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④…친일파로 변신하다
이완용④…친일파로 변신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3.13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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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을사조약의 최종 책임…군왕에게 돌아갈 비난, 을사오적에게 집중

 

이완용이 전라북도 관찰사로 내려가 있는 7년 동안에 고종은 스스로 황제에 올라 절대군주정을 추구했다. 하지만 국제정세는 대한제국을 가만 두지 않았다. 청나라와의 조공관계는 끊어졌으나 일본과 러시아가 대한제국을 도마 위에 올려 놓고 각축전을 벌였다. 고종은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1901년 친미파 수장 이완용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해 서울로 데려오려 했다. 이완용은 사직상소를 올려 군주의 부름을 거절했다.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이 격화하면서 1904210일 마침내 러일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터지기 앞서 고종은 아관파천 때처럼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려고 타진했다. 그런데 알렌 공사가 조선의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는 본국의 훈령에 따라 완곡하게 거절했다.

190411월 고종은 또다시 이완용에게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했다. 이번에 이완용은 거절하지 않았다. 이완용이 고종 옆에 다가가자, 친일파들은 친러파가 보강된 것으로 바라보았다. 친일파의 입장에서 친미파도 자신들을 반대하는 점에서 친러파와 다름이 없다고 보았다. 이완용의 궁내부 직책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종이 친일파의 견제를 의식해 두달만인 19061월에 이완용을 궁내부 직책에서 해임했다.

 

무보직 상태로 밀려났다가 이완용이 내각에 기용된 것은 1905910일이었다. 이완용은 하야시 곤스케 일본공사의 추천으로 학부대신이 되었다. 이 사이에 변신의 귀재 이완용은 친미파에서 친일파로 전환한 것이다. 그를 하야시 공사에게 연결해 준 시람은 주일공사를 지낸 이하영이었다. 이하영은 이완용이 아관파천 직후 친일파를 척결할 때 돌봐준 사람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해 도와준 사람이 은공을 갚은 셈이다.

친미파 수장이었던 이완용은 왜 갑자기 친일로 돌아섰을까. 그의 철저한 현실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강요해 고종의 통치권을 제한했고, 외교와 재정 분야에 고문을 두어 일본과 합의를 거치지 않고 집행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게다가 이완용이 의지했던 미국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이완용이 입각했을 때 이미 전쟁은 끝나 있었다. 앞서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이어 95일 일본과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에서 종전 조약을 체결했다. 927일 영국은 일본과 제2차 영일동맹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을 일본의 관할 하에 둔다고 인정했다. 일본은 전쟁 또는 외교를 통해 조선을 지배 하에 둔다는 국제적 합의를 얻어냈다. 이제 조선과 보호국 조약을 체결하는 일만 남았다.

 

19051027일 일본은 각료회의를 열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내용의 8개 사항을 의결했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특명전권대사로 조선에 파견했다. 1110일 이토는 각료회의 결과와 천황의 친서를 들고 조선에 둘어와 손탁호텔에 머물렀다. 이토는 고종황제 알현을 신청했으나, 고종은 병을 핑계로 접견을 연기했다. 이토는 15일 고종을 알현했다. 이날부터 조약이 체결된 17일까지 3일간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에 대한 기록은 수많은 저술들에 잘 정리되어 있다. 다만, 결과론적으로 을사늑약이라고 불리는 보호국 조약은 과연 누가 최종책임자인지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을사조약 체결후 기념사진 /역사박물관(코넬대 도서관 소장 윌러드 스트레이트의 서울사진)
을사조약 체결후 기념사진 /역사박물관(코넬대 도서관 소장 윌러드 스트레이트의 서울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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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는 고종에게 을사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고종은 이 중대한 사안을 혼자 책임지지 않고 내각과 민의에 떠넘겼다. 고종은 짐이라 할지라도 어찌 그 이치를 모르겠는가. 그렇다 할지라도 일의 중대함을 볼 때 짐의 정부 신료들에게 자순(諮詢)하고, 또 일반 인민들의 의향을 살필 필요가 있다며 피하려 했다.

대한제국은 절대왕정이었다. 내각책임제도, 민주주의도 채택하지 않았다. 이토는 이 점을 지적했다. “신료들에게 자순하심은 당연하오나, 인민의 의향을 살핀다는 말씀은 기괴하다고 생각합니다. 귀국은 헌법 정치도 아니며, 만기(萬機) 모두 폐하의 친재(親裁)로 결정하는 군주전제국 아닙니까.” 이토의 말인즉, 고종이 결심하면 결정된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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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공사는 대한제국 외부(외무부)에 을사조약안을 제출했다.

오후 4, 이토는 대신들을 자신의 숙소로 불렀다. 참정대신 한규설과 시종무관장 민영환은 공무를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이토는 그동안에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며 대신들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대신들은 일단 조약안이 접수된 후에 이를 열람하고, 그후에 의논해 해답을 주겠다고 했다. 이완용도 다른 대신들과 비슷한 의견을 개진했다. 대신들은 절차상 일본의 공문을 본 후 의논해보겠다며 그 자리를 얼버무렸다.

그날 밤, 대신들은 고종의 부름을 받고 대궐로 들어갔다. 대신들은 이토와 만나서 한 대화 내용을 고종에게 보고했다. 고종은 대신들에게 대책을 물었다.

이때 이완용은 고종에게 폐하가 품고 있는 생각을 말해달라면서 대신 8명이 이 일을 막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고 했다. 이완용의 말은 이토의 말과 같았다. 황제가 최종적으로 결정하라는 얘기였다.

이완용은 이어 폐하의 마음이 단호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면 천만다행한 일이지만, (조약체결을) 허락하게 된다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고종과 대신들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이완용은 황제가 조약 체결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직감하고, 퇴로를 열었다. 그는 폐하가 하는수 없이 (조약체결을) 허락하게 된다면 조약 내용중에서 보태거나 빼서 고치고 바로잡을 사항이 있을 것이니, 미리 상의해 두어야 합니다.”고 말했다. 조약 체결을 절대반대하지 못한다면, 일부 수정하는 쪽이 어떠냐고 고종의 의중을 떠본 것이다.

그제서야 고종은 문구를 변통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니, 학부대신(이완용)이 말한 바가 매우 타당하다고 했다. 말인즉 을사조약을 받아들이되, 문구 일부를 수정하라는 것이었다. 황제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대신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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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공사가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불러 조약안 체결에 협력을 요구했다. 대신들은 고종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면서 찬성하지 않았다. 하야시 공사는 대신들을 이끌고 경운궁으로 향했다. 궁궐주변은 일본군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었다.

오후 4시에 어전회의는 7시가 되도록 끝나지 않았다. 오후 8시경 고종은 궁내부대신 이재극을 통해 이토에게 협의 확정을 유예해달라고 알렸다.

이토는 즉시 하세가와 사령관과 사토 마쓰타로 헌병대장과 함께 입궐해 고종을 알현하고자 했다. 고종이 신병을 이유로 거부하자 이토는 어전회의장으로 가서 대신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조약 체결에 관한 찬반 여부를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은 반대하다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 감금당했다. 탁지부대신 민영기와 법부대신 이하영도 반대의사를 밝혔다.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5명은 찬성했다. 이들이 후에 을사오적으로 지목되는 대신들이다. 이토는 대신 8명 중 5명이 찬성했으므로, 다수결에 의해 조약안이 가결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그날 저녁 외부대신 박제순과 하야시 곤스케 공사 사이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 /위키피디아
을사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 /위키피디아

 

을사조약은 고종의 윤허 하에 체결된 조약이다. 그렇지만 비난은 이른바 을사오적에게 돌아갔다. 다섯 대신들은 자기들에게 쏟아진 비난을 해명하기 위해 당시 상황을 상세히 적어 상소문을 올렸으나, 세상 사람들은 이를 주목하지 않았다.

조약체결 3일후인 1120,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란 사설을 싣고 을사오적을 맹비난했다. 성리학자들은 군왕을 비난하지 못한다. 불충이다. 군왕이 잘못했다면, 그 또한 신료의 탓이다. 장지연은 고종의 매국 원죄를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전국의 유생들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며 상소를 올렸고, 도끼를 둘러메고 대궐앞에 읍소를 했다. 민영환은 울분을 참지못하고 자결했다. 벌떼같이 일어선 여론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을사오적에 처형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자신의 왕국을 대신들이 망쳤다면 처형해야 마땅한데, 고종은 자신의 원죄를 덮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다만 유림을 대표해 최익현은 고종의 잘못을 지적했다. 최약현은 폐하가 크게 위엄을 펼쳐 단안을 내렸다면 비록 군병을 배열하고 억지로 협박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질책했다. 하지만 대다수 유림들은 고종의 책임을 거론하지 않았고, 만만한 대신 다섯명을 걸고 넘어졌다. 몸통은 건드리지 못하고 가지만 흔든 격이다.

 


<참고한 자료>

이완용 평전, 김윤희, 한겨레출판, 2011

우리역사넷, 을사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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