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⑤…매국의 길
이완용⑤…매국의 길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3.14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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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총리대신 임명…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 조약에 조인하다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조약 거부보다 조약문 수정으로 방향을 틀었던 이완용에게 깊은 인상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고 대한제국이 얻은 것은 별로 없었다. 단지 나라가 부강해지면 외교권을 되찾는다는 내용이 조약문에 삽입되었다. 이완용의 주장은 나라가 허약해 외교권을 일본에 잠시 맡긴 것에 불과하며, 대한제국의 내정통치권은 대한제국에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도움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한 다음에 외교권을 되찾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 막연한 구절 하나로 을사오적들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토는 특명전권대사로 와 을사조약을 체결한 이후에도 조선 통감으로 서울에 눌러 앉았다. 그는 내정간섭을 통해 사실상 조선을 좌지우지했다. 조약 직후 서명자인 외부대신 박제순을 총리대신으로 앉혔다. 박제순이 우유부단했으므로, 이토는 군부대신 이근택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다가 이토는 이완용을 총리로 천거했고, 고종은 이의를 달지 않았다. 1907614일 이완용은 총리대신이 되었다.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려 한일합병을 결정한 창덕궁 흥복헌 /위키피디아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려 한일합병을 결정한 창덕궁 흥복헌 /위키피디아

 

고종은 비밀리에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다. 밀사사건은 이완용이 총리대신이 된 직후에 터졌다. 고종은 을사조약 체결이 자신의 뜻에 반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국제사회에 폭로하려 했다. 헤이그에서의 특사 활동이 서양 언론에 보도되자 그동안 대한제국이 원해서 보호조약을 체결했다는 일본과 국내 친일파들의 주장이 허위였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한국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방안, 합병하는 방안 등이 대두되었다. 일본 강경파들은 합병안에 목청을 높였다. 이토는 이완용에게 밀사사건이 을사조약 위반이며, 전쟁 선포의 사안이라고 위협했다. 일본이 이 사건을 빌미로 보호국이란 껍질을 벗어내고 조선을 먹어버리겠다는 야욕을 드러냈다.

이완용은 일본에 의한 점령 또는 합병을 피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그 대안이 고종의 양위였다. 1907717일 이완용은 내각회의를 열어 일본이 요구한 정미7조약의 조인, 황제의 섭정 추천, 황제가 도쿄에 가서 일본 천황에 사과할 것을 고종에게 건의하기로 결의했다. 고종에게 물러나라는 압박이었다.

고종은 일본과 이완용 내각의 끈질긴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719일 퇴위하고, 아들 순종이 등극했다. 이어 724일 정미7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의 내정간섭이 강화되고, 군대가 해산되었다.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에 항의하는 군중시위가 일어나고,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확산되었다. 이 와중에 서울 중림동(약현)에 있던 이완용의 자택과 우봉 이씨의 신주가 불타버렸다.

고종의 퇴위로 일본의 합병시도는 잠시 늦춰졌다. 이완용 등은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있는한 일본내 강경파들의 요구를 막고 합병은 없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던 이토가 19096월 사임하고, 부통감이던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가 통감으로 승진했다. 이토가 물러나면서 바로 기유각서가 체결되어 조선의 사법권, 감옥 관리권이 통감부로 넘어갔다.

 

순종이 한일합방 조약체결시 이완용에게 준 전권위임장. /위키피디아
순종이 한일합방 조약체결시 이완용에게 준 전권위임장. /위키피디아

 

190910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암살되었다. 사건 당일 인천의 한 연회에 참석했던 이완용은 급히 서울로 돌아와 조전을 보내고, 다음날 그는 유길준, 고종과 순종의 칙사와 함께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중국 다롄으로 향했다. 다롄에서는 거류일본인들의 격앙된 항의로 하선조차 못했다. 그는 선상에서 조의를 표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안중근 의사의 상극점에 있었던 이완용에게 이토는 자신의 지지기반이었다.

이토 암살 이후 일본에선 한일합방안이 기정사실화되었다. 일진회를 조직한 송병준이 11개 조항의 합방안을 만들어 일본에 제안했다. 송병준 안은 황제를 일본 황족으로 대우하고, 양반을 일본 화족에 포함시키고, 총독부를 신설하며, 별도의 식민지 법률을 제정하는 것 등을 포함했다. 송병준이 선수를 친 것은 합병후 이완용을 밀어내고 자신이 일본을 등에 업고 조선의 통치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였다. 또다른 일진회 우두머리 이용구도 정합방(政合邦)이란 청원서를 일본에 제출했다.

이에 이완용도 별도의 합방안을 제시했다. 이완용의 방안은 황제를 유지할 것, 정부 원로 대신을 일본 화족으로 삼을 것, 경력 있는 양반에게 녹봉을 지급할 것, 한국의 정부 수반을 한국인으로 삼을 것 등으로 짜여 있다.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 친일세력들이 경쟁적으로 합방안을 민들어 일본에게 아부한 것이다. 이완용의 방안이 송병준의 그것과 다른 점은 대한제국 황제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일본은 집어삼키는 일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다 된 밥에 재뿌리는 일은 피했다. 미국이 만주 중립화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민감한 시기에 한일합방마저 밀어붙이면 미국이 등을 돌리게 된다. 일본은 미국을 설득할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던 중 19091222일 오전 11, 22세의 열혈 청년 이재명이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하는 이완용을 칼로 찔렀다. 이완용은 어깨와 허리가 칼에 찔려 쓰러졌다. 상처는 매우 깊었고, 장기치료를 해야 했다.

해를 넘겨 1910년초 미국이 만주 중립화안을 철회했다. 일본이 합방을 밀어붙이는데 걸림돌이 제거되었다. 소네 통감도 건강 악화로 사의를 표했고, 일본정부도 이 기회에 군부출신 강경파를 조선 통감으로 파결할 움직임을 보였다.

519일 이완용은 순종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건강을 이유로 들었지만 자신이 총리대신을 계속맡으면 합방안에 서명해야 하고, 역사의 오명을 뒤집어쓸 것이란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순종은 이완용의 사직서를 돌려보냈다. 순종은 허울만 남은 황제였지만 합방이 불가피한 것을 알고 있었다. 합방되더라도 황족의 지위를 보장받게 해줄 사람은 이완용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된 한일병합조약 한국어 원문 /위키피디아
1910년 8월 29일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된 한일병합조약 한국어 원문 /위키피디아

 

사임은 하지 못했지만 이완용은 병 치유를 핑계로 523일 온양온천으로 떠났다. 그 직후 530일 일본 육군대신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조선통감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완용이 온양온천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624, 내각은 대한제국 경찰권을 일본에 넘겨버렸다. 일본은 합방에 반대하는 경찰 반란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628일 이완용은 한달여의 요양을 마치고 귀경했다. 이완용이 귀경하자 테라우치 통감은 합방협상을 요청했다. 이완용은 일본이 제시한 합방안 가운데 두가지를 제외하고 모두 수용했다. 두가지는 국호와 황실 지위에 관한 문제였다. 일본은 합방후 조선이란 국호를 사용하고, 황제를 태공(太公)으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이에 이완용은 국호를 한국으로 하고, 욍호를 유지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은 한국 또는 대한제국이란 국호를 용인하지 않았다. 조선은 과거 명·청의 속국이란 이미지가 남아 있는 반면에 한국은 독립국을 상징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나라, 청나라에 이어 일본을 상국으로 받아들이는 조선이란 국호를 선호했다. 이완용은 한국이란 국호를 고집하지 않고 국왕 칭호에 매달렸다. 그는 인민의 입장에서 고려한다면 국왕의 칭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고, 테라우치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대한제국 황제가 조선왕으로 바뀌게 되었다.

822일 창덕궁 흥복헌에서 순종과 함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완용은 테라우치와의 협상 내용을 보고했다. 회의에서 합방이 의결되었다. 순종은 이완용에게 합병조약 체결을 위한 전권위임장을 주었다. 이완용은 곧바로 테라우치에게 가서 한일합방 조약에 조인했다.

사실 나라를 팔아먹은 최종결정자는 순종이었고, 이완용은 대리인 또는 중개자였다. 을사조약 때와 마찬가지로, 성리학에 젖어 있는 유림들은 국왕을 비난하지 못하고 대리인에게 뭇매를 가한 것이다. 이완용은 고종과 순종의 몫까지 합쳐 나라를 팔아먹은 자’, 즉 매국노(賣國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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