동주시대는 춘추와 전국시대로 나눠지면서, 군응할거와 제자백가의 시대로 전환된다.

중국 고대사에는 중대한 전환점이 미인과 궁정반란, 오랑캐의 침입으로 각색되어 있다. 왕실과 궁정을 중심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그렇게 서술된다. 하지만 현대 기후학이 접목되면서 주의 동천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관점들이 생겨나고 있다.

 

대만 기후학자 유소민(柳昭民)은 주의 동천을 전후해 중국의 기상이 급변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유소민은 저서 기후의 반역에서 BC 1000~ BC 700년 사이에 중국 역사상 최초로 소빙기(小氷期, little ice-age)가 닥쳐왔다고 밝혀냈다.

이 시기에 양쯔강(揚子江)과 중국 화중지방을 흐르는 한수이(漢水)가 얼어붙고, 우박이 내렸다는 기룩이 있다. 오늘날 양쯔강과 한수이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역사학자와 과학자들이 앙쯔강과 한수에 대한 사료와 꽃가루 화석을 연구한 결과, 연평균 기온이 오늘날보다 0.5~1°C 낮았다고 추정한다.

중국문명의 중심지인 화북지방은 서주 말기까지 비교적 한랭하고 건조했으며, 이에 따라 백성들은 자주 흉년에 시달렸다. 가뭄과 추위가 오래 지속되면서 민심이 흉흉해지고, 천자(天子)의 방탕한 생활에 대한 불만이 높아갔다. 기후변화에 따른 흉년으로, 민심 이반이 극에 달하고, 결국 견융이라는 오랑캐의 침입에 주 왕실이 대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양쯔강과 한수이 /위키피디아
양쯔강과 한수이 /위키피디아

 

중국 고대 편년체 역사서인 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유왕(幽王) 9(BC 773) 가을 9, 복숭아와 은행나무가 열매를 맺었다.”

오늘날 기후로 화북의 중원에는 복숭아와 은행나무 열매가 여름에 맺는다. 그런데 서주 말기 유왕 시절에는 음력 9, 즉 양력으로 10월에야 열매를 맺은 것으로 보아 기후가 매우 한랭했음을 알수 있다. 동주시대가 시작된 평왕 원년(BC 700)에 따듯해지기 시작해 다시 온난한 기후로 접어들었다.

 

대만의 유소민은 중국 고대기록을 통해 제1차 소빙기의 구체적 사항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주 여왕(厲王) 21(BC 858)에서 26(BC 853)까지 연속적으로 가뭄이 크게 들었다. 왕이 체()로 옮겨갔다.” (죽서기년) - 이는 황하 유역에서 기후가 몹시 가물었다는 증거다.

주 유왕(幽王) 4(BC 778) 6월에 서리가 내렸다.” (죽서기년) - 서주 말기 기후가 대단히 추웠음을 의미한다.

여왕(厲王)~선왕(宣王) 치세에 가뭄이 들어 땅이 갈라졌다.” (隨巢子)

두명의 상()이 선왕(宣王)을 세웠다. 그해 크게 가물었다.“ (通鑑外紀)

초자(楚茨)는 유왕을 풍자한 시다. 땅은 잡초가 우거져 황폐해졌으며, 기근이 들어 사람이 죽자 백성이 마침내 떠돌아 다녔다.“ (楚茨)

중곡유퇴(中谷有堆)는 주()나라의 우환을 걱정하는 시다. 흉년으로 기근이 들어 부부가 서로를 버렸다.” (中谷有堆)

평왕(平王) 때에 주나라의 도가 쇠하였으며, 구족(九族)이 흩어졌다. (注疎)

 

이런 기록들은 주 여왕(厲王) 이후 선왕, 유왕, 평왕까지 100년 동안 가뭄이 극심했고, 이에 따라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유민이 발생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보여준다. 또 민란이 발생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주나라 민심이 흉흉하고, 백성들이 따듯한 남쪽 지방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포사라는 미인에 빠져 아내와 태자를 버리는 유왕에 대해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반란자들은 북쪽 견융족의 힘을 빌려 유왕을 몰아내지만, 오히려 견융족의 힘이 커지면서 주 왕실이 수도를 호경에서 낙양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중국은 동주시대의 봉건질서가 무너지고, 춘추전국의 혼란을 맞게 된다.

 

서주 유왕때 경국지색 포사 /바이두 백과
서주 유왕때 경국지색 포사 /바이두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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