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그후①…60만명이 끌려갔다
병자호란 그후①…60만명이 끌려갔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10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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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인구의 5% 정도가 청에서 노예생활…환향녀 굴레를 쓴 비운의 여인들

 

작가 미상의 <산성일기>(山城日記)에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굴복한 후 수많은 백성들이 끌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1)

 

적병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으로 따라 가는 이가 반이 넘었는데, 감히 소리를 내지 못하고 가만히 물어 사람을 찾거나 하였다. 혹 길에 엎드려 비는 형상 같은 이가 있으면 적이 쇠채로 쳤다. [……] 사대부의 처첩과 처녀들은 차마 낯을 드러내지 못하고 머리를 싸고 있는 이가 무수하였다. [……]

적이 큰 길로 행군할 때 우리나라 사람 수백을 먼저 행군케 하고 두 오랑캐가 좇아 종일토록 그렇게 하였다. (끌려간 이들 중) 훗날 심양 시장에서 팔린 사람만 해도 66만에다 또 몽고에 떨구어진 자는 그 수에 넣지 않았으니 그 수가 많음을 가히 알수 있었다. 이날 임금이 그 참혹한 형상을 차마 보지 못하셨던지, 큰 길을 거치지 않고 산을 의지하여 오셔서 새문(서대문)으로 환궁하셨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주목적은 명나라를 쳐 중원을 확보하기 앞서 후방의 교란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부수적으로 부족한 인력을 조선인으로 메우려는 목적도 있었다.

병자호란 때 끌려간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끌려갔는지에 대한 통계는 없다. 무능한 정부였다. 하지만 몇군데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그 수치를 가늠할수 있다. 2)

앞서 소개된 <산성일기>에는 66만명이라고 했다.

주화파 최명길(崔鳴吉)<지천집>(遲川集)에서 인조가 정축년(1637) 215일에 한강을 건널 때 포로로 잡힌 인구가 50여만명이라고 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 청군은 조선인 인간사냥에 나섰던 것이다. 이 인원은 한양과 그 인근에서 잡힌 숫자이고, 귀로에 황해도 평안도에서 잡힌 인구는 포함되지 않았다.

남한산성에서 식량을 관리하던 관향사 나만갑(羅萬甲)<남한일기>(南漢日記)뒷날 선양([瀋陽)에서 속환한 사람이 60만명이 되는데, 몽골 군대에서 포로로 된자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했다.

정약용(丁若鏞)<비어고>(備禦考)에서 선양으로 간 사람이 60만명인데, 몽골군에게 붙잡히는 자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얼마나 많은지를 알수 없다고 했다.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그림 부조 /위키피디아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그림 부조 /위키피디아

 

당대의 저술을 보면, 청군에 끌려간 조선인이 대략 60만명으로 좁혀진다. 당시 조선인구가 1천만~15백만명으로 본다면, 총인구의 5% 정도가 끌려간 것이다.

그들은 이 많은 조선인을 끌고가 어떻게 대우했는가. 만주족들은 끌고간 조선족을 부이라 부르며 노예로 삼았다. 피로(被擄) 조선인들은 집안의 노비에서 만주족 귀족의 집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을 했다. 그중에 솜씨 있는 기술자는 세금도 면제해주고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또 젊은 장정들은 군인으로 징집되어 명나라와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조선인이 대거 끌려갈 때 대신들은 자신의 식구들을 보호하기 위해 간사한 짓을 했다. 3)

<산성일기>에 반정공신으로 병자호란 때 영의정 자리에 있었던 김류(金瑬)의 이야기가 나온다.

 

김류의 첩과 딸이 포로로 된 일로, 김류가 용골대에게 일렀다.

만일 포로에서 빼어낸다면 당당히 천금을 주리라.”

이로부터 포로가 된 사람의 값이 중해졌으며, 이는 김류의 말 때문이었다.

용골대 등이 나갈 때 두 대신이 뜰에 내려섰다. 그런데 김류가 문득 정명수를 안고 귀에 대고 말했다. “이제 판사(判事)와 함께 일가와 같으니, 판사의 청을 내 어이 아니 들으며, 내 청을 판사가 차마 어이 듣지 않으리오. 딸자식 살리는 일은 판사가 모름지기 십분 주선하오.”

그러나 정명수는 답하지 않았다. 김류가 안고 놓지 않으니 명수가 괴롭게 여겨 옷을 떨치고 갔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지하(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지위에 있는 자가 오랑캐에 붙어 통역일을 해주던 반역자 정명수(鄭命壽)를 부둥켜 안고 판서’(장관급) 운운하며 포로로 잡힌 자기 첩과 딸을 풀어달라고 아양 떠는 장면이다. 임금은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수모(三跪九叩頭禮)를 당하는데, 영의정이라는 자가 하는 꼴을 보면 역겹다. <산성일기>의 저자가 하도 역겨워 후세에 알리려고 적어두었을 게다.

 

여진 군인의 모습 /위키피디아
여진 군인의 모습 /위키피디아

 

청에 끌려갔다 돌아온 조선인은 되돌려 보내야 했다. 1637130일 인조가 송파 삼전도(三田渡)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면서 맺은 정축약조(丁丑約條) 때문이었다. 정축약조에 돌아온 포로는 청으로 보낼 것이라는 조항이 있다.

현종 7년인 1666년 안추원(安秋元)이라는 조선 피로인(被擄人)이 청을 탈출해 조선으로 되돌아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안추원은 163713세에 강화도에서 청군에 소속된 몽골병에게 붙잡혀 청으로 끌려갔다. 이후 한인에게 노예로 팔렸고 1664(현종 5) 피로생활 27년만에 탈출에 성공해 조선에 돌아왔다.

조선조정은 안추원의 입국사실을 알고 내지로 보내 의복을 지급하고 그의 정착을 도왔다. 물론 청나라가 모르게 한 일이었다. 이 결정을 내린 사람은 영의정 정태화와 좌의정 홍명하였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동했을수도 있고, 당시까지 잔존하던 북벌론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현종에게 건의해 승낙을 받았다.

안추원이 고향 경기도 풍덕(豊德)에 돌아가보니 부모와 친척이 아무도 없었고 생계가 막막해 졌다. 그는 2년후 다시 청나라로 돌아갔다. 하지만 안추원은 청의 봉성(鳳城)에서 잡혔고, 이 사실이 청 조정에 보고되었다. 이는 피로인은 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정축약조를 명백히 위반한 행위였다.

청 조정은 이번 일을 기화로 조선에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즉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사신을 조선에 보냈다. 사신단은 안추원도 데리고 들어왔다. 조사과정에서 청의 사신은 당상관인 정태화와 홍명하는 물론 현종까지 궁지에 몰았다.

청나라는 조선에 5천냥의 벌금을 물리는 것으로 일단 사건을 마무리했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정태화와 홍명하에 대한 탄핵 조치가 이어지며 정국이 혼란에 빠졌다. 국왕까지 연루되어 수모를 당했다. 사관은 이 사건에 대해 어찌 남한산성 아래의 굴욕보다 못하겠는가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들이 도망쳐 와도 조선이라는 나라는 되돌려보내야 했고, 숨겨주다가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게 조선이라는 나라였다. 이 사건 이후 조선 임금과 신료들은 정축약조에 위배되는 일이라면 치를 떨며 기피하게 되었다.

 

여성의 지위가 격하되는 결정적 계기가 병자호란이었다. 당시 청군에 몸을 더럽힐까봐 자결을 선택하는 여이들이 수없이 많았다. 인조가 남한선성에 도망가 있던 동안에 수많은 여인들이 바다에 몸을 던졌다. “바다에 떠있는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 위의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다는 얘기도 있었다. 많은 여인들은 침략군에 겁탈당하고 포로로 잡혀 만주와 몽골로 끌려가 첩이나 노예가 되었다.

환향녀(還鄕女)라는 용어가 이때 나온 말이다. 청나라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은 정조를 잃었다는 이유로 바로 귀향하지 못하고 청의 사신들이 묵어가던 서대문 밖에 머물렀다. 조정은 이 여인들을 구제하기 위해 냇물에 몸을 씻게 하고 그들의 정절을 회복시켜주었다. 그곳을 널리 구제하였다는 뜻으로 홍제천(弘濟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홍은동(弘恩洞)이란 이름도 그렇게 해서 나온 지명이다.

환향녀들이 정절을 잃었다는 것은 조선 남성들의 인식이었다. 조선 여인들의 정절 의식은 청나라 사람들도 놀랠 정도였다.

청에 사신으로 다녀온 최명길의 보고가 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4)

 

신이 심양으로 갈 때에 들은 이야기인데, 청나라 병사들이 돌아갈 때 자색이 자못 아름다운 한 처녀가 있어 청나라 사람들이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하였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다가 사하보(沙河堡)에 이르러 굶어 죽었는데, 청나라 사람들도 감탄하여 묻어주고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후에 청군의 공격에 살아남은 명나라 왕수초(王秀楚)<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5)

 

청의 군사들은 사람들에게 자주 말했다. ”우리가 고려(조선)를 정복했을 때는 수만명의 여자를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그 중 한명도 정조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중국 같은 대국 여지들은 어찌 이리 수치심을 모르는가.“

 

조선의 여인들은 강물에 몸을 던지거나, 죽음을 각오하며 정절을 지켰다. 그러다 살아 돌아온 여인들에게 조선 남자들은 의심을 품었다. 남성들은 나라는커녕 여성도 지켜주지 못헸으면서, 여인들을 가차없이 내쳤던 것이다.

 


1) 산성일기, 김광순역 서해문집, 97, 100

2) 주돈식,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 77

3) 산성일기, 김광순역 서해문집, 99

4) 조선왕조실록 인조 16(1638) 311

5) 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I’,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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