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③…독립협회 활동
이완용③…독립협회 활동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3.11 18: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수세력과 친러파 견제 위해 서재필 등과 공조…만민공동회도 주도

 

1896211일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은 친러·친미파에 의해 주도되었고, 아관파천 직후 정동파가 권력을 쥐었다. 이완용을 비롯해 정동파는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의 독립신문 발간을 지원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실패해 일본을 거쳐 미국에 건너가 망명생활을 했다. 국내에서는 역적 가족으로 몰려 부모와 형, 아내가 음독자살했고, 동생은 참형되었고 두 살배기 아들은 굶어 죽었다. 그에 비해 이완용은 노론가문에 양자로 들어가 부유하게 살다가 과거에 급제, 주미공사관에 근무했다. 미국에서 둘이 만났다는 정황은 없다. 둘의 처지는 달랐다.

정동파의 독립신문 지원은 을미사변에서 미우라 고로 공사의 지시를 받고 일본 낭인들을 이끌고 궁궐에 난입, 민비를 시해한 아다치 겐조(安達謙藏)의 한성신보(漢城新報)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한성신보는 친일언론으로, 을미사변을 대원군의 짓이라고 주장하고 아관파천을 비난했다. 이완용은 한성신보를 비난하고 이런 기사를 쓰지 말라고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집권세력이었던 정동파들은 한성신문을 견제하는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서재필의 독립신문 창간을 지원했다. 독립신문은 조정으로부터 창간비 4,400원을 보조받았고, 정동에 있는 정부 건물을 사용할수 있게 배려를 받았다. 조정은 관료들에게 독립신문 구독료를 봉급에서 제할수 있도록 하는 한편, 한성신보 구독을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독립신문은 이완용이 수장으로 있는 정동파의 관제신문으로 출발했다.

 

서재필은 자유와 독립이라는 미국적 이념을 전파하며 의회설립을 통한 권력분립을 지향했다. 이완용은 왕정 체제하에서 정치개혁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서재필과 비슷한 면이 있으나, 국왕에 대한 충성도에서 둘은 차이점을 드러냈다. 어쨌든 이완용과 서재필이 의기가 투합한 지점은 반일 감정이었다. 독립신문은 창간초부터 정동파를 지지했고, 정동파는 독립신문에 재정적 지원을 했다.

아관파천은 보수파들이 목청을 높일 기회를 제공했다. 임금이 외국공사관에 거주하는 것 자체가 성리학자들로선 납득할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서양문물을 배운 자들이 개화와 입헌제도를 주장하는 것도 그들에겐 마뜩치 않았다. 보수세력들은 고종의 환궁을 요구했고, 전국의 유생들이 벌떼처럼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아직도 조선은 성리학이 주류인 유림의 나라였다.

고종은 유림의 궐기를 왕권강화에 이용했다. 파천 두달후인 18964, 임금은 러시아공사관의 지원을 받는 친러세력의 준동을 저지하고 친일세력도 억제하는 카드로, 이범진을 실각시키고, 개각을 단행했다. 이때 보수파의 대표로 신기선과 이종건을 기용했다. 신기선은 학부대신, 무반 출신의 이종건은 경무사로 임명되었고, 이완용은 외부대신이 되었다.

보수파들은 단발령과 양복착용을 무효화할 것을 요구했고, 내각제도를 폐기해 의정부제도로 돌아가자고 했다. 한마디로 과거로 돌아가는 왕정복고주의였다.

 

내각은 보수파와 정동파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친러파 수장 이범진이 실각했으므로, 실제로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친미파가 정동파를 이끌었다. 정동파는 독립신문을 앞세워 보수파들의 사대주의 근간을 흔들었다. 그 전략은 독립문 건립으로 나타났다.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 것으로, 이는 중화주의에 젖어있는 보수파를 공격하는 수단이었다. 이 아이디어의 시초는 박영효인데, 그는 조공 관계가 폐지되었으므로, 영은문, 모화관, 홍제원, 청제공덕비를 헐어버리자고 했다. 이후 영은문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기둥만 남아 있었다.

독립문 건립은 고종도 지지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상국이 없어졌으므로, 독립문 건립운동을 외국공사관에 도피했다는 비난을 잠재울 소재로 보았던 것이다.

 

서재필은 독립문을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독립협회라는 정치단체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보수파의 복고주의를 반대하는 조직이었으며, 창립자인 서재필은 고문으로 빠지고 관료를 앞세운 관민(官民) 조직으로 출발했다. 이완용은 안경수, 김가진 등과 함께 14인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9672일 독립협회 창립총회에서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외무대신으로서 정치조직의 대표를 맡게 된 것이다. 정동파 관료들은 정치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독립문과 독립공원 건립에 일조했다.

독립문 건립 모금활동에 고종이 황태자 명으로 1,000원을 기부했고, 이완용도 100원을 냈다. 1121일 독립문 건립을 위한 정초식이 개최되었다.

정초식에서 독립협회 위원장 이완용은 대중 앞에서 우리나라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그 연설 내용이 독립신문에 기록되어 있다.(18961124일자)

독립을 하면 나라가 미국과 같이 세계에 부강한 나라가 될 터이요. 만일 조선 인민이 합심을 못 하여 서로 싸우고 서로 해 하려고 할 지경이면 구라파(유럽)에 있는 펄낸(폴란드)이란 나라 모양으로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터이라. 세계 사기(세계사)에 두 본보기가 있으니 조선 사람은 둘 중에 하나를 뽑아 미국 같이 독립이 되어 세계에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든지 펄낸 같이 망하든지 좌우 간에 사람 하기에 있는지라 조선 사람들은 미국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

 

독립문 /문화재청
독립문 /문화재청

 

189610월말, 민영환이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고종은 그를 러시아에 보내면서 차관을 융통해줄 것을 부탁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민영환은 돌아와 러시아 차관이 어렵게 되었으므로, 러시아공사관에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고종이 기대한 차관은 생각도 않고 오히려 군사교관 14명만 민영환에게 붙여 보냈다.

러시아의 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은 일본공사관과 미국공사관으로 옮겨가는 것을 은밀히 타진했다. 그 소식을 듣자 김흥륙이 크게 반발해 고종에게 협박성 발언을 했고, 고종은 무척 기분이 나빴다고 한다. 김흥륙은 러시아어를 하는 조선 유일의 통역관으로, 고종과 러시아인 사이를 통역하며 임금 곁을 지켰다. 그는 이범진 실각후 친러파를 대표하고 있었다.

고종이 러시아와 친러파에 인질로 잡혀 있는 형국이 되자, 이완용은 반러운동을 벌였다. 친러세력과 손을 잡고 정권을 잡은 이완용은 역시 변신의 귀재였다. 러시아 세력이 약화할 조짐을 보이자, 그는 친일세력에 문을 두드리며 연대의 구실을 찾고 있었다.

1897년 새해가 되자 고종의 환궁 요구가 거세졌다. 김병시·조병세등 원로대신들이 상소를 올려 환궁을 요구했고, 유생 200명이 연명상소를 올렸다. 서울 시전상인들이 환궁을 요구하며 철시를 할 태세였다. 220일 고종은 마침내 경운궁으로 돌아갔다. 파천 1년만이다.

 

환궁후 고종은 왕권 강화에 매달렸다. 유림을 등에 업고 내각을 약화시켜 절대왕정을 꿈꿨다. 임금은 내각의 권한 강화를 바라는 개화파를 멀리했다. 환궁후 18977월에 단행된 개각에서 이완용은 외부대신에서 다시 학부대신이 되었다. 고종은 칭제를 준비했고, 각료제를 선호했던 이완용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해 9월 고종은 이완용에게 평안남도 관찰사로 발령을 냈다. 고종은 사직 상소를 냄으로써 고종의 인사조치에 불만을 드러냈다. 1012일 고종은 원구단에 납시어 스스로 황제에 올랐고,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

독립신문은 고종의 칭제에 대해 자주독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찬성했다. 하지만 고종의 왕정복고주의와 독립협회의 권력분립론 사이에 괴리는 컸다.

 

환궁과 칭제 이후에도 러시아의 압력은 거세졌다. 18981월 석탄창고로 사용하기 위해 부산 절영도를 조차했고, 김흥륙 등은 한러은행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독립협회는 구국상소문을 올려 러시아와 친러파의 조치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1898227일 독립협회는 회칙을 개정하고 임원진을 개편했다. 동시에 이완용을 회장으로, 윤치호를 부회장으로 선출했다. 회장이 된 이완용은 반러운동을 주도했다.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비판하는 공문을 외부대신에게 보냈다. 친러파 외부대신 민종묵은 이에 사과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이완용은 반러운동을 시민운동으로 전환하기 위해 만민공동회를 추진했다. 최초의 민중집회인 만민공동회는 시전 상인 현덕호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이승만을 비롯해 배제학당 학생들이 러시아 군사교관과 러시아 재정고문 철수 요구안을 정부에 제출했다. 310일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는 1만명의 시민이 참여해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이완용은 만민공동회를 주도하면서 정치생명을 걸었을 것이다.

그 답은 권력배제였다. 고종은 18983월 이완용을 전라북도 관찰사로 제수했다. 나이 41세였다. 이때부터 을사조약 체결 직전인 1905년까지 7년간 이완용은 중앙정치에서 떨어져 지방관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의 인생이 여기서 종결되었다면 그는 독립운동을 한 관료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참고한 자료>

이완용 평전, 김윤희, 한겨레출판, 201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