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은 어떤 인물인가①…친미파로 출발
이완용은 어떤 인물인가①…친미파로 출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3.09 19: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육영공원에서 영어공부, 주미공사관 근무…귀국후 친미개화파로 활동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이완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완용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믄 것 같다. 이완용에 따라 붙는 접두사가 매국노다. 그에게는 평생 나라를 팔아먹은 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은 어떤 인간인가. 필자는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한겨레신문 자회사에서 펴낸 이완용 평전’(김윤희저, 2011)을 읽었다. 저자 김윤희는 서문에서 이완용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즈음부터 매국적(賣國賊)으로 호명되었다. 유생들은 을사조약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모든 책임을 을사오적에게 물었다. 전통적인 왕조체제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추상화된 왕에게 책임을 물을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했다. 김윤희의 지론이라면 나라를 팔아먹은 진짜 매국노는 고종 또는 순종이다. 을사조약 체결 직후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도 모든 책임을 을사오적에게 돌렸다. 그로 인해 고종은 매국의 책임에서 구출되었다고 김윤희는 정리했다.

책 표지 /네이버 책
책 표지 /네이버 책

 

적어도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이완용은 왕당파와 개혁파를 겸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왕권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대화론자였다. 그는 또한 임금에 충성하고 조상을 깍듯이 모시는 유교주의자였다. 그래서 그는 혁명가는 되지 못했다. 현실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었을 뿐이다. 그는 여느 사대부처럼 출세를 지향했고, 임금의 의중과 신료들의 동향에 민감했다. 또 당대의 지식인과 똑같이 외세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완용이 남보다 탁월한 점은 바람이 부는 방향을 미리 감지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바람이 불기 전에 몸을 숙였고, 바람이 험하게 불 때엔 그 흐름에 순응했다.

그는 자신이 한일합방의 덤터기를 뒤집어 쓸 줄을 알았다. 그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총리가 아니었더라면, 통감 테라우치 마사타케가 이완용을 실각시키고 송병준을 조선총리로 지명했더라면, 고종과 순종이 자신들을 대리해 합방조약을 체결하라고 종용하지 않았더라면, 이완용은 그 오명을 피해갔을 것이다. 이런 가정은 그를 두둔하기 위해서가 이나라, 매국의 원죄가 두 국왕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완용은 대한제국 스스로의 힘으로 문명국이 될수 없다고 생각했고, 주권을 포기하는 대신에 조선 인민이 문명화된 사회에 살게 한다면 그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나라를 일본에 맡겨 조선을 개화한다는 스스로의 논리에 함몰되었다. 그 논리의 귀결은 매국이었다.

 

이완용(李完用)1858년 음력 67일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 백현리(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아버지 이석준(李奭俊)과 어머니 영산 신씨 사이의 2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생부 이석준은 몰락한 양반이었다. 집안이 가난해 선생을 모실 여건이 되지 못했고, 아버지 이석준이 직접 글을 가르쳤다. 이완용은 여섯 살에 천자문을 떼고 7살에 효경을 공부했다고 한다. 천재였음이 분명하다.

이완용이 10살이 되던 해 아버지와 같은 항렬인 먼 친척 이호준(李鎬俊)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이호준은 이완용보다 4살 위인 아들 이윤용(李允用)을 두었으나, 서자였기에 제사를 이어가기 위해 이완용을 양자로 받은 것이다. 양부 이호준은 명문가로 조상이 대사헌, 이조판서를 지낸 노론 가문이었고, 처는 고종의 중전 가문인 여흥 민씨였다. 이완용의 인생은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풀린다. 양자로 들어가면서 고깃국을 먹었고, 스승을 모시고 공부를 제대로 하게 되었다. 11살에 대학, 논어, 맹자, 시전을 공부했다.

13살 되던 1870년에 양주조씨 병익의 딸과 결혼했다. 양부 이호준은 전라 감사로 부임했다. 전라감사 시절 이호준은 주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 공적을 기려 전남 신안군 자라도에는 이호준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전라남도 신안군 자라도에 있는 이호준 공덕비. /문화재청
전라남도 신안군 자라도에 있는 이호준 공덕비. /문화재청

 

25세이던 188210, 이완용은 중광별시라는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고종이 과거급제자들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이완용에게 자치통감강목의 한 대목을 물었다.

전국시대 진나라와 조나라가 전쟁을 벌였을 때, 조나라 왕이 인상여(藺相如)의 반대를 듣지 않고 장수를 염파(廉頗)에서 조괄(趙括)로 교체해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완용은 신하가 책임을 다해야 하지만 대세가 기울었다면 유능한 장수를 보낸다 한들 상황이 바뀌지 않았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고종은 조나라 왕이 총명했다면 신하가 왕의 결정에 반대했겠느냐고 코멘트했다고 한다.

고종과의 첫 대면에서 이완용의 현실인식이 드러난다. 큰 역사적 변동에 개인이 할수 있는 역할에는 한계가 있으며, 다만 신하된 도리로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것이다. 고종은 재위기간 내내 이완용의 이런 현실인식론을 기용하게 된다.

 

과거급제 3년후인 1885년에 규장각 시교라는 벼슬을 얻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이 일어난 직후, 세상이 어수선하던 시절에 그는 처음으로 관직에 나선 것이다. 이후 홍문관 수찬, 우영 군사마, 의정부 검상 등의 직책을 겸직했다.

관직생활을 하던 초기, 1886년에 근대적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이 설립되었는데, 여기서 영어를 가르쳤다. 이완용은 앞으로 영어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입학을 신청했다. 당시 관료들이 육영공원에 지원했는데, 스스로 지원하기보다는 정부의 명령, 부모나 친척의 권유에 의해 마지못해 입학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완용은 진심이었다. 그는 더 넓은 세상을 만나기 위해 영어를 공부했다. 그는 선교사로 들어와 의사활동을 하고 있던 알렌과도 인맥을 텄다.

 

공직자가 된지 2년째, 육영공원에서 영어공부를 한지 1년이 채 안 되던 18878월 이완용은 처음 개설된 주미공사관 참찬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병이나 중간에 일시 귀국한 것을 제외하고, 미국에서 2년반 동안 외교관 생활을 했다. 이후 을사조약 직전까지 그는 친미파 관료로 자리잡게 된다.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은 청나라의 간섭으로 1년만에 소환되었고, 그 바람에 이완용은 주미대리공사로 임명되었다.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알렌은 이완용을 유능한 젊은 인재로 보았다. 알렌의 일기에 따르면, 박정양 등은 각국 공사관이 주최하는 연회에 참석할 때 갓을 쓰고 도포를 입었다고 한다. 짧은 머리에 양복을 입은 다른 나라 사람에 비해 조선 외교관들은 눈에 띠었다. 파티에서 남녀가 부둥켜 안고 블루스를 추는 것을 보고 조선인들은 신기해 하면서도 민망해 했다고 한다. 20대말~30대 초반의 이완용은 이 때 서양의 세계를 처음 보게 되었고, 조선이 얼마나 뒤떨어져 있고 미개한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189010월 이완용은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후 그는 고속승진했다. 그는 조정에서 내리는 관직을 넙쭉 받질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거절했고,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자리라면 응락했다. 귀국 직후 호조참의 좌부승지, 내부 참의가 되고 1891년에는 성균관 대사성, 형조참판, 동부승지, 내무 협판 등을 지냈다. 1892년에 이조참판, 1893년 한성부 좌윤, 공조 참판, 외무협판 등을 두루 거쳤다.

그는 귀국후 미국에서 근무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개화파가 되었으며, 주미공사관 출신들을 중심으로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모임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완용은 친미파의 일원으로 관료생활 초기에는 반일 노선을 견지했다.

 


<참고한 자료>

이완용 평전, 김윤희, 한겨레출판, 201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