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⑥…민중의 손가락질
이완용⑥…민중의 손가락질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3.18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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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치하 백작, 중추원 부의장…3·1운동 비판 댓가로 후작 승격

 

이완용은 을사조약, 한일합병조약을 통해 만고역적이 되었다. 그는 죽어서 대한민국 정부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다만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의 힘이 약해 혼자 설 능력이 없었고, 일본에 의지해 부강해진 이후에 나라를 되찾을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대부들은 그를 역적이라 하지만, 그 자신은 주군에 충성을 다했다고 믿었다. 그의 조카이자 비서였던 김명수는 일당기사에서 이완용을 이렇게 평가했다. “임금을 섬김에 존경과 예의를 잃은 적이 없었고, 임금의 뜻에 순종하되 결코 요행을 바라지 않았다. 시세의 흐름으로 힘이 미치지 못하여 어쩔수 없었지만 사정이 허락하는 한 조금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이완용이 총리대신 직에서 사직했더라면 그런 오명을 뒤집어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송병준이나 이용구가 그 자리를 꿰어차고 조약서에 서명을 했을 것이다. 가장 큰 책임은 고종과 순종이었다. 인도의 무굴제국이나 에티오피아에서 마지막 군주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도와 에티오피아는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되었다. 제국주의 무력을 이길만한 힘이 이들 나라에 없었다.

 

이완용은 일본의 조선 병탄에 협조한 대가로 귀족 작위를 받았다.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76명의 조선귀족이 탄생했는데, 후작 6, 백작 3, 자작 22, 남작 45명이었다. 가장 높은 작위인 후작은 철종의 사위 박영효 등 왕족과 그 친인척에게 돌아갔고 이완용은 그 아래 백작 작위를 받았다.

이완용은 또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중추원은 총독부의 자문기관이었는데, 일본인이 의장을 맡고 김윤식이 부의장을 맡았다. 김윤식이 1912년 자진사퇴한 이후에 이완용이 부의장이 되었다. 이완용은 조선귀족원 의장인 박영효와 함께 친일세력의 구심점을 형성했다.

조선 귀족의 대표로 이완용은 일본 황실의 주요 의전행사에 참여했다. 191110월 메이지(明治) 천황 생일축하 행사에 조선귀족 대표로 참석하고, 이듬해 7월 천황이 위독하다고 문안간 후 장례식까지 치르고 돌아왔다. 19134월 다이쇼(大正) 천황에게 문안인사를 갔다가 포도주 한병을 하사받았는데, 귀국후 귀족들을 모아 함께 나눠 마시며 만세삼창을 불렀다고 한다.

 

1919125일 영친왕 이은과 메이지 천황의 조카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 친왕의 딸 마사코(方子)의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완용은 이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에 갔다. 그런데 결혼 4일전에 고종이 갑자기 붕어했다. 조선의 귀족들은 고종 국장을 연기하고 결혼을 끝내는 것이 좋다고 의견을 모았다.

도쿄에서 이 소식을 들은 이완용은 왕족의 결혼으로 국장 선포를 미룬 적은 없었다면서 고종 탈상 1년후로 결혼식을 연기할 것을 주장했다. 일본과 조선의 귀족들은 이완용의 견해를 받아들여, 고종 국장을 먼저치르고 영친왕 결혼식을 1920418일로 1년 이상 연기했다. 이완용이 분별력 있게 양측 장례와 혼례를 조절한 것이다.

 

1919년 고종 사후에 일어난 3·1운동에 대해 이완용은 부정적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무지한 청년들이 제멋대로 소요를 일으켰다고 한탄하고, 만세운동을 망동이라 비난했다. 시위대는 이완용에 분노해 326일 그의 자택을 습격해 돌팔매질을 했다. 그는 세 차례의 경고문을 언론에 싣고 만세운동을 중지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조선의 독립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설사 독립한다고 하더라도 유지할 역량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조선민중을 달래기 위해 강권 통치를 하던 육군 출신 하세가와 총독을 경질하고 해군 출신인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를 신임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완용은 사이토를 마중하러 부산에 내려갔고, 다음날인 92일 사이토와 함께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때 강우규 의사가 서울역에서 사이토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다. 사이토와 이완용은 무사했지만 이는 조선인들의 증오심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덕분에 1920년 이완용은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귀족 가운데 승격된 사람은 이완용이 유일했다. 이완용의 아들 항구도 남작 작위를 받았다. 부자가 작위를 받은 경우는 이완용 부자 이외에는 없었고, 이완용의 작위는 손자 이병길에게 세습되었다.

 

이완용 /위키피디아
이완용 /위키피디아

 

1926211일 이완용이 죽었다. 이재명 의사의 칼에 폐를 다친 후유증으로 해수병이 악화되어 만 67세의 나이에 폐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은 화려했다. 일본인과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50명의 장례위원들이 참석했고 그의 장례 행렬은 그의 집 옥인동에서 광화문까지 이어졌다. 천여대의 인력거 행렬이 이어졌고, 기록영화로도 촬영되었다. 일본 천황은 국화대수장을 수여했다.

조선민중은 그의 죽음에 싸늘했다. 그가 죽은지 이틀후 동아일보는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글을 실었다.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겹겹이 있는 순사의 파수와 돈과 폐물 벽의 견고한 보호막도 저승사자의 들이닥침을 어찌하지 못하였다. 누가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능히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냐? 살아서 누린 것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이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천도교 잡지 개벽죽는다 죽는다 하던 이완용이 아주 죽고 말았다. 지하에 있는 이재명은 , 이놈이 인제야 죽었구나하고 웃겠지만 그런데 청소부들은 이제부터는 공동변소의 벽이 깨끗해지겠으니, 무엇보다 좋겠다고 치하하겠다며 비아냥거렸다. 이완용이 죽기 전에 공중변소에 이완용을 욕하는 낙서가 가득했다고 한다. 이완용에 대한 증오가 백성들 사이에 팽배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전라북도 익산에 묻혔는데, 그의 무덤을 훼손하려는 사람이 많아 순사들이 묘지를 지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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