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제조약 60년, 한일협정 58년
엘리제조약 60년, 한일협정 58년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3.08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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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에서도 프랑스-독일을 모델로 한다는데…지속 여부가 관건

 

122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파리 엘리제궁에서 공동각료회의를 주재하고 정상회담을 가졌다. 프랑스와 독일 정상은 영구평화조약인 엘리제조약을 재확인하며,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대응 방안 등 현안에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합의했다.

엘리제 조약(Élysée Treaty)60년전인 1963122일 당시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독일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 주도로 체결된 조약이다. 60년이 지나도록 두 나라는 조약을 준수하며 화해와 협력을 지켜나가고 있다.

 

한일관계의 걸림돌이었던 징용문제를 풀려는 노력이 양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도 양국 관개개선을 적극 지지하고, EU, 유엔도 환영하고 있다. 유독 국내의 반일세력과 야당이 반대하고 있다.

윤 정부는 과거 프랑스-독일이 체결한 엘리제 조약을 한일관계 정립의 모델로 삼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두 나라 화해를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다. 프랑스 좌파는 극성적으로 드골을 반대했고, 독일 야당도 아데나워를 몰아부쳤다. 그렇지만 두 나라는 영구평화를 약속했고, 60년이 지나도록 지켜오고 있다.

 

1963년 1월, 프랑스와 독일의 엘리제 협정 체결식 /위키피디아
1963년 1월, 프랑스와 독일의 엘리제 협정 체결식 /위키피디아

 

프랑스와 독일은 오랜 역사 과정에서 으르렁거리며 싸웠다. 두 나라의 갈등은 고대 로마시대에 프랑스의 골족과 게르만족의 전투에서 시작된다. 서기 843년 베르덩 조약에 의해 프랑크왕국이 분리되고, 동프랑크는 독일, 서프랑크는 프랑스의 원조가 된다. 이후 양국은 1천여년의 세월 동안에 무려 42회나 전쟁을 치렀다고 한다. 프랑스 왕국은 게르만족의 주류인 합스부르크 제국 또는 프로이센과 경쟁 관계가 되었다. 19세기초 나폴레옹 전쟁서부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20세기엔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양국 관계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이 역사적 앙숙의 화해는 2차 대전의 영웅 드골과 히틀러 치하에서 탄압을 받았던 아데나워에 의해 이뤄졌다. 조약 체결 당시 드골의 나이는 72, 아데나워는 87세였다. 두 노정객은 자기세대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미래세대를 위해 길을 연 것이다.

먼저 손을 내민 사람은 드골이었다. 19589월 드골은 프랑스를 방문한 아데나워를 파리 교외의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애지중지하던 포도주를 꺼내 놓고 허심탄회하게 대화했다.

아데나워는 드골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 드골은 레지스탕스 운동을 주도한 민족주의자였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드골이 정중하게 두 나라의 화해와 외교적 협력을 요청했고, 아데나워는 드골의 진솔한 제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드골이 서독에 화해 제스추어를 던진 것은 미국과 소련의 주도권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그는 독일을 끌어 안고 유럽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할 것을 구상했다. 아데나워도 서방과의 화해를 원했고, 프랑스를 통해 나치독일의 원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두 지도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위기도 많았다. 영국은 두 나라가 화해하는 것을 방해했고, 미국은 드골을 자극했다. 패전국 지도자 아데나워는 미국의 요구에 따르자, 드골은 아데나워를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양국 정상은 평화화 화해의 큰 틀을 흔들지 않았다.

4년간 두 정상은 15번을 만나고 100시간 이상 토론하고, 40통의 편지를 서로 보내며 두 나라의 협력문제를 논의하고 우정을 쌓았다. 19627, 드골과 아데나워는 파리 외곽 랭스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양국군대의 사열을 받았다. 두 사람은 포옹하고 키스를 했다. 노트르담 성당은 1차 대전 때 독일군이 무차별 포격을 가한 상징적 장소였다. 그 곳에서 두 정상은 두나라 국민 앞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영원한 화해를 선언했다.

 

프랑스-독일 군인으로 구성된 연합연대 /위키피디아
프랑스-독일 군인으로 구성된 연합연대 /위키피디아

 

엘리제 조약은 두 정상이 매년 최소 2회 이상 만나고, 분야별로 장관들이 정기적으로 회담을 하도록 되어 있다. 조약은 재단을 설립해 양국 청소년들이 교류하고, 연료순환·원자로등 핵분야를 공동 연구하기로 했다. 우주항공산업 기술 교류 환경협의회 설치 양국 교육대학 설립 TV문화채널 설립 양국 문화협의회 설치 등이 규정되었다.

두 나라는 양국 군인들로 구성된 연대를 창설해 유지되고 있다. 군사적으로 대결하지 않겠다는 상징적 표시다. 지금가지도 청소년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서로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자는 것이다. 이 교류에 지금까지 1천만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참여했다.

 

엘리제 조약 체결 1년후인 1964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다. 당시 독일 총리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였다. 에르하르트는 전임 총리가 체결한 엘리제 조약을 예를 들며 박 대통령에게 일본과 화해하고, 경제건설 자본을 얻으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도 반일감정이 강했다. 박 대통령은 감정을 억누르며 에르하르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고 당시 통역관의 회고담이다. 에르하르트의 권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듬해 한국과 일본은 청구권 협정을 체결했다.

 

프랑스-독일 청소년 교류 행사(베를린) /위키피디아
프랑스-독일 청소년 교류 행사(베를린) /위키피디아

 

독일과 프랑스에서 정권이 바뀌어도, 독일이 통일된 이후에도 이 조약은 유지되고 있다. 엘리제 조약은 후에 EU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한일관계는 그후 엎치락되치락 했다. 양국 정치권력은 필요할 때면 국민감정을 자극했다. 여기에는 좌우가 따로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독도에 가서 일본을 자극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 했다. 그러다가 문재인 정부 때 양국 관계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좀 가까워 졌다 싶으면 다음 정권에서 뒤집어 버렸다. 한일 관계도 프랑스-독일만큼 긴 역사를 갖지만 유지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유럽의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하도 복잡해 기억하기도 힘들다. 그러던 나라들이 평화를 약속하며 거대한 경제공동체를 형성했다. 아시아 국가들이 유럽처럼 단일경제권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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